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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올무

 

오늘은 하경이가 겪은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지난 주 하경이가 길에서 오천 원을 주웠습니다. 같이 가던 친구가 하경이에게 같이 본 것이니 주운 돈을 나누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나눠주지 않자 그 친구는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그 일을 말했습니다. 주운 것이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하경이 친구에게서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 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혹시 그 아이 엄마가 권사님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하지만 약간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서 그리스도인인 제가 느꼈던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경이 친구의 하는 말은 옳은 말입니다. 잃어버린 물건이나 돈을 주우면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도리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의 마음과 행동은 옳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의 마음은 온통 원망과 시기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얻은 행운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과 함께 나누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을 도리를 말함으로써 표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마음과 말 그리고 행동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마음은 누가 보아도 잘못된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옳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옳은 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행동은 아주 비열하고 악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그런 행동까지 가지는 말아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정치인들도, 사업가들도, 종교인들도 모두 옳은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이기심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행동은 표리부동합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하는 말은 아름답습니다. 바르고 올바릅니다.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목사일수록 강단에서 전하는 설교말씀은 유창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어깨를 들썩이고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들만큼 신명 나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말에는 진정성이 없습니다. 그 안에 참된 복음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도 속아 넘어갑니다. 그들이 하는 옳은 말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말들이지만 그럴듯하게 치장해서 말하며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사람들은 기꺼이 속아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커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편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 그 이면에 진리의 길을 걷기 위해 버려야 할 세상의 것들이 아깝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종교문제로 그다지 심각해 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인간은 속이고 속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말들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공허하거나 파괴적인 말들을 분별해낼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속지 말라

 

야고보 사도는 한 마디로 우리에게 속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만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며,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이며, 결국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분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만 들어서는 모습니다. 말로는 얼마든지 속을 수 있고 얼마든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제어하려면 그 말이 나오는 근원과 그 말이 함께 동반하는 특성들, 그리고 그 결과인 열매들을 분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을 다스리려면 먼저 분별력과 분별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말을 할 때 그리고 말을 들을 때, 과연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말과 행실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가 지혜 있는 자이겠습니까? 누가 잘 배우고 잘 아는 자이겠습니까? 말만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어떤 지혜롭고 유식한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행함을 보라고 합니다. 어떤 지혜롭고 유식한 말을 들을 때에 그 사람의 행함에 주목하고 합니다. 꼼짝없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에게 있어 말의 참된 의미는 그 행함에 있습니다.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해도 실제로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실제로 아무 유익이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속이 빈 말입니다. 무의미한 말일 뿐입니다.

 

지혜와 선함은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혜나 지식은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참된 지혜나 참된 지식은 항상 선하고 아름답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서로 갈라져 있지 않습니다. 서로 구분은 되지만 서로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참된 것은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선한 것은 참되고 또한 아름답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것은 선하고 진실합니다. 그 셋이 분리되면 그것은 온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진리임을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는 모습이 전혀 선하지 않고 도리어 악하다면 그것은 참된 진리가 아닙니다. 세상에는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선한 행실이 따르는 경우는 보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많이 알기 때문에 교만하고, 몰상식하고 추악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오랫동안 동명원이라는 고아원을 드나들었습니다. 요즘은 정부 예산으로 운영이 되지만 과거에는 예산이 터무니없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기부자들의 기부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부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봉투에 십만 원을 넣어 전달하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을 사진 찍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고아원 아이들을 전부 불러 모아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였습니다. 고아원에 기부하는 것은 선한 행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함보다 더 크게 광고하며 오만 군데에 자랑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댄다면 그것은 교만한 것으로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선한 행실은 참되지도 않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늙은 어머니의 손입니다. 자식을 기르느라 손가락 마디가 다 휘고 검푸른 핏줄이 튀어나온 그 손이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손입니다. 그 손의 아름다움은 연예인들의 가꾼 그 어떤 손보다 그 어떤 얼굴이나 몸매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모습이 참되고 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속아서도 안 되고 말을 들으면서 속아서도 안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어떤 지혜로운 말 유식한 말을 듣거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행실을 보고 분간하라고 권면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리를 주장하고 지혜로운 말을 하고 많은 지식으로 말하는데 그의 행실이 선하지 않다면 그는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의 지혜나 총명은 참되지 않습니다. 선한 행실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형교회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오늘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작은 교회에서는 비교적 목사의 언행심사가 노출되기 쉽습니다. 말과 행실이 다른 것이 쉽게 구분됩니다. 사실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의 목사에게 실망하고 다른 교회를 찾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교회들 역시 비슷합니다. 그러니 다닐만한 교회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대형교회에서는 여간해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공적으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대형교회 교인들이 목사를 만나는 것은 공적인 자리에서 뿐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그 목사가 겸손하고 진실 되고 훌륭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목사의 일상 속에서의 행함을 보지는 못합니다. 대형교회 교인들이 쉽게 속아 넘어가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옥석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속고 속이며 교인들을 쟁탈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혜와 총명은 반드시 선한 행실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또 그런 선한 행실은 반드시 가시적인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이번 주에 저는 세이비어 교회의 고든 코스비 목사님에 관한 글을 써보았습니다. 그분의 삶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존경스럽고 또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분의 하는 말과 그분의 행함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하는 모든 일에는 그분의 지혜와 총명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고든 코스비 목사님은 대중 앞에 나서거나 유명해지고 싶어 한 적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전국 어디서나 강연할 수 있었고 가끔 초청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소명은 "교회가 되고자" 노력하는 적은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머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이비어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교 기관들과 사역을 끊임없이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연계된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세이비어 교회는 물질만능주의, 업적주의가 판을 치는 탐욕의 신자유주의 시대 한복판에서 말없이 보여줍니다.

 

그분은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에 출연하지도 않았습니다. 대통령과 대화한 적도 없습니다. 대형교회를 세운 적도 없고 여러 교회를 개척한 적도 없습니다. 전국적인 운동을 일으킨 적도 없습니다. 심지어 세계 여행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분은 다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하라고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어 세이비어 교회의 사역이 되었고 그 수혜자들은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 어떤 대형교회도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랑하지 않고, 혼자서 세상을 구원하려는 듯이 더 많은 일에 탐닉하지도 않았습니다. 150여 명의 교인들과 함께 '아버지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판단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개인의 경우라면 그 사람이 얼마나 검소하게 사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진실 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경우도 개인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보면 그 교회가 얼마나 주님과 가까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당신 곁에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교회에도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연계되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됩니다.

 

세이비어 교회는 바로 그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사실 세이비어 교회는 70여 개의 사역과 연간 일천만 달러가 넘는 예산을 사용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교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역의 규모와 영향력에 주목하지만 고든 코스비 목사님이 주목하는 것은 돈과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일하심입니다. 그는 그의 삶의 주제를 묻는 이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삶의 중심 주제는 이것입니다: 예수가 이 시대들 속에서 그의 지상의 삶을 따르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의도하셨을까요? 21세기에, 지구적인 가난을 제거하고, 탐욕과 공포와 인종주의와 군사주의의 마귀를 몰아내며, 우리가 인간이 되는 과업을 이루도록 도와주도록, 지금 우리를 사용하시라고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준비된다면, 하나님은 준비한 것보다 더 많이 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말과 행함이 일치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고든 코스비 목사님처럼 온전히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릴 수 있고 그런 사람의 말과 행함은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

 

지혜의 온유함으로

 

오늘의 본문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 '지혜의 온유함으로'(엔 프라우테티 소피아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문법적으로 몇 가지 의미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혜에서 온유함이 나온다는 의미, 온유함 자체가 지혜라는 의미 그리고 지혜의 특성이 온유함이라는 의미가 그것들입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를 놓고 생각해 보면 온유함은 참된 지혜 자체라기보다는 그 특징이거나 결과로 여겨집니다.

 

참된 지혜 혹은 총명이라고 부르기에 합당한 그런 지혜는 항상 온유함을 동반합니다. 온유함을 특징으로 하고 반드시 온유함을 드러냅니다. 스스로 지혜라고 주장하는데 거기에 온유함이 아니라 독한 시기와 다투고 싸우는 기세가 등등하다면 그리고 그런 지혜를 퍼드리면 퍼뜨릴수록 더욱더 시기심이 발동하고 이기적 욕망이 자극되어 다투고 싸우고 경쟁하는 일들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참된 지혜라 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지혜나 지식을 그 자체만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지식이 과연 어떤 특징을 드러내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꼭 들려주어야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십시오. 분쟁은 한국교회의 일상입니다. 싸움은 한국교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교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싸우는 곳, 그것도 지독하게 싸우는 곳'이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모두가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을 합니다. 성경을 들이댑니다. 상식을 들이대고, 정당함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들이 다 맞는 것 같은데, 거기에 온유함이 없습니다. 양쪽의 소리를 듣고 나면 있을 곳이 없어집니다. 편을 갈라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속이 상하고 혈과 육이 자극되고 시기와 분노와 저주의 말이 솟구칩니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그런 주장이나 그런 지혜나 지식은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위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지혜에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지혜는 언제나 온유함을 그 특징으로 하고 온유함과 함께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동떨어진 교회를 위해

 

말에 행함이 따르는가, 지혜의 온유함이 있는가, 오늘 살펴본 이 두 가지만으로도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이 얼마나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렇기 때문에 애써 행하려 하고 지혜의 온유함으로 행동하려고 하는 이들이 의심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이 한국 기독교 전체의 분위기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많은 일을 했다거나, 범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을 지적받고 즉시 그 자리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배워야 할 태도는 바로 그것입니다. 손봉호 장로님은 그래서 박사 학위로 문제가 되고 있는 대형교회 목사에게 제삼세계로 나가 가난한 이들을 섬기라고 조언하였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목사가 더 깊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목사는 그런 충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 목사가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함을 보이지 못하는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는 또 분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편이 갈려 싸우고 있습니다. 그 싸움이 점점 더 확대되고 있고 물론 법정으로 비화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지혜의 온유함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차라리 불이익을 당하고, 불의를 당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온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슬프지만 저는 그들이 속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가 그런 지경이니 더 말해 무엇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들을 위해 저는 고든 크스비 목사님의 삶의 중심 주제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21세기에, 지구적인 가난을 제거하고, 탐욕과 공포와 인종주의와 군사주의의 마귀를 몰아내며, 우리가 인간이 되는 과업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더 이상 속고 속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없도록, 지금 우리를 사용하시라고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안에 담겨 있는 지혜와 총명을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는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그 길을 선택할 때 우리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며 동료이어야 할 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유별나다는 작은 지적으로부터 이단이라는 심각한 지적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아니라면 우리 역시 속이고 속는 자들이 되는 것이며 진리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홀로 걷는 길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걷는 길이며 우리가 사모해야 할 주님과 동행하는 그 길입니다. 그 길로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준비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준비한 것보다 더 많이 하실 것입니다.

 

 

출처 : ♡어지니♡
글쓴이 : 늘 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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