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떤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로 일할 때의 일입니다. 4부 예배를 드리는 그 교회는 4개의 성가대가 있었습니다. 반주자가 각각 두 사람씩 여덟 명이 있었습니다. 반주자 중 한 사람이 청년이었는데 암이 걸려 반주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항암치료를 하고 오래 입원을 하였지만 별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마침내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은 기간 동안 꼭 반주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하던 반주자의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이 맡게 되어 그녀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반주자로서 끝까지 반주를 하다 죽고 싶은 것이 그녀의 마지막 남은 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그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희 성가대 올갠 반주자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죽기까지 충성하고 싶은 그녀를 위해 잠시 반주를 양보해달라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간절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목사 하나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들어보지도 않고 인사 문제를 목사님께 보고도 드리지 않고 마음대로 하려는 것이냐고 야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나이도 열 살 이상 차이나는 어린 사람에게 맞는 치도곤은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전후 사정이 이렇고 이래서 올갠 반주자에게 그렇게 해줄 의향이 있는지 물었던 것이지 그만두라고 한 것이 아니라고 자세히 설명을 하였습니다. 부목사는 목사님이 인사권을 함부로 침해하고 있다고 크게 화를 내시면서 가서 혼을 내라고 해서 자신이 왔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지만 목사님은 그걸 그런 방향으로 보지 않으시니 어쨌든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일단락이 지어졌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올갠 반주자는 교회 건축을 위해 대출을 받는데 자신의 아파트를 담보로 제공해서 목사님의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지도 않고 목사님은 부목사를 보내 혼을 내주라는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아마 제가 헌금을 제법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지휘자직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지 한 달 후 그녀는 죽었습니다. 영안실에서 그녀의 영정 사진이 제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애잔해서 한참을 진정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 그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주님이 받으셨습니다. 행복하게 그분 품으로 가십시오."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때의 일은 잊혀지지 않는 사건으로 제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때는 왜 사람들이 그토록 무정한지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바로 그 모습이 열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열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가을이면 하는 40일 철야 기도회에는 천 여명의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개근을 합니다. 직장에 나가 조는 한이 있어도 교회 일을 우선시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기가 사는 집을 팔아 전세로 옮기고 건축헌금을 드리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건축헌금을 드리기 위해 전세에서 월세로 옮기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사업이 어려워 허덕이면서도 빚을 내서 자동차를 구입하여 바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 년 열두 달 매주 빠지지 않고 주차관리를 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모든 얘배때마다 시간에 관계없이 성가대가 섰습니다. 저녁 찬양 예배 때에 찬양을 부를 때면 모두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이 춤을 추고 율동을 해가며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열심히 불렀습니다. '주여 삼창 기도'를 할 때면 정말 교회 지붕이 날아갈 듯 했습니다. 해마다 그 교회에서는 신학대학원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나왔습니다. 목사님은 신학대학원에 실천신학 교수로 강의를 하고 점차로 부목사들은 유학파들로 채워져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7층짜리 예배당을 완성했습니다. 오랜 후 그 교회를 다니는 사라을 만나 들으니 성도수가 만 명이 되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목회지망생들이 꿈꾸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곳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소원조차 외면하는 무정한 사람들만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목사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 일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부목사들에게서는 조직폭력배들의 맹목적인 복종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에게서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거칠고 사납기만 한 북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특별히 북한 동포들을 폄하하거나 악감정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독재자의 지배에 억눌린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그 교회의 모습이 그 교회만의 특별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그러나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사단의 하수인처럼 여기며 미워합니다. 썩어문드러진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것을 판단하지 않고 감싸는 자신을 오히려 대견스럽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인간들이 모인 교회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아무리 교회가 그래도 자신만 잘 믿으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현실을 호도합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의 꿈이 '돈 많이 벌어 십일조 제일 많이 하는 것'으로 모아졌습니다. 이웃의 고통에는 귀를 막고 살면서도 먼 외국에 예배당을 짓는 일에는 열심을 냅니다.(적은 돈으로 생색낼 수 있기에) 하지만 그런 일이야말로 사랑 없이 자기의를 쌓아가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것이 바로 열매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공들여 심은 씨앗이 자라 그런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이 맺고 있는 열매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독이 있는 못 먹는 열매를 맺고도 그것이 악한 열매임을 정작 본인은 알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래 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안식일날 회당에 참석한 한 편 손 마른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어쩌면 그 일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꾸민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3:4)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간단하고 분명한 그 질문에 아무도 대답 하지 않고 잠잠했습니다.
율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느라 인간으로서의 이성과 단순한 감정마저 말살된 것입니다. 연민과 긍휼이 사라진 메마른 종교인들을 그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분개하셨지만 그와 동시에 불행하고 마음 아프고 슬프셨습니다. 병자를 보고도 연민을 느끼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의 완고함을 보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현상은 인간이 종교에 열심이면서도 어떻게 마음이 단단하게 화석화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예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로 바리새인들은 물론 헤롯당의 처형대상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율법의 더 중한 바를 실천했기 때문에 율법을 준수하려는 자들에 의해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그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 역시 명확해집니다. 그런 모습에 분노하고 그들의 잘못된 행보에 제동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처럼 슬픈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처럼 병든 자를 보고 연민을 느끼고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보살펴주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이 되었다면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은 삶을 헌신의 삶으로 봉헌하고자 하는 반주자의 마지막 소원을 흔쾌히 들어줄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쫓겨나고, 정통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심지어 이단의 정죄를 받게 되더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랑의 사명을 완수하는 남은 자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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