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타락
감자탕 교회라고 알려진 염광교회는 '러브 하우스'를 몇 채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인이나 외국인 노동자 등 가난한 자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가 집을 사서 그런 사람들에게 무료로 살 수 있게 해주고 있는 집들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참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엄동설한에 이사를 가야 하는 저희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러브 하우스'라는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조금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러브'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그 말이 남녀 간의 관계를 이르는 말로 그 의미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러브 하우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마도 일본 사람들에게 "러브 하우스'란 성매매소라는 의미로 들려질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에만 그런 현상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도 사랑이라는 말은 넘쳐납니다. 모두가 형제이며 자매임은 물론 자신들이 사랑으로 묶여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어느 교회건 자신들의 교회는 사랑이 넘쳐난다고 자랑을 하지 않는 교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오늘날 한국 교회에 사랑이 있는 교회가 있는가를 반문하고 싶습니다. 예배 시간 마다 옆 사람을 끌어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고 있다고 말하고, 우리 교회 목사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고 말하고, 우리 성가대는 사랑이 특징이라고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말하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요?
일본 사람들이 말하는 '러브'도, 교회 안에서 말하는 사랑도 분명 사랑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히 아닙니다. 어찌 보면 사랑이라는 말이 그 단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였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모든 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라는 말도, 평화라는 말도, 정의라는 말도 똑같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고 통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그 의미가 달라지고 거의 사람 수만큼 그 의미가 다양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말의 타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이 타락한 이유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자연스럽게 말의 타락으로 이어져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저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모님이 남편 목사와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짐을 싸가지고 나갔는데 어디로 가나 보았더니 강대상 밑으로 가더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곳에서만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들을 때는 그 목사가 참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하기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의 아내도 제가 설교할 때가 가장 좋다고 합니다. 설교 할 때는 바른 말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제 마음이 비수로 찌르는 것 같이 아픕니다. 제가 가장 경멸하는 사람이 바로 저인 셈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도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행동이 누구에겐 가는 코미디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분명 제가 설교하는 대로 산다고 생각하거나 살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가장 가까운 아내의 눈에는 그것이 허구이며 기만임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도 준비하기기 힘들었습니다. 옳은 말이지만 그 반대로 사는 저의 모습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실 때 이 부분을 꼭 기억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전하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말의 실수는 저의 특징이며 일상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 저희 대학 선배가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사람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훌륭한 목사 때문에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부족한 목사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올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들이 말도 안 되게 들릴 때마다 어리석은 저를 보고 반성하고 힘을 얻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온전함의 출발점
오늘날 교회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간증들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예수 믿고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들입니다. 물론 중간에 고난도 있고 상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 잘 믿었더니 사업도 회복되고 자녀들도 잘 되고 건강도 회복되고 모든 것이 감사로 넘치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 사람들은 믿음이 온전한 사람들이라는 자연스러운 도출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환 없이 넉넉하고 다른 이들을 좀 도우면서 여유롭게 사는 것이 믿음이 온전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의 믿음상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넉넉하고 평안한 삶이 온전한 믿음의 결과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사코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달란트의 비유에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일은 어떤 일을 많이 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믿음에 온전한 사람은 오늘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말에 온전함을 이룬 사람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이런 관점은 매우 독특한 것이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가 느끼는 바 역시 야고보 사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혀를 다스린다는 것은 곧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혀를 다스리면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물론 가식적인 태도로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혀를 다스리는 일, 다시 말해 말에 있어서 온전함을 이루는 것은 온전한 믿음과 정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을 사용함에 있어 온전한 사람이 참으로 온전한 사람입니다. 인내를 다 거친 온전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보다 말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말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참된 경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건의 비밀은 무엇보다 먼저 말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을 다스리는 것은 온전함의 출발점입니다.
삶과 분리된 가르침
1절에 의하면 말에 대한 이러한 경고는 주로 '선생', 곧 교사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초대교회에서 교사는 여러 은사들 가운데 하나였고, 매우 존경받는 중요한 직책이기도 하였습니다. 교사들의 주 임무는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르침이란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은사를 받은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들을 솎아내야 했습니다.(요일3장, 벧전2:1, 딤전6:3, 딤후4:3) 그것은 거짓 교사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교사들 가운데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거짓 교사들은 교리적으로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물론 완전히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치는 교사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거짓 교사들은 그렇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잘못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단적인 가르침들은 곧바로 그것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점은 말씀과 삶의 분리였습니다. 자신들이 가르치는 바를 스스로 행하지 않아, 가르침을 공허한 말잔치가 되게 하였습니다. 경건을 말하지만 능력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교리가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교리와 삶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틈을 각종 이단들이 파고들 수 있는 빌미가 마련되었습니다. 특히 야고보 사도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말뿐인 신앙, 말뿐인 가르침입니다. 삶과 분리된 가르침,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가르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선생님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교회의 교사는 그러므로 가르치면서도 스승이며 지도자 대접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언제나 가르치기만 하고 배우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올바른 말씀을 가르쳐야 하고 무엇보다 겸손하게 자신의 가르친 내용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양 무리의 본으로서 그들에게 좋은 꼴을 먹일 책임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일각에서 '목사무용론'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설교가 삶과 분리된 가르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삶과 분리된 가르침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언제나 과도하게 대접받기 원하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가르침만 옳다고 하고 다른 모든 좋은 가르침들을 거부하도록 만들 뿐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묶어두기 위해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들을 억눌로 힘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 합니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형제이며 동료이어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계급이 생기고 차별이 생김으로써 기껏 떠나온 세상 속으로 다시 회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근본적인 이유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야고보 사도의 권면을 무시하고 많이 선생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선생이 되려하면 삶과 분리된 가르침이 되면서 힘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은 목사를 없애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목사 제도를 고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겸손하게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기,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많이 선생이 되려 하지 않는 바로 거기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이 말을 하는 대상은 단지 교사들만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고 하면서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온전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이미 야고보 사도가 야고보서의 서두에 천명한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신자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실수라는 단어는 "프타이오멘"인데 이것은 단순히 실수한다는 번역으로는 단어에 담긴 뜻을 제대로 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에서는 '실수'가 아니라 '실족'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단지 실수만 해도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면 그 기준이 너무 가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벼운 말실수조차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족이라는 표현은 보다 중대한 결함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는 말로 인해 적지 않은 낭패를 보는 경우로서 누구를 실족하게 하거나 특별히 그 때문에 공동체에 타격을 입히거나 본인도 실족하는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없다면 그는 야고보의 기준으로 볼 때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할지, 어떤 말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를 잘 분별하고 이를 잘 통제할 수 있다면 그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능히 온몸도 굴레를 씌우리라는 것은 다른 모든 것 역시 온전해질 수 있다는 표현입니다.
말의 고향
하나님 나라에서는 말도 구속되어야 합니다. 더렵혀지고 오염된 때를 완전히 씻어버리고 그 말이 가진 아름다움과 광채와 찬란한 의미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또 다른 존귀한 임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 거룩함을 잃었습니다. 거룩함과 생명의 원천을 잃었기에, 거룩함도 그에 근거한 생명도 잃었습니다. 모든 것이 부패해졌고, 그중 가장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말은 마음의 표출입니다. 부패한 마음에서는 부패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만 타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만 타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사용하는 말 또한 타락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만 구속될 것이 아니라 말도 구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타락한 세상 속을 그분의 진실하고 긍휼하고 깨끗한 말씀, 곧 언약의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세상은 지나가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영영히 섭니다. 그리고 영영히 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의 말도 그 부패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바쳐 그 말들을 구속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곧 말을 씻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낱말 하나, 그 잃어버린 의미를 찾기 위해 끝까지 배우고 노력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회복되면 우리는 반드시 공동체를 이루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수도 없이 공동체에 대해 말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참된 공동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샬롬의 나라에 대해 말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자기 욕망에 눈이 가린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복음이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와 용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담겨 있는 말들의 의미를 하나씩 회복해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 사도가 왜 말에 실족하지 않는 사람이 온전한 신앙인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이 구속되어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들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우리가 하는 말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들을 하나씩 구속해나갈 때 우리는 마침내 말의 고향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노자의 금언을 토론하며 열중해 있었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스승이 오자 그들은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를 물었다.
스승이 말했다.
"너희 중에 누가 장미의 향기를 아느냐?"
모두들 안다고 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그걸 말로 표현해 보아라."
모두들 말이 없었다.
-안소니 드멜로 <<일분 지혜>>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이 가지는 한계를, 그리고 무엇보다 말의 고향이 침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의 고향은 침묵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곳에 도착할 때 마침내 침묵이신 하나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소 하나로도 온 몸과 삶 전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관계, 영원히 하나로 존재할 수 있는 관계가 그곳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정죄함이 없고,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어진 능력의 분량만큼 최선을 다하면 되는 자유의 나라 안에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 열심히 사랑하면서 말의 고향인 침묵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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