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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어떻게 무너지는가?

p230~237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길 바라지만, 부모 자녀간의 복잡한 역학 관계에 당황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겁을 주고 싶지 않은데도 아이들이 제 안의 무언가를 건드리면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서 멈출 수가 없어요,” 수많은 부모가 이렇게 말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심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행동에 놀라곤 한다. 때로는 감정에 압도되어 휘둘리기도 한다. 부모 자녀 관계가 부모의 미해결 문제를 자극한다면, 어떠한 내면 작용이 이러한 단절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성찰해 볼 때다. 부모에게는 과거의 감정에 휩쓸려 자녀와의 현재 순간을 망치는 것을 멈추고 회복할 기회가 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자녀가 과거의 미해결 문제를 자극하는 상황에 놓이면 마음의 문이 닫히고 경직될 수 있다. 이는 자녀와 정서적 유대감을 유지하고 명확하게 사고하는 능력에 직접적인 손상을 가하는 마음 상태에 접어드는 신호다. 이러한 상태를 낮은 처리 모드라고 하며, 여기서는 낮은 길이라고 부를 것이다. 낮은 처리 모드에 들어가면 두려움,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이 범람한다. 이렇게 강렬한 감정에 휩사이면 신중한 반응이 아니라 충동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감정적인 대응이 마음 챙김을 대신하면 낮은 길에 들어서게 되고, 그러면 자녀에게 양분이 되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연결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낮은 길의 마음 상태에 접어들면, 반복적인 사이클에 갇혀 결국에는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은다. 해결되지 않고 남겨진 문제를 갖고 있으면, 특히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낮은 길로 빠지기 쉽다. 만약 당신이 분리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밤마다 취침 시간이 전쟁터가 될 수 있다.

 

중략

 

이렇게 낮은 길의 마음 상태에서 자녀에게 한 행동에 대해, 그 행동을 한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느낄 부모는 없다. 그러나 부모가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낮은 길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낮은 길에 있으면 높은 처리 모드롤 돌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의 뿌리를 성찰하면, 자신을 이해하고 낮은 길로 드러설 확률을 최소화하는 회복 탄력성을 키울 수 있다.

 

 

부모의 자기 치유력이 아이의 자존감이 된다.

 

유년기의 경험이 한 사람의 평생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상처밚은 부모도 충분히 괜찮은 부모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어도 그 경험을 바르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아이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안정을 느끼는 것은 부모가 자신의 경험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지와 연관되어 있다. 스스로를 이해하며 발전하는 부모는 아이들에게 안정감의 토대를 마련해 즘으러써 아이의 성장을 돕는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과 소통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을 바라본다. 또한 부모와 목적의식 있는 상호작용을 주고 받을 때 발전한다. 아이들의 자기 이해와 대인관계 능력은 부모와으 정서적 유대에 달려있다.

 

부모가 되면 아이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아이한테 배울 때도 많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는다. 이 긴밀한 관계를 통해 경험을 공유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 추억을 쌓으면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는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부모의 내면이 아이의 세상이 된다. / 대니얼 J. 시겔, 메리 하첼 지음-


 

전삼용 신부님의 강론 일부분의 글로 이 책 읽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1930년대 심리학자 징양 쿠오(Zing-Yang Kuo)는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두 그룹으로 나누었지요. A그룹은 어미가 쥐를 사냥하는 것을 보고 자라게 했고, B그룹은 쥐와 한집에서 친구처럼 자라게 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었을 때, 사냥을 보고 자란 A그룹은 85%가 쥐를 사냥했지만, 쥐와 함께 자란 B그룹은 쥐를 사냥하지 않았고 심지어 쥐를 무서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고양이는 쥐를 잡는다"는 것은 피에 새겨진 본능이 아니라, 어미를 보고 배운 '문화'였던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생존 기술은 철저한 조기 교육의 결과입니다.

 

사막의 파수꾼 미어캣을 보십시오. 그들은 독이 있는 전갈을 먹고 삽니다. 하지만 새끼가 처음부터 전갈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미는 단계적으로 가르칩니다. 처음에는 죽은 전갈을 주고, 다음에는 독침을 뺀 산 전갈을 주고, 마지막에는 독침이 있는 전갈을 주되 옆에서 지켜봅니다.

이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끼는 야생에서 전갈을 건드렸다가 쏘여 죽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생존하는 법을 보여주는 교과서입니다. 보여주지 않으면, 자녀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생존뿐만이 아닙니다.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법도 철저히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실력'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의 그 유명하고도 슬픈 '원숭이 실험'을 아실 겁니다. 그는 갓 태어난 원숭이를 어미에게서 떼어놓고, 우유가 나오는 차가운 철사 어미와 우유는 없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어미 인형을 넣어주었습니다.

아기 원숭이는 배고플 때만 잠시 철사 어미에게 가고, 나머지 시간은 온종일 천 어미에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따뜻한 접촉, 즉 사랑에 대한 갈구가 식욕보다 컸던 것이지요.

 

하지만 진짜 비극은 그다음입니다. 이렇게 모조품 어미 밑에서 자란 원숭이들은 나중에 무리에 넣어주어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짝짓기도 거부했으며, 억지로 새끼를 낳게 해도 자기 새끼를 돌보지 않고 공격했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사랑의 모델이 부재한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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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은 본능일까요, 아니면 학습된 것일까요? 우리는 당연히 타고난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화 톰과 제리만 봐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심리학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1930년대 심리학자 징양 쿠오(Zing-Yang Kuo)는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두 그룹으로 나누었지요. A그룹은 어미가 쥐를 사냥하는 것을 보고 자라게 했고, B그룹은 쥐와 한집에서 친구처럼 자라게 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었을 때, 사냥을 보고 자란 A그룹은 85%가 쥐를 사냥했지만, 쥐와 함께 자란 B그룹은 쥐를 사냥하지 않았고 심지어 쥐를 무서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고양이는 쥐를 잡는다"는 것은 피에 새겨진 본능이 아니라, 어미를 보고 배운 '문화'였던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생존 기술은 철저한 조기 교육의 결과입니다.

사막의 파수꾼 미어캣을 보십시오. 그들은 독이 있는 전갈을 먹고 삽니다. 하지만 새끼가 처음부터 전갈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미는 단계적으로 가르칩니다. 처음에는 죽은 전갈을 주고, 다음에는 독침을 뺀 산 전갈을 주고, 마지막에는 독침이 있는 전갈을 주되 옆에서 지켜봅니다.
이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끼는 야생에서 전갈을 건드렸다가 쏘여 죽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생존하는 법을 보여주는 교과서입니다. 보여주지 않으면, 자녀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생존뿐만이 아닙니다.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법도 철저히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실력'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의 그 유명하고도 슬픈 '원숭이 실험'을 아실 겁니다. 그는 갓 태어난 원숭이를 어미에게서 떼어놓고, 우유가 나오는 차가운 철사 어미와 우유는 없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어미 인형을 넣어주었습니다.
아기 원숭이는 배고플 때만 잠시 철사 어미에게 가고, 나머지 시간은 온종일 천 어미에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따뜻한 접촉, 즉 사랑에 대한 갈구가 식욕보다 컸던 것이지요.

하지만 진짜 비극은 그다음입니다. 이렇게 모조품 어미 밑에서 자란 원숭이들은 나중에 무리에 넣어주어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짝짓기도 거부했으며, 억지로 새끼를 낳게 해도 자기 새끼를 돌보지 않고 공격했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사랑의 모델이 부재한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의 절규가 바로 이 지옥을 보여줍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피조물은 처음부터 악마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숲속에서 행복한 가족을 훔쳐보며 사랑을 배우고 싶어 했고, 자신의 창조주인 박사에게 사랑받기를 갈구했습니다.
하지만 박사는 흉측한 그를 혐오하며 버렸습니다. 사랑의 모델을 상실한 괴물은 결국 잔혹한 살인귀가 되어 창조주에게 소리칩니다.
"나는 뼛속까지 외롭다. 나의 창조주여, 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 그러면 나도 다시 선하게 될 것이다."
괴물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보고 배울 사랑의 원본이 없었기에, 그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행복은 사랑과 관계에서 옵니다. 그래서 더 행복하려면 더 사랑해야 하는데, 만약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사랑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그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가르쳐 주지 않으면 그와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나 또한 기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의 '보보 인형 실험'은 인간이 얼마나 철저한 모방의 존재인지를 증명합니다.
어른이 인형을 발로 차고 때리는 영상을 본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똑같이 인형을 폭행했습니다.
반대로 어른이 인형을 안아주는 것을 본 아이들은 인형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내가 보여주는 대로 상대방은 배웁니다. 내가 사랑의 원형을 보여주어야만 상대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함께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요한 사도는 바로 이 원리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라는 완벽한 사랑의 모델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나누시는 그 완벽한 삼위일체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벅차고 기뻤습니다. 그런데 혼자만 알고 있으려니 기쁨이 완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웃들이 그 사랑을 몰라주면 요한과 진정한 친교를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편지를 씁니다.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Koinonia)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1요한 1,3-4)

요한이 사랑을 가르치려 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내가 본 그 사랑의 원본을 너희에게도 보여줄게. 너희도 이것을 보고 배워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라. 그래야 우리가 서로 삼위일체처럼 사랑하며 내 기쁨도, 너의 기쁨도 꽉 차게 될 테니까."

상대방을 사랑의 기술자로 만들지 않으면, 나도 그와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없어 외로워집니다.
기쁘려면,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그리고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교과서는 무엇입니까?

요한 복음 13장, 최후의 만찬장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신 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닦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Model)'을 보여 준 것이다."

말씀만 하신 게 아닙니다. 행동으로, 살과 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기쁨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으셨기에,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발 씻겨주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요한은 그날 밤 그 수건과 대야를 보았고,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는 스승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운 것을 자녀에게, 이웃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미어캣이 전갈 잡는 법을 가르치듯, 우리가 죄의 독에 쏘이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려면 스승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만 챙겨라, 이겨라, 밟아라"는 잘못된 사냥법을 가르칩니다.
그 영상을 보고 자란 사람들은 서로를 적으로 여길 뿐, 결코 하나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오늘 성 요한 사도 축일을 맞아, 우리의 시선을 세상이라는 TV 화면에서 돌려, 예수님이라는 원본에게 고정합시다. 그리고 내가 먼저 그 사랑을 배워 누군가의 발을 씻겨줍시다.

내가 사랑을 보여주면, 그도 사랑을 배울 것이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요한 사도가 약속한 '충만한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https://youtu.be/1-qr2gSFTAw

유튜브 묵상 동영상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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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 애착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p201~208)

자신의 애착 역사를 돌이켜 보면, 초기 가족 경험이 성인으로서의 발달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는 데 몇 가지 요소가 특히 유관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애착 연구에서 제공하는 일반적인 틀이 자기 이해를 심화하고 변화를 향한 길을 찾는 데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구에 따르면 안정 애착을 향한 성장은 충분히 가능하다. 획득된 안정 애착을 위한 노력이 종종 친구, 연인, 선생님, 치료사와의 건강하고 위안이 되는 관계와 관련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이해를 심화하는 과정부터 시작하는 것이 타인과의 연결을 강화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안정 애착을 향한 움직임은 당신과 자녀 모두에게 풍요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한다.

 

회피형 자녀와 회피형 부모

 

정서적 결핍과 공감 어린 양육의 부재를 경험하며 자란 사람들은, 대인 관계를 맺고 감정적으로 소통하는 일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적응한다. 이러한 태도는 정서적으로 메마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적응하기에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적응했고. 그런 아이들에게는 기댈 수 없는 양육자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생존에 가장 적절하고 유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적응 반응이 계속되면 부모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연결도 줄어들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회피형 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타인의 관점을 고려할 수 있는 마인드사이트를 갖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방어적인 마음 상태가 다른 사람과의 정서적 경험에 마음을 여는 동기를 억제한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대한 접근과 인식도 점점 줄어들 수 있다. 이처럼 회피형은 자신의 정서적 취약성을 줄이기 위해 우측 처리 모드를 최소화하고 좌측 처리 모드가 우세하도록 적응한 것을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측과 좌측 처리 모드를 연결하는 양방향 통합의 정도 역시 꽤 미미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회피형 애착을 가진 사람들의 불완전한 인생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이들은 종종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관계를 맺을 때도 독립심이 뚜렷하여 상대방이 외로움과 정서적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 어린 시절 필요에 따라 적응하기 위해 시작된 과정이 성인이 된 뒤에는 배우자와 자녀와의 건강한 관계를 방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하다.

 

이러한 특징을 변화시키려면 양방향 통합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 종종 우측 처리 모드가 덜 발달하여 마인드사이트의 최소화, 자기 인식의 축소, 때로는 타인의 비언어적 신호를 지각하는 능력의 저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논리적이고 비자전적인 좌축 처리 모드가 주로 관여하기 때문에 자기 성찰이 제한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좌측 처리 모드를 활성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실제로도 도움이 된다.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사람들은 애착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할 때 말로는 애착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는 발언을 하지만 몸에서는 생리적 반응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의 행동과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는 마치 관계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의 마음은 관계를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록 어쩔수 없이 애착에 대한 접근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적응하기 했지만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선천적인 애착 시스템이 여전히 건재한다.

 

이러한 관점은 과거 가족생활에서의 결핍에 적응하기 위해 관계의 중요성을 최소화하여 살아온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중요하다. 이들의 가족은 우측 처리 모드의 자극과 연결을 거의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의 정신을 활성화하는 길을 찾는 것이 대인 관계와 내면의 통합을 추구하는 마음의 본능적인 욕구를 해방하는 데 중요하다. 우리는 비언어적 신호에 초점을 맞추고, 신체 감각의 인지를 높이고, 뇌의 우측 처리 모드를 자극하는 등의 활동이 미성숙한 좌측 처리 모드를 동원하는 데 상당히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논리에 능숙한 사람들에게는,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정서적으로 메마른 가정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좌뇌가 우세하게 되었다는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실제로 도움이 된다. 새로운 뉴런, 특히 통합적인 뉴런이 평행에 걸쳐 계속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최근 뇌과 분야에서 발견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도 유용하다. 이처럼 비교적 중립적이고 덜 위협적인 관점에서 보면, 똑같이 중요한데도 제대로 발달할 수 없었던 처리 모드를 성장시키고 통합하려는 노력은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양가형 자녀와 불안형 부모

 

일관성 없는 부모 아래서 자란 성인에게서는 또 다른 유형의 적응 방식이 나타난다. 이들은 타인을 신뢰할 수 있을지 불안해한다. 일관성이 없거나 지나치게 개입하는 양육은 양면적이고 불확실한 감정을 낳는다. 이들은 타인의 애정을 강하게 갈구함과 동시에 자신의 욕구가 절대로 채워질 수 없다는 절망감을 경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계에 대한 긴급한 갈망이 오히려 타인을 밀어내고, 그로 인해 타인은 역시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재확인하는 경험을 반복하는, 자기 강화적 피드백 루프가 생성된다.

 

양면성과 집착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적응한 사람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대화나 이완 훈련과 같은 자기 진정 기술이 필요하다. 친밀한 사람들과 열린 마음으로 의사소통하는 것도 도움 된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적응은 우측 모드가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우뇌의 전문 영역인 자기 진정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자아에 대한 기억과 멘털 모델이 자신의 욕구가 충족될 것이고 타인과의 관계가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의심은 때때로 자신에게 무언가 결함이 있다는, 깊고 무의식적인 수치심을 동반한다. 이러한 수치심은 각각의 불안정 애착 유형에 다라 다양한 형대로 나타날 수 있다.

 

수치심의 메커니즘과 그것이 어떻게 우리 유년기의 일부가 되었는지를 이해하면, 이러한 정서적 반응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드는 틀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 어쩌면 우리는 불안감, 자기 의심, 고통스러운 감정이 우리를 망가뜨릴까 봐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심리적 방어막을 겹겹이 개발했을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 방어막은 정서적 암묵 작용이 자녀들의 대하는 방식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도 의식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우리는 자녀의 나약함과 무력함에 대한 분노와 함께 우리 자신의 내적 경험에서 원치 않는 측면을 자녀게 투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어린 시절 우리를 보호해 주었던 방어막이 오히려 자기 내면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막고 부모로서의 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최선의 육아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대응으로 겹겹이 구축된 방어막을 허무는 것은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불편한 감정을 다루는 전략을 습득하기 위한 첫걸음은 이완 훈련을 통해 불안과 의심을 진정시키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일관성이 없고 지나치게 개입하는 부모는 자녀가 자기 진정 전략을 발달시키지 못하도록 막는다. ‘자기 대화’ 기술을 배우는 것은 자신을 돌보는 데 매우 효과적인 접근 방식이 될 수 있다. “지금은 확신이 없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잘될 거야”. 또는 “그가 한 말이 신경 쓰이지만,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직접 물어보면 되지.” 이렇게 명확한 말로 자신에게 말을 걸면, 좌축 처리 모드의 언어가 우측 처리 모드의 불안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된다.

 

내면의 수치심을 은폐 할 수 있는 방어막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결함이 있다는 믿음이 부모의 무반응적인 연결에서 비롯된 어린아이의 결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나는 절대 사랑받지 못해.’ 또는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야.’라는 생각을 밀어내야 한다.

 

이러한 적응 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뇌가 자기 진정법을 배우는 길을 찾는 것이 핵심 열쇠다. 어린 시절 부모가 제공해 주지 못한 도구를 스스로 구할 수 있다. 여러 의미에서 이것은 내면에서부터 내가 나를 양육하는 것이다.

 

혼란형 자녀와 미해결 트라우마 또는 상처를 가진 부모

 

부모와의 경험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자란 성인은 내적 혼란으로 반응할 수 있다. 타인과의, 그리고 자기 마음과의 단절감은 비현실적이거나 내적으로 분열된 감각을 포함하는 해리 과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혼란형 적응의 좀 더 미묘한 측면으로는, 대인 관계에 대한 반응으로 마음 상태가 급변하는 것을 느끼거나 스트레스 상황에서 얼어 버리는 것 등을 포함한다.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 또는 상처는 해리와 같이 파편화된 내적 경험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상태가 더욱 강하고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으며, 자녀가 부모에게 의존하기가 더욱 힘들어져 단절을 회복하기 어렵다. 해결되지 않은 상태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은 부모와 자녀 모두를 치유하는 길이다.

 

미해결 문제는 기억, 감정, 신체 감각 등의 다양한 측면을 유연하고 자유로운 일련의 반응으로 통합할 수 없는 마음의 무능함을 반영한다. 그러한 통합 장애는 경직 또는 혼돈의 상태로 볼 수 있으며, 이 경우 부모는 반복적인 행동 패턴에 고착되거나 압도적인 감정 상태가 범람하는 것을 경험한다. 이렇게 극단적인 경직과 혼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자유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어린 시절 사건이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워도, 지금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통합적인 이해 과정을 통해 과거의 요소를 현재에 대한 성찰과 한데 묶으면,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감각과 좀 더 유연하고 풍성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혼자서도 이러한 과정을 거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우리의 아픔, 그리고 치유로 가는 여정을 목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도움 될 때가 많다.

 

해결책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에 마음을 열고 그것을 직면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좋은 소식은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장 힘든 단계는 나에게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 심각하고 두려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진실을 직면하는 어려움에 도전하여 신중한 발걸음을 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치유와 성장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이는 좀 더 이상적인 부모가 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

 

- 부모의 내면이 아이의 세상이 된다 / 대니얼 J. 시겔, 메리 하첼 지음 -


 집책을 하다

"부모의 내면이 아이의 세상이 된다" 는 책이

눈에 들어와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딸아이에게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엄마되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좀 더 좋은 엄마로서

아이를 양육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네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울 딸아이에게

양육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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