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난제 나눔

요나서에 대한 묵상글

J_카타리나 2007. 11. 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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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에 대한 묵상

 

1535쪽 요나에 대한 얘기 수없이 많이 들었죠.  1535쪽 2장밖에 안되죠. 요나서는 참 아름다운 성서입니다. 왜냐하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에요.

   

요나를 계속해 보세요. 요나요나요나요나요.... 요나를 거꾸로 해보면 “나요” 입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내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성서를 넘기면 한 장, 두 장밖에 안되는 이것을 한 권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고, 이것을 없애지는 못해요. 왜?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의 이야기를 써 놓았기 때문에. 누구요?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가 여기 들어 있어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어떤 수사님 이야기입니다. 그 수사님은 곧잘 다른 사람하고 싸움을 해요. 하도 싸움을 많이 하는데, 어느 날 옥상에 올라가서 대판 싸움을 했어요. 그랬는데 큰신부님이 불렀어요. 수사님이 신부님께 불려간겁니다. 그때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 너는 도대체 수도자가 되어서 벌써 몇 번째냐? 지금까지 얼마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처음 들어온 친구들을 괴롭혔느냐? 너는 보니까 도대체 수도자로서 표양이 아니다. 그러니 너 같은 애가 우리 수도원에 있으므로 해서 우리 수도원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안 좋게 보이니까 수도원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 했더니 수사님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신부님보고 하는 말이 “신부님, 가라면 내 가겠습니다. 가는 것 좋은데 나 같은 이런 망나니가 수도원에 사니까 그래도 요모양이지, 만약 내가 수도원을 나가 밖에서 살아 보십시오. 바깥 꼬락서니가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러면 내 나가겠습니다. 가라면은.”  그러니까 신부님이 듣고 난 후 “그럼, 너 여기 사는 것이 낫겠다. 밖에 나가 세상을 더럽히는 것보다 수도원에서 조금씩 덜 더럽히며 살아라.” 해서 지금도 살고 있어요. 그 수사님은 개망나니이지만 수도원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지난 여름에 한국에 한번 들어갔어요. 여름방학이었어요. 그때가 8월달인지 7월달인지 그때 제가 옛날에 있던 수도원의 본당으로 가니까 금요일에 들어갔는데 우리 신자들이 쫓아와 찾았어요. “신부님 찾아서 난리를 쳤는데 어디 갔다 이제 오십니까?” 그러더니 “우리가 내일 토요일 본당에 있는 열 가족이 1박 2일로 야유회를 갑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같이 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요?” “거기에 산골로 가는데 성당이 없어요. 거기에 가면 아무리 빨리 나와도 미사를 못할 것 아닙니까? 신부님이 좀 가셔서 미사 해주면 안되겠습니까?”  “알았습니다.” 하고, 토요일날 저는 장애자들이 있는 소화 영아 재활원에 가서 장애자들을 위해 미사를 드리고 가겠다고 하니까 자기들은 오전 10시에 출발하고 저는 오후 3시 미사를 하고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산골로 차를 몰고 우리 수사님과 같이 들어갔습니다. 밤에 가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캠프장에 모였는지, 거기에 가니까 천주교 대연 교회라 쓰인 하얀 천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야 여기에 우리 신자들이 있구나.... 마중을 나와 들어갔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뭐합니까? 제말 잘 들으세요.  그 중에 한사람이 전파상을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앰프기를 들고 왔는데, 술을 마시고는 얼마나 크게 틀었는지 그 많은 사람들이 캠프장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술도 몇 잔 먹었겠다. 싸움이 벌어졌어요. 저는 우리 수사님과 함께 옆에서 술마시며 그냥 있었어요. 그리고 새벽 2시쯤 잤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주일이니까 미사를 해야 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미사 합시다.” 하니까 신자들이 와서 “신부님, 미사 장소를 다른 데로 옮겼으면 좋겠습니다.” “왜요?” “어제 여기에서 술 마시고 싸움까지 했는데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면 천주교 신자라 하는 것이 표가 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르는 데로 가서 하자” 그래요. 그래서 “어디서 할까요?”  찾아보면 다른데 있다 이거지. 가만히 있으니까 “그래도 여기서 합시다. 옮기면 천막을 또 쳐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미사를 거기서 했어요. 그래도 우리 신자들이 착하다고 이렇게 착한 사람이 없어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신부님, 그러면 우리 보속으로 화장실이 옆에 있는데 거기 화장실이 엉망진창인데, 우리가 보속으로 거기를 청소하면 안되겠습니까?” 그러기에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미사 마치고 그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제가 이른 아침으로 그곳을 갔을 때, 얼마나 더럽고 지저분했는지, 똥이 넘치고 넘쳐서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미사를 드리면서 제가 무슨 강론을 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천주교 신자들인데 여러분들이 성당 다닐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래도 성당 다니니까 성당 다니면서 조금 나아질 것 아닙니까? 만약 성당을 안 다니면 미안한 감도 없어요. 으례히 그런 줄 알고 깽판치고 말아요. 그래도 또 미안하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변소 청소하겠다고 그래서 여러분들은 성당 다닐 필요가 있고 또하나 왜 우리가 이 자리에서 미사를 드려야 하는가? 왜 어젯밤 깽판친 이 자리에서 미사를 드려야만 하는가? 아브라함은 순례 여행을 떠나면서 하느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여행을 떠나면서 가는 곳마다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곳에 있는 이방인들의 신당에다 제단을 꾸미고 거기를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로 삼습니다. 세겜이며 모든 장소를 그렇게 만듭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들의 땅에, 다시 말해 우리가 더럽혀졌다고 생각하는 그 땅을 거룩하게 만들고 하느님의 제단으로 만듭니다. 어젯밤 깽판친...... 그 축복 받지 못하던 그 장소를 어떻게 만듭니까? 미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축복을 통해서 미사가 드려지는 곳. 거룩한 장소로 바꾸는 겁니다.

 

우리 신앙인 들은 “저런 사람도 성당 다닌다. 저 사람은 누구누구 대모인데 자기 대녀 돈 떼먹고 도망 다닌 사람이었다. 매일 부부 싸움만 하고, 저 사람은 사회에서 표양도 안 좋은데 성당에서 사목위원도 하고 간부도 하고 저런 사람도 성당다닌데....” 우리들은 이렇게 얘기하죠. 그죠? 그래도 다닐 이유가 있습니다. 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그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래도 성당을 다녀야 합니까? 자 이제부터 이런 물음에 대해서 우리가 더 잘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가르치시는가? 요나서를 공부하는 겁니다.  서론은 그렇습니다.
1장만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봉독)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도망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요나는 누구냐 하면 애국자입니다. 애국자 자기 나라를 지극히 사랑하는 애국자입니다. 지극히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입니다. 우리들처럼 요나가 왜 도망을 갔느냐? 4장 2절에 그 답이, 이유가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르싯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하느님께서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좀처럼 화를 내시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으시어 악을 보고 벌하려 하시다가도 금방 뉘우치시는 분이신 줄 어찌 몰랐겠습니까?”  이런 하느님입니다. 요나가 말하는........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니느웨가 잿더미로 변할 것이다. 망하게 될 것이라고 알리라고 했는데 요나는 안 갑니다. 왜 안가는줄 압니까? 니느웨는 바로 이 히브리인들과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렀던 적국입니다. 원수의 나라. 한국과 일본, 영국과 아일랜드,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런 관계와 같은 그런 나라의 민족이 바로 니느웨입니다. 요나가 생각하기에 애국자로서, 요나가 생각하기에 요나는 자기 하느님 야훼 하느님께서 자기 적국인 니느웨가 멸망당한다는 것을 자기가 알림으로 인해서 니느웨를 어떻게 해요? 멸망으로부터 구원하게끔 하라는 명을 준 것입니다. 요나에게. 요나는 이것이 싫어요. 왜? 애국자이었기 때문에 요나는 자기 적국인 다른 나라가 민족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는데 이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멸망하지 않게끔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를 파견시키는 것입니다. 요나가 하느님께 요청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다른 민족에 대해 신경 쓸 시간이 있다면 그럴 시간이 있다면 그만큼 더 우리 민족을 사랑해 주십시오” 라는 겁니다. 요나가 말한 내용이 이것입니다. 요나는 지극한 민족주의자였고 애국자였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얘기하라는 그 말씀을 듣고 요나는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나오는 요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 두 번째로 요나는 요빠로 내려가는데 거기서 다르싯으로 가는 배를 만나서 뱃삯을 다 냅니다. 정당하게 뱃삯을 다 주고 배를 탑니다. 배에 누가 있었을까요?  많은 승객들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뱃사람도 있습니다.  한참 배를 타고 가다 보니까 누가? 하느님께서 바다에 바람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는 요나가 탄 그 배를 어떻게 합니까? 배를 풍랑에 흔들리게 하고 침몰 직전까지 몰고 갑니다. 자 그러자 지금부터 하는 말씀이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요나와 같이 있던 뱃속의 뱃사람들은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무거운 짐들을 바다에 집어던지고 어떻게 하면 이 곤경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애를 써 봤지마는 안됩니다. 그랬더니 너무너무 중요한 말이 하나 나옵니다. 뱃사람들은 겁에 질려서 저마다 자기의 신에게 부르짖으며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배안의 짐을 바다에 던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뱃사람들도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각기 자기들이 믿고 있는 신에게 기도를 드립니다. 각기 자기들이 믿고 있는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뱃사람들과 배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요나,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다른 종파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각기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를 합니다. 이 난국을 어떻게 해 달라고 말입니까? 벗어나게 해 달라고. 그런데 여전히 그 난국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신에게 빌어 보았지만은 효과가 없습니다. 각기 자기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신에게 빌었지마는 위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난국에 그들은 요나를 발견합니다. 저 배밑창에서 잠을 쿨쿨 자고 있는 요나를 깨우죠. “이런 판국에 잠만 자느냐? 혹시 아느냐 네가 믿는 너희 신에게 빌어 보아라 그러면 너의 신이 이 위기를 구해 줄 줄 아느냐?” 그리고서 뭐라고 합니까? “넌 도대체 뭣하는 놈이야?”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도망치는 사람입니다. 나를 빠트리십시오. 그러면 구원될 것입니다.” 그러나 뱃사람들은 너무 착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들입니다. 뱃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입니다. 자... 결국은 해결을 하려고 해도 안되니 요나가 방법을 가르쳐 준 것처럼 요나를 물 속에 빠트립니다. 물 속에 빠트리면서도 이 뱃사람들은 착합니다. “야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하여 우리를 멸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살인죄를 씌우지 마십시오. 당신께서 다 뜻이 있어 하시는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는 요나를 바다로 집어던지죠. 바다가 쥐죽은 듯 잔잔해 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설교를 하고 나서 먼저 저편으로 배를 몰고 갑니다. 한참 가고 있는데 갑자기 풍랑이 입니다. 두렵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자 한참 걸어오시니까 어렴풋하게 보이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유령이다” 하죠. 그래서 겁을 냅니다. 그러자 가까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나다” 라고 할 때 제자들은 두려우면서도 예수님을 배안에다 모셔 드립니다. 예수님이 배에 타자마자 어떻게 됩니까? 잔잔해 집니다.

 

요나를 바다에 집어넣자 마자 바다는 조용해집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몹시 두려워서 야훼께 제물을 잡아 바친 후에 다시 서원 제물을 드리기로 약속합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립시다. 요나는 어떤 사람이라 했습니까? 애국자, 민족주의자, 자기 민족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요나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원했는데, 요나는 무엇을 원했는가 하면 이 하느님이 자기 민족들만의 하느님이기를 원합니다. 요나는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에 애국자이기 때문에 우리들만의 하느님을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을 우리는 어떻게 만드는가 하면 좁은 하느님으로 옹졸한 하느님으로 한 민족만을 사랑하는 하느님으로 만듭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신앙관입니다.

 

하느님은 결국은 니느웨, 이스라엘의 적국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셨고 그들을 다 구원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하느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들만의 하느님으로 카톨릭 신자들만의 하느님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하느님 관입니다. 우리 가족들만의, 우리 레지오 공동체만의 하느님, 우리 형제들만의 하느님, 우리나라만을 사랑하는 하느님, 우리 민족들만.... 이것이 우리주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고이즘이라 하는 이기주의 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는가? 전쟁의 대부분은 종교전쟁입니다. 보스니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느님을 자기들만의 하느님으로 우리들만의 하느님으로 만들기 위해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요 세계 역사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반성해야 할 내용입니다. 이 것이 요나에 나옵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중의 하나가 여러 가지 있겠지마는 뱃사람들도 자기 신들에게 부르짖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부르짖은 자기 신들이 그들이 처한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야훼 하느님께 요나가 제안했던 그 방법대로 뱃사람들은 실행했고, 결국 뱃사람들은 요나를 통해 당한 그 위험에서도 야훼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야훼 하느님이 누구인지 만나게 됩니다. 야훼 하느님이 누구인지 체험하게 되었고 야훼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야훼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 구원을 받습니다. 요나를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은 타 종파 사람들 그리고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불교 신자들, 이슬람 신자들 누구나 다 요나를 몰랐던 사람들이 요나를 통해서 처한 이 위기 상황에서 요나를 통해서 야훼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내용이죠.

왜 우리가, 죄인인 요나 같은 우리가 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왜 그렇게 싸움 잘하는 수사님이 수도원에 남아 있어야 하는가? 깽판치고 술 마시고 싸움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왜 우리가 미사를 봉헌했어야 했는가? 다른 데로 피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죄많은 나를 통해서 야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야훼 하느님을 알게 되고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내 가족 안에 수없이 많은 종파로 나누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같은 형제인 그리스도교로서도 갈라져 있고 같은 가족 안에 엄마는 불교 신자이고 또 자식은 여호와의 증인에 나가고 그러다 보니 며느리만 카톨릭신자인 경우도 있어요. 왜 카톨릭 신자 며느리가 필요한가 왜 그리스도인이 필요한가. 요나서에서 이야기합니다. 바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다른 종파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구원되는 것입니다. 비록 민족주의자이고 고집이 세고 자기 것만 알고 있는 요나 같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라 하더라도 나를 통해서 야훼 하느님은 그래도 엉겁결에 위기 상황에서 나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이 요나, 나를 통해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구원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살아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하느님의 메시지입니다. 결국은 이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됩니다. 바람을 일으키신 분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바람을 잠재우신 분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위기 상황에서 구해 주신 분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느님이라는 이름에 GOD이 나와요. 호랑이를 신으로 소를 신으로 섬기는 데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문자로 god 잡신으로 들어갑니다. 거꾸로 하면 영어 단어가 됩니다. dog. 개가 되요. 개. 그래서 이봐라 하느님은 개다 다시 말해서 신으로 숭배하는 우상 숭배자들도 개를 신으로 봅니다. 창조주이신 야훼 하느님은 소문자 하느님이 아니고 대문자 하느님입니다. God 거꾸로 읽으면 단어가 안됩니다. doG. 영어에서는 대문자가 제일 뒤에 올 수가 없어요.  유일하신 하느님이라는 개념과 우상 숭배에서 말하는 수없이 많은 잡신들이라고 말하는 개념은 차이가 납니다.

   

오늘 요나를 통해서 위기 상황에서 요나를 만난 다른 사람들까지도 구원해 주시는 야훼 하느님. 여기에 왜 우리가 요나서를 공부해야 하는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결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어야 될 것인가?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서 같이 곁들여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만들 때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했죠. 그러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다. 하느님의 속성 중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닮은 꼴 중의 하나가 “자유”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신앙인이 얽매이면 그것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무엇에 매달리고 애착을 갖고 있는 것은 참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라도 우리는 하느님을 자유롭게 해줘야 합니다. 요나처럼 우리들만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자유롭게 할 때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인류의 하느님, 우주의 하느님으로 우리가 섬길 때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왜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볼까요? 나는 기도할 때 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건강을 지켜 주십시오. 하느님!!! 우리 집 자식 네명이 공부를 못합니다. 공부좀 잘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 아빠가 능력이 없어 돈을 못 법니다. 저런 아빠와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니 저 아빠가 돈좀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 기껏 생각한다는 것이 우리 엄마를 위해서... 지금 여기 안 계시지마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를 위해서.... 내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 우리들의 하느님이 됩니다. 우리의 하느님, 우리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지 압니까? 바로 이런 하느님입니다. 내가 기도를 내 가정을 위해서만 기도를 드리면 하느님은 내 가정만의 하느님입니다. 내가 기도를 어느 날 소말리아에 있는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이를 위해서 기도 드리면 하느님은 소말리아까지도 영역을 넓히시는 하느님이 됩니다. 내가 드리는 기도의 질에 따라서 하느님의 영역이 넓어지고 좁아집니다. 내가 어느 날 누구를 위해서 E.T.를 위해서 우주인 E.T.를 위해서 기도해 봅시다. 하느님의 기도는 E.T.에게 까지 우주에까지 영역이 넓혀집니다. 하느님의 영역은 커집니다. “자유” 라는 것은 얽매인 것이 아니고 다 이렇게 개방되어 있는 겁니다.

 

내가 만든 하느님은 어디에 있을까? 이청준이라는 선생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소설가입니다. 이분이 쓴 재미있는 꽁트집이 “치질과 자존심”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치질과 자존심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 인간은 엉덩이에 치질을 가져야만 했는가? 똥을 누면 피도 나오고 엉덩이도 가렵고 왜 우리 인간은 치질을 가져야 했는가? 네발로 기어 다는 짐승은 치질이 없어요. 우리 인간도 처음에는 네발로 기어다녔기 때문에 치질이 없었어요. 이 머리가 그래도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직립보행 하겠다고 앞발을 슬슬 돌면서 머리가 자꾸 자꾸 올라갔어요.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무게 중심이 엉덩이에 모이기 시작했고 엉덩이에서 뭔가 이상한 것이 튀어나오더니 이것이 바로 치질이 된 것입니다. 치질과 자존심. 자존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엉덩이에 치질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꽁트속에) 뭐가 나오는가 하면 도둑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도둑놈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울타리를 쳤어요. 그리고 이것은 내땅이다. 내집이다. 그러니 남이 내땅에 들어오면 됩니까? 안되죠.  내땅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는 어떻게 합니까? 대문을 만들어 놓고 자기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대문으로 나가 남의 땅으로 출퇴근을 다 해요. 그렇죠?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도둑놈이다. 자기 것은 지키면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면서 남의 땅에는 버젓이 들어가는 사람들. 남의 것을 자기것인양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 것은 지키면서 안 내어 주면서.......  우리들의 모습도 마찬가지 일거예요.

 

파티마에 가보니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기념으로 서독과 동독을 갈라놓았던 벽있죠. 그것을 쪼개 와서 유리관속에다 전시해 놓았어요. 저는 유리 관속에 전시해 놓은 무너진 그담을 보면서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동독과 서독을 가르면서 중간에 베를린 장벽을 세워 두었습니다. 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장벽을 무너뜨린 독일은 동독과 서독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의 그 담으로 독일이라는 울타리를 쳐버렸습니다. 그리고 독일 밖에 있는 사람과 독일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별했습니다. 그리고 장애자들을 만나면 그 구국주의자들은 두들겨 패 죽입니다. 외국인을 만나면 총을 쏘기도 하고 칼로 찌르기도 하고 두들겨 패기도 하고 몰매를 줍니다. 이해는 갑니다. 그러나 이 원래의 벽을 가지고 동독과 서독을 갈랐던 이 벽을 자기 민족만의 벽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그것이 독일의 오늘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모습하고 똑같아요. 여기까지 이야기 드리고... 그 다음으로 넘어갈께요.

 

넘어가기 전에 하나만 더 할께요. 이런 질문을 많이 하죠.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우리 교회에서도 많이 이야기하고 카톨릭에서도 많이 이야기하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을 많이 하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다시 말하면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 플로렌스 공의회라는 아주 예전에 있었던 공의회에서의 가르침입니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맞습니까? 오늘 요나서에서는 누가 구원받습니까?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요나를 통해서 구원을 받죠? 다른 신을 믿는 사람도 구원을 받습니까? 구원받았죠?  오늘, 그런데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어요. 말이 맞습니까? 말이 맞긴 맞아요.

 

우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년 시작해서 1965년에 끝난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나오죠. 거기에 보면 이런 용어가 나옵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그 말이 뭔가 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아닌데 그리스도인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불러요. 다시 말하면 교회는 다니지 않는 사람인데 선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착한 뜻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구원이 되나? 안되나? 됩니까? 될 것같죠? 우리 교희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한 뜻을 지니고 착한 뜻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구원에서 제외될 수없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타 종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불교 신자, 회교 신자, 그리고 우상 숭배자들도 포함되고 무속 신앙은 우리가 모르겠고...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다른 종파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비그리스도교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믿고 고백하는 그들의 신앙을 우리 교회는 존중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 가르치는 데로 그들의 교리가 가르치는 대로 성실하게 살아가기를 우리 교회는 권장합니다. 카톨릭 교회의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종파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는다.” 하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렇게 얘기 안했어요. “교회에선 구원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없다” 라고 한 거지, “구원되지 않는다” 라고 안했죠.

   

 

자.... 그럼 우리는 요나서를 공부한 목적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카톨릭 신자이어야만 하는가? 왜 교회에 다니는 크리스챤이어야 하는가? 오늘 요나서에서 들려주는 말씀이 이겁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착한 사람은 다 구원받지 않는다" 라고 얘기 할 수 없습니다. 그들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냐 이겁니다. 하느님은 카톨릭 신자들만의 하느님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나가시는 분들은, 그분들이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닌가? 똑같은 하느님인데..... 그죠? 그 다음에 하느님은 그리스도인들만의 하느님입니까? 그렇지 않죠.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만물 다 만들었죠. 그러면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것. 하느님은 모든 것의 하느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렇게 이기주의적이고 우리주의적이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이 카톨릭 신자들입니까? 아니어야 되죠. 그것이 신앙인들의 모습이어야죠.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하느님 계획이 있겠죠. 하느님의 계획에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기로 되어있었어요. 우리가 죄를 짓던 안 짓던 관계없이 하느님은 우리 인간만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해서 죄 때문에 하느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원래부터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계획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느님입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느님이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온갖 고통 중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음하고 있는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입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인간만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를 안 지었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하느님이 왜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자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고 타종파들도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더욱더 충실하기를 우리는 권고하고 바랍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여러분들이 다른 종파에 대해서 손가락질하고 해야 되겠습니까? 절대로, 하긴 하는데, 그래서는 안되죠?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은 그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받아 모시고 고백하는데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은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할 때 기도의 대상이 작은 범위에 있을수록 하느님을 작게 만드는 것이고 우리가 기도의 대상을 나, 우리 가족, 우리 민족을 벗어나서 영역을 넓히면 넓힐수록 하느님을, 크신 하느님, 통크신 하느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기도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자유로워 질 수 있는가. 하느님을 얼마만큼 우리가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느님은 자유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기도함으로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 큰 자유를 주십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 다음 요나서 2장으로 넘어가면 결국은 물에 빠진 요나는 어떻게 됩니까? 큰 물고기가 와서 잡아먹죠. 물고기가 잡아먹은 것이 아닙니다. 야훼께서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잡아먹게 하셨습니다. 야훼께서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잡아먹게 했지,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킨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 바람을 일으키신 분도 하느님이시지, 바다가 바람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사흘 밤낮을 고기 뱃속에 있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야훼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야훼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명령하여 요나를 뱉어 내게 하십니다. 야훼께서 하신 일이십니다. 요나가 입을 열었습니다. 요나가 한 이 기도, 너무나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봉독)
“그 숨막힌 곳에서........”

   

여기에서 보면 ‘숨막히는 곳에서....’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체념한 상태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어요. 그때 그 의식이 가물가물해 지는 바로 그 순간에 야훼께 메 달리고 기도를 드렸더니 하느님 계시는 그 궁전까지 그 기도가 다다랐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살았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다시는 하느님 성전이 있는 곳으로는 얼굴은 못 돌릴 줄 알았습니다마는 돌리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시온산에는 하느님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자기가 병에 걸렸을 때 또는 누구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또는 이 속터지는 마음을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싶을 때, 넋두리를 하고 싶을 때에는 시온산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가서는 하느님 야훼가 계시다고 믿었던 그 산에서 하느님 야훼께 기도를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합니다. “하느님 정말 너무 하십니다. 그래도 나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믿고 희망을 걸었는데 왜 나에게 고통을 주십니까? 당신은 진짜 하느님이십니까?” 한탄, 원망을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원망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하느님께 한탄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하느님께 탄원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감사기도만 기도가 아니고 찬미기도만 기도가 아닙니다. 다윗왕이 썼다는 시는 찬미기도뿐만 아니라 원망의 기도도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내가 절망에 빠졌을 때 “하느님 해도 너무합니다.” 하고 원망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이렇게 내가 어려울 때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을 때, 내가 큰 병에 걸려 있을 때 이 아픈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시온산에 올라가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성전으로 변화됩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궁전, 성전으로 다시는 못돌릴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왜 성당에 다니는가? 왜 성전에 가는가? 왜 성전에 모이는가? 히브리인들이 이 시온산을,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었던 시온산에 우리 신앙인들은 성전을 시온산으로 보고 지금의 성전에 가서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곳에서 기도 드려도 관계없습니다. 바로 성전을 왜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고 성전을 찾고 성전을 짓고 하는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송스러운 말입니다 마는 제가 영국에 있을 때 성공회에 가보면 우리처럼 감실이 없어요. 성체등이라는 것도 없고 감실이 없어요. 감실을 우리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느님의 궤라고 했죠. 그럼 성당에 들어가면 감실이 있고 감실 등이 빨갛게 켜져있고 뭔가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교회에 들어가면 없어 뭔가 허전한 것 같애. 저희들이 볼 때 선입관이 되겠읍니다마는. 영국의 우람한 캔터베리 대성당, 옛날에 카톨릭 성당 이였지마는 지금 성공회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도 뭔가 허전해요. 사람이 안 살고 있어요. 뭔가 살아 있어야 되는데 없어요. 그것이 뭔가 하면 성전의 개념입니다. 바로 그러할 때 기도를 했을 때 하느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이 성전에 대한 신학이 나오는 것도 바로 여기 제 2장입니다.

  

 

 3장에 보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외칩니다. 결국 요나는 야훼의 말씀을 할 수 없이 가서 외칩니다. 사흘이나 걸려서 외쳐야 할 것을 동네에서 한 번 외치고 맙니다. 뭐라고 외칩니까? “요나는 니느웨를 하루 동안 돌아다니면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습니다. 40일만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 이 말에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단식을 선포했다. 높고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붉은 베옷을 입고 단식하게 되었고 이 소문을 듣고 니느웨 임금이 용상에서 일어나 어의를 붉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사람이나 짐승, 소떼나 양떼 할 것 없이 무엇이라도 맛을 보아서는 안되고 먹어서도 안된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까지 붉은 베옷을 입혀라. 그리고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어라.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남을 못살게 굴던 나쁜 행실은 모두 버려라. 하느님께서 노여움을 푸시고 우리를 멸하시려던 뜻을 돌이키실 줄 아느냐?” 이렇게 못된 행실을 버리고 사람들이 돌아서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저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셨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40일이 지난 후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칩니다. 니느웨 곧 멸망할거다. 그죠. 그런데 시간을 줍니다. 40일간의 시간을....  우리가 왜 사순절을 지킵니까? 40일을 통해 사순절을 지킵니까? 사순절을 우리 교회에서는 은총의 시기라고 합니다. 그 시기를 우리 교회에서는 회개의 시기라고도 합니다. 그 시기를 우리 교회에서는 축복의 시기라고도 합니다. 멸망당할 우리에게 하느님께선 기회를 주십니다. 40일 동안...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를 탈출해서 40년동안 광야에서 헤매입니다. 40일이면 갈 수 있는 그 광야를 하루를 1년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반항하므로 인해서 40년동안 광야를 헤매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어떤분이신줄을 야훼 하느님이 어떤분인줄을 체험으로 깨닫게 했습니다. 그래서 쓰여진 것이 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기는 성서 중에서도 가장 먼저 쓰여졌습니다. 출애굽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처음에 경험이 있었다.” 이것이 출애굽기 시작입니다. 그 출애굽기 시작의 “한 처음에 경험이 있었다.” 라는 그 경험은 바로 출애굽에 대한 그 경험입니다. 억압 속에서 에집트 사람들의 압박 속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바로 이런 엄청난 출애굽의 하느님을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과월절 축제로 신앙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 히브리인들은 과월절 때마다 똑같은 예식을 하면서, 자기 자녀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에집트에서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신 분은 야훼 하느님이시다. 그때 그 기억을 결코 잊지 말며 야훼 하느님을 잊어서는 안된다.’ 라고 지금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라는 신앙고백으로 만들어집니다. 그것이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출애굽기를 창세기로 창조 설화로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창세기” 입니다.

 

그래서 오늘 요나는 뱃사람들에게 불려 나가서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들어 내신 야훼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공경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사도 신경의 첫 번째인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입니다.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보면 “나는 믿나이다.  한 분이신 전능 천주 성부. 하늘과 땅과 유형 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때, 40일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이해하십시다. 40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회개의 시기인 동시에 축복의 시기, 은총의 시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하느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바로 죄많은 요나를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했던 요나를 통해서 구원해 주십니다.

   

왜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는가? 죄인인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살아야 합니까? 나를 통해서 멸망당할 어느 누군가가 야훼 하느님을 알게 되고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서는 안됩니다. 죽으려고 애를 쓰지 마십시오.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 요나 서는 내 이야기입니다. 나의 이야기요 나요, 내 이야기를 써 놓았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 안시켰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마는 하느님께서는 바로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구원해 주셨고, 지금도 구원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요나서에서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고자 하는 것은 엄청나게 큰 은총의 메세지요, 선물입니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실망하지 마시고 절망하지 마시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그리고 성호를 긋는데 열심히 그으십시오. 성호 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운 삼위일체 신앙을 여러분들이 체험하셨으면 합니다. 성호경은 뭡니까? 십자가를 그으면서 나를 거룩하게 합니다. 성호경은 뭡니까? 십자가를 그으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를 하나로 모읍니다. 가운데로. 가운데 계시는 분은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는 한가운데 모시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해서 모여듭니다. 그것이 성호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팔방 십육방에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성호경입니다. 내몸에 삼위일체 하느님이 내몸 한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그 삼위일체 하느님의 기, 힘이 여기 나를 중심으로 해서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호입니다. 여러분들이 힘있게 성호를 그을 수 있을 때 크게 그으십시오.

   

서울대 병원에 있을 때 어떤 분이 교통사고를 당해 마비가 되었어요. 손가락만 움직이는데 우리가 가면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손을 누워 있는 분의 배에다 갖다 줍니다. 그러면 끝에다 성호를 긋습니다. 이렇게 성호를 그을 수 있는 것도 행복인데 지금 우리는 잘 안긋읍니다. 성호경을 크게 그읍시다. 더 크게, 크신 하느님을 나에게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호경입니다. 이제 마지막 한마디만 하고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성사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죠. 성사. 칠성사가 있죠. 원래 7성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수없이 많은 성사가 있었어요. 그런데 마틴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성사에 대해서 부정하기 시작합니다. 성사 생활을 부정하면서 성사에 대해서 부정하면서 나올 때 우리 카톨릭 교회에서는 반동 종교개혁이라는 것을 일으킵니다. 반동 종교개혁이라니까 좀 이상하죠. 종교개혁에 대하여 카톨릭 교회가 새롭게 반성하면서 이루어졌던 공의회가 반동 종교개혁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성사, 수없이 많았던 성사를 요약을 합니다. 요약을 해서 몇 가지 성사로 이야기하는가 하면 일곱가지성사, 이것을 7성사라 합니다. 7성사를 요약하면서 7성사에 들어가지 않는 나머지 성사들을 7성사에 준하는 성사라 해서 준성사라 합니다. 누군가 여행을 떠날 때 신부님한테 와서 강복을 받는다. 배를 타고 선원이 떠날 때 신부님께 강복을 받는다. 집을 축성한다. 성물을 받아 방사를 받는다. 이것이 준성사입니다. 7가지 성사에 준하는 나머지 성사를 준성사라 한다. 그러면 7성사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냐? 7이란 숫자는 4+3 이다. 너무 쉽죠. 4+3입니다. 4가 뭔가? 4는요. 우주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근본 요소 4가지입니다. 이것을 사원소설이라고 하는데 동양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수, 지, 화, 풍 (水, 地, 火, 風) 입니다. 첫 번째 水는 물입니다. 두 번째 地는 흙입니다. 세 번째 火는 불입니다. 네 번째 風은 공기, 바람 이 네 가지입니다. 제가 영국에 있을 때 그리니치 천문대를 갔었읍니다.  템즈강에서 배를 타고 1시간을 갑니다. 그리니치 천문대에는 자오선이 있죠. 시간을 가르는 것이죠. 한국과 영국은 9시간 차이가 나죠. 그런데 그곳에 커다란 지도가 있어요. 지도가 있는데 지도 위에 水(물), 흙, 그 다음에 불, 그 다음에 공기 이 네 가지 요소를 적어 놓았어요. 水는 미국말로는 Water 해 놓았겠죠. 영어는 Water인데, 흙은 Earth 해 놓았고 불은 Fire 그리고 나머지 하나 공기, 바람은 Air라  써 놓았어요. 큰 세계지도를 그려 놓고 이 네 가지를 적어 놓았어요. 이것이 뭐냐 하면 우주를 이루고 있는 네 가지 요소입니다. 그러면 3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면 4+3 에서 말하는 7성사라 이야기 했는데 7이란 숫자는 완전한 숫자라 합니다. 7성사가 이야기하는 7이란 완전함입니다. 완전함이란 우주 만물을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 4가지 + 삼위일체 하느님,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느님이 만드신 이 우주 만물입니다. 이것을 풀면 이렇습니다. 우주 만물 속에 들어 계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찾아내는 일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사” 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하느님으로 계시한 것. “성사”.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하느님으로, 그리스도.  성사의 중심으로 바로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보이는 하느님으로 드러나는 것. 자 그러면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인데 보나벤뚜라 성인이 하신 말씀 우주 만물은 무엇이냐? 삼위일체 하느님을 읽을 수 있는 커다란 책이다. 성사란 말하고 같죠. 7 이란 숫자와 같죠. 우주 만물 안에서.... 우주 만물이 무엇이냐? 삼위일체 하느님을 읽을 수 있는 커다란 책이다. 그것이 우주 만물입니다. 그런데 4라는 숫자 가지고 고대 철학자가 말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수, 지, 화, 풍.  불과 물과 흙과 바람, 공기가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면 그 결과로 태어나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의 관계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꿈틀거려서 옳게 맞지 않으면 분열이 되는데 그것이 미움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 세상의 모든 우주 만물을 잘 조화시켜서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질서 있고 조화롭게 이끌어 나가면 거기서 드러나는 것이 “사랑” 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드러나는 것이 “미움” 입니다. 결국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커다란 책으로서의 우주 만물.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사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입니다. 우주 만물 가운데서 하느님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느님이 없다 하면 성사 생활을 못하죠. 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안에서 사랑이 증거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하느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무신론입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인간으로,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증거할 때 사랑을 증거해 나갈 때 바로 거기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사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하느님으로  나타내게 하는 일. 그것이 바로 성사이며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 사랑을 통해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느끼게 하는 일.... 그것이 성사생활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마하트마 간디가 한 이야기가 있죠.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한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닮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요나입니다. 저도 요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을 통해서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희망을 가집시다. 계속 말씀드립니다. 절대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오. 신부님이 3개월에 한 번 오던 6개월에 한 번오던, 1년에 한 번 오던지 절망하지 마십시오. 뜻하지 않았을 때 제가 여기 왔어요. 맞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 뜻하지 않은 그 순간에 선물을 주십니다. 요나를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여러분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복을 받습니다. 왜요. 여러분들은 하느님의 궤 입니다. 여러분들은 요나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궤입니다. 오늘 미사를 봉헌하면서 다시 하느님의 궤로서의 모습을 되찾읍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축복을 주십니다. 그 축복을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덧붙여서 더 많이 던져 주실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인간의 유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끝냅니다.

    빅터 프랭클이라는 유명한 유태인 의사가 있습니다. 이 의사는 유태인인데 처자식과 함께 아우슈비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400만이나 되는 유태인들이 죽음을 당합니다. 2차대전중에 그 안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다 죽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살아남습니다. 아우슈비치 수용소안에서 체험했던 것을 정신과 의사였던 그가 글로 쓴 책이 “죽음의 수용소” 입니다. 한국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사람들의 유형을 3가지로 나눕니다.

          첫 번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
          두 번째...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
          세 번째...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 이 세가지로 나눕니다.

   첫 번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이런 유형입니다. 쾌락이란 보통 쓰는 쾌락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짓밟아서라도 다른 사람을 죽여서라도 살아남으려는 사람을 말합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사람을 짓밟아서라도 살아 남으려고 하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을 쾌락형의 인간,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유형,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지상과제로 삼습니다. 돈, 명예, 권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지상과제입니다. 그러나 항상 뭔지 모르지만 채워지지 못한 부분이, 뻥 뚫려져 있는 듯한 느낌을 계속 가집니다. 채워지지 못하는 것,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더라도, 이것이 두 번째 유형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유형은, 의미, 삶에는 무엇인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삶에는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을것같다. 왜 하느님께서 나를 이렇게 세상에 만들어 주셨을까? 무슨 의미가 있을텐데... 내가 살아야 할 의미가 있을텐데. 그 의미를 계속해서 찾아가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빅터프랭클은 결론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짓밟아가면서 까지 살기 위해서 애를 썼던 사람은 결국은 살지 못하고 죽더라. 권력을 갖기 위해서 돈과 명예를 갖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그것을 지상과제로 삼던 사람들이 결국은 그것에 의해 짓눌려서 죽고 말더라. 그러나 의미를 추구했던 사람들은 결국 그 의미를 찾아내고 그 존재이유를 찾아내고 살아남고 곁들여 명예도 얻고, 돈도 가지고, 권력도 가지고 누리고 살더라.

 

  “나뭇꾼과 도끼” 우화에서 금도끼, 은도끼도 아니고 쇠로 만든 그 낡은 도끼이며  솔로몬에서 말한 것, 지혜, 선과 악을 옳고 그른 것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 프란치스꼬 성인이 하신 말씀 (기도) 내마음의 어두움을 밝혀주시고 몰아내 주시고 이안에다 올바른 신앙, 확고한 희망, 완전한 사랑 그리고 지각과 인식을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여러분들의 삶속에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확고한 희망을 가지고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구하지도 않은 것을 덤으로 보너스로 주실 것입니다. 내 건강을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우리 가게가, 우리 집안이, 그게 아니라 내가 ‘올바로 살수 있도록, 옳고 그름을 식별하면서 옳게 살수 있도록, 저에게 올바른 지혜를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정말 나머지 것 까지 덤으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희망, 이런 확고한 믿음, 이런 올바른 신앙으로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래도 살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요나이기 때문에.......... 요나, 나요?

 

글: 민성기(요셉) 신부


    천상의비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