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正名)
역사는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공자 또한 그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공자는 노나라의 정치가로서 자신의 사상을 실천에 옮길 기회를 얻었는데, 정치를 너무 잘 해서 노나라의 힘이 강해진 것을 주변 나라들이 질시하는 바람에 결국 자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공자의 사상 가운데 정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논어에 그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로는 공자의 제자입니다. 그는 늘 스승에게 모든 가르침을 쉽게 설명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공자와 자로가 나눈 대화는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그런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로는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한 위나라의 임금이 공자를 찾아와 함께 정치를 해 보자고 제안한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공자는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는 것', 즉 정명을 먼저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정명이란 다시 말해 사물을 제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입니다.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국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그런 부정직한 이름의 사례들을 끊임없이 접하게 됩니다. 개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조세 개혁', 거짓으로 드러난 '명분들', 정적들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들', 빌 공(空)자 공약이 되어버린 선거 때의 '약속들', 실체 없는 말이 되어버린 '부정선거'와 같이 부정직한 이름들이 되어버린 이러한 말들의 '이름 바로잡기'를 추구한다면 우리나라는 얼마나 살기 좋아질까요?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에서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날까요? 사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성'을 회복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의 기독교는 얼마나 진리로부터 멀어져 있는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교회들을 향해 "예수 없는 예수 교회"라 말하기도 하고 "바벨론에 갇힌 복음"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말의 의미가 달라짐으로 해서 복음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참된 의미를 말하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화를 냅니다. 복음에 사용된 말들의 의미가 전혀 엉뚱하게 인간의 욕망과 탐심을 합리화하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랜디 알콘의 소설<<천국의 사람 리쿠안>>에는 말이 담고 있는 서로 다른 이해가 어떤 것인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등장합니다.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다룬 이 소설에서 외국인 기업가 벤 필딩은 만리장성을 바라보며 만리장성을 놀라운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중국인 친구 리쿠안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에게 만리장성은 강제 노역 때문에 죽어간, 수천, 수만 명에 달하는 중국 농민들의 묘비일 뿐이었습니다. 리쿠안은 만리장성의 위대함을 판단하는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돌과 회반죽 때문에 남편과 아들들을 잃어버린 여성 농민이 그 기준이지. 이런 속담이 있어. '사물을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나에게 저것은 '만리장성'이 아니야. '고통장성'이지."
과연 어느 단어가 바른 것일까요?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만리장성을 계속해서 만리장성이라 부르느냐 아니면 만리장성을 고통장성이라고 부르냐에 따라 현실과 미래가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계속해서 만리장성을 짓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장성이라 부르는 사람은 결코 그와 같은 희생의 역사를 시작하거나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름을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라
이름을 바로 잡는 그 일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도 강조되고 있는 바입니다. 성경은 많은 구절에서 진실을 요구합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진리만을 말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의 변증법은 이름을 바로잡는 최선의 길입니다. 사랑에 근거를 두지 않는 진리는 폭력적이 될 수 있고, 행동하지 않는 사랑은 연약한 감상주의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훈련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늘 염두에 두고서 언제나 사태를 최대한 명확하게 표현하는 단어들을 선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랑과 진실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특성입니다. 우리가 이름을 바로잡으려 할 때 과연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는 세상의 온갖 우상들의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겸손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가 우리의 선택과 행동, 태도와 목표에 붙인 이름들은 변함없이 정직하고, 자비롭고, 사랑과 진실이 담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시51:6)
우리 역시 시편기자처럼 노래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 역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보닌 편지에서 시편 기자와 같은 진실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가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일합니다. (고후13:6)
또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제는 진리를 말하므로 여러분과 원수가 되었습니까?"(갈4:16)
이름을 바로잡고 철저한 정직을 요구하다 보면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기분 나빠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해 살면, 하나님의 진리에 부합하는 온전한 진리만을 원하게 됩니다. 단 정직함으로 요구할 때도 언제나 사랑으로 말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온전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절대적인 말의 영향력
오늘 본문을 통해 야고보 사도는 말의 문제가 실제로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지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말馬, 배船 그리고 불火 이렇게 세 가지 예를 들어 혀를 사용해서 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얼마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를 역설합니다.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 하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중 첫째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 모두에게 야고보 사도는 못을 박듯 단호한 어조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먼저 혀는 말의 입에 물린 재갈과 같다고 말합니다. 비록 작지만 그것 하나로 말을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말에게 재갈을 물리지 않는다면 말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재갈을 물리면 말을 탄 사람이 이끄는 대로 말은 서고 달리고 방향을 전환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은 내뱉으면 그뿐인 것이 아닙니다. 말을 한 사람은 사람이지만 일단 말을 하고나면 그 말이 그 사람의 재갈이 되어 그 말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격분한 마음에 내뱉은 한 마디 말, 급하게 써버린 한 줄의 문장, 그것 하나로 우리의 인생이 뒤바뀌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는 무엇에 씌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홀렸다는 것입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는 후일담입니다.
그 다음으로 야고보 사도는 말을 배에 달린 키에 비유합니다. 바다에 아주 거친 바람이 입니다. 그리고 바람이 일으키는 거친 파도나 물결에 밀려가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말을 하는 혀는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이렇게 말해서 이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저렇게 말해서 저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을 사십 년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걷던 광야는 그토록 광활한 광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짧게는 한 달, 길어도 일 년이면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크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그곳에 사십 년이나 머물게 한 것은 바로 그들이 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바란 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의 대표를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열두 명의 대표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보고는 둘로 극명하게 갈라졌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대표들은 그곳이 좋은 당이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거인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마치 메뚜기와 같다고 말하며 그곳을 정복하는 것이 자실행위와 다름없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곳은 좋은 땅이고 그곳의 거민들이 크고 장대하지만 그들을 자신들의 밥이라고 말하며 나아가 정복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이스라엘은 열 명의 대표들이 한 불신앙의 보고를 따랐고 결국 그들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한 후 광야에 뼈를 묻고 말았습니다. 상황은 똑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한 말은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그 말 때문에 그들의 결과는 달라졌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거칠다 하여도 그것을 보고 내뱉는 우리의 말이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배의 키입니다. 아무리 거친 풍랑 속에서도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야고보 사도는 말을 불과 숲에 배유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특히나 더 부정적입니다. 사소하게 뱉은 말이 삶 전체를 불살라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우리에게 생소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말 한 마디 때문에 뜻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사소한 다툼 끝에 내뱉은 말 한 마디 때문에 칼부림이 일어나고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 경우를 우리 모두는 뉴스나 신문을 통해 보거나 듣고 있습니다.
사람이 분노에 가득한 말을 쏟아내면 그 분노의 말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낫이 풀을 베듯이 여기저기를 혼자 마구 베고 돌아다니는 것을 목격하거나 경험하게 됩니다. 얼마되지 않아 주변에는 그렇게 분노의 칼날을 맞고 쓰러진 사람들로 가득해집니다. 작은 불이 숲을 불태우는 것처럼 그렇게 커다란 숲이 폐허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부주의한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엄청난 결과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시각은 이 세상이 타락과 부패에 갇혀 있고, 인간의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성경적 세계관과 그 맥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와 사고와는 달리 부패의 핵심적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나 영혼이 아니라 혀 곧 말입니다. 말의 파괴력, 그런 파괴력을 가진 말의 배후를 밝히기 전에 말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영향력에 새삼 주목할 것을 촉구합니다. 말은 결코 사소하게 다룰 수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막중하고 그 파급 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암송과 글쓰기
그러면 우리는 말씀의 타락을 막고 회복하고, 이름을 바로잡고 그리고 사랑으로 진실을 말하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실천해야 할까요?
물론 우리는 먼저 우리가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말을 적게 하고, 천천히 말하고 가급적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암송과 글쓰기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고 기억에 남는 대목들을 암송하는 버릇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유대인들은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모세오경을 다 암송합니다. 그리고 이슬람 신자들 역시 코란을 다 외웁니다. 그들이 외운 말씀이 그들의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지 않거나 성경을 읽고 많이 아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을 듣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처럼 우리도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119:105)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말씀이 심긴 사람들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암송할 때마다 우리 안에 심긴 말씀들이 우리에게 등이 되고 빛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글쓰기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말을 하는 것보다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 글로 써놓으면 자신의 마음을 보기가 더 쉬워집니다. 또 글쓰기를 통해 우리가 하는 말들이 얼마나 사납고 거칠었는가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댓글을 읽어보면 그 안에 그 사람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거칠고 무례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달아놓은 댓글들을 볼 때마다 그 사람들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가장 확실하게 말을 적게 하고 천천히 말하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독자적인 글을 쓰기가 어렵다면 다른 이들의 글에 댓글을 달거나 블로그를 운영하며 다른 이들의 글을 옮겨 놓고 그에 대한 소감을 적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러시아의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어느 인터뷰에서 러시아 음악을 계속 연주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의 일부거든요." 우리 안에 말씀이 있고 우리가 그것의 일부가 된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던 주님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시대가 어둡습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교회들을 들여다보아도 우리는 그곳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악한 심성은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우리에게 외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심긴 말씀은 사랑으로 진리의 길을 걸으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말씀은 내 발의 등이 될 것이며 내 길의 빛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과 선택, 태도와 사고 유형은 우리 안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에 연결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 역시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어지니 교회 모든 지체들이 그렇게 되기를 끝까지 기도할 것입니다. 그 기도에 동참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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