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족보
(마태 1,1-17, 루가 3,23-38)
지금 하는 이야기는 좀 색다를지 모르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 이야기가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처음에 경험이 있었다.’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과 틀리죠.
한 처음에 경험이 있었다. 이 경험은 무슨 경험인가 하면 히브리인들이 에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출애굽하는 경험입니다.
출애굽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Exodus 라고 합니다. 영광의 탈출이란 영화를 보셨습니까? 이 영광의 탈출을 Exodus 라고 합니다. 한 처음에 경험이 있었다. 이 경험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Exodus 입니다. 한국에 흑인 혼혈가수가 있는데 이 가수이름이 인순이입니다. 이 가수가 부른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의 주제가 Exodus 입니다. 출애굽을 이야기합니다. 성서의 첫 번째 이야기는 한 처음에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은 억압과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로부터 해방되었던 경험입니다. 그것을 Exodus 라하고 Exodus의 핵심적인 내용은 출애굽기 15, 1-15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지은 성서가 무엇인가 하면 창세기가 아니고 출애굽기입니다. Exodus를 처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짓습니다. 출애굽기를 짓는데 매년 과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가족들이 다 모이게 되고 가장은, 최고로 높으신 가장은 자기 아들에게, 자기들에게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좋은데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를 억압으로부터, 에집트 종살이에서 구해주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출애굽의 하느님이 우리들을 억압으로부터 구해주신 하느님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가장들이 가족들에게 정성스럽게 하는 말씀이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한 처음에 경험이 있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백성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에집트로부터 탈출을 해서 홍해를 거슬러 광야를 요르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시켜주신 하느님, Exodus의 하느님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 우리 조상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한 것일까? Exodus에서 부터 시작할 것인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를 이끌어 내 온 모세가 있는데 모세 앞에는 어떤 조상이 우리를 에집트로 데리고 왔는가? 따져보니 누구였습니까? 12 아들중의 하나인 요셉이었다. 요셉의 아버지는 누구였을까? 야곱! 야곱의 아버지는 누구였을까? 이사악이었구나. 이사악의 아버지는 누구였을까? 아브라함이었구나.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까지 찾아봅니다. 찾아보니까 여기에서 역사가 끝이 납니다. 그 앞의, 그 이전의 역사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서 부터 시작해서 출애굽하기전 에집트까지의 과정을 역사에서는 성조들의 역사라고 해서 ‘성조사’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는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이전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분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분은 우리를 에집트의 종살이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그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이다. 그 분이 바로 우주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신 야훼 하느님이다. 라고 소급을 해서 찾아낸 하느님을 창세기의 하느님, 창조주 하느님, 야훼 하느님으로 찾아낸 것입니다.
히브리 역사 속에서 제일 먼저 씌어진 책은 출애굽입니다. ‘한 처음에 경험이 있었다.’ 아주 엄청난 일입니다. 경험이 무엇인가 하면 Exodus 이다. 에집트로부터의 해방, 자유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광야에서 40년, 헤매고 헤매서 결국 요르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라면 그 이전에 출애굽하기 이전의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었을까? 보니까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리더라. 그 하느님이 역사를 이루었을 하느님이요. 바로 그분이 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야훼 하느님이다. 이렇게 소급해서 찾아낸 것이 구약의 역사입니다.
그 뒤로 판관기가 나오고 열왕기가 나오고 역사서가 계속 이어져 나갑니다. 이것이 구약의 한 단면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입니다. 무슨 경험인지 아시겠죠. 그 다음에 구약과 같은 대칭을 이루고있는 신약에 있어서의 가장 큰 경험은 무엇인가? 어느 날 12 제자들이 다락방에서부터 용기를 내어 뛰쳐나갑니다. 그리고 나서는 큰 경험을 받은 것을 선포를 했습니다. 그 경험은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선포하러 갑니다. 다락방에서 성령의 강림을 받으면서 제자들은 용감하게 됩니다. 예수가 부활한 엄청난 사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런 겁도 내지 않고 예수 부활사건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다가 승천하셨다. 그리고는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강림. 그리고는 하늘나라에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기 전에 도대체 어디에 계셨을까? 그리스도 부활 이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다. 그분은 수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오기 전에는 어디에 계셨을까?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 갈릴래아 지방에 계셨다. 그 다음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 지방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더라.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를 받고 난 후에 어디에 갔다더라. 바로 갈릴래아로 갔는가? 아니더라. 세례 받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가신곳은 40일 동안 광야에 가셨다더라. 그러면 세례 받기 전에는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했는가? 그 흔적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태어나기를 어디에서 태어나셨습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더라. 베들레헴에.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고 엄마가 마리아 였다더라.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일 처음에 일어난 사건은 예수부활 사건이었습니다. 엄청나게 큰 부활사건을 체험하면서 제자들이 뛰쳐나가서 예수부활에 대한 것을 선포합니다. 복음사가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리스도의 행적을 추적해 들어갑니다. 소급을 해서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꾸로. 부활하시기 이전에는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셨다. 예루살렘에 오시기 전에는 바로 갈릴래아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갈릴래아 지방에서 선포하기 전에는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처럼 살았다. 광야에서 살기 전에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이전의 기록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더라. 그의 아버지는 요셉이었고 어머니는 마리아였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구약의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요, 신약의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구약의 전체 핵심은 ‘경험’. Exodus ‘한 처음에 경험이 있었다.’ 이 경험의 대표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부활 체험을 제자들이 선포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대한 사건을 토대로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리스도가 누구였다더라. 뿌리를 찾아보니 베들레헴에서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더라. 이 둘은 수평선을 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경험은 Exodus 였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 천국이다. 가나안이다. 이것이 우리 복음서 신, 구약 전체에 대한 요약입니다. 이것이 오늘 공부하게 될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한마디로 펼치면 이렇게 나오는데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이 부활을 듣고 부활을 겪게 되었고 부활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부활 사건 이전의 그리스도를 추적했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의 일생입니다. 처음에 창세기가 씌여진 것이 아니고 ‘한 처음에 경험이 있었다.’ 이것을 대대로 가장들이 후손들에게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어떤 하느님인가 하면 출애굽의 하느님이다. 그러다가 출애굽의 하느님을 알게 되고 나서 그러면 그 이전의 하느님은 어떤 분일까? 바로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그 하느님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구약의 역사요, 신약의 역사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니 너무 쉽죠.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창세기 12장이 시작되는데 12장 1절에 아브라함이 불리움을 받습니다. 여기에 와서 역사라 하고 그 이전의 이 역사를 태고사라고 했어요. 이 역사를 태고사라기보다 그렇게 하지 말고 창조역사다 해서 창조사라 부르자고 지금 이렇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창조사 입니다.
첫 번째로 창세기 1장 1절에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로 시작되는 역사가 이렇게 이어져 내려오고 신약의 역사가 이렇게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을 같은 형상에서 볼 수가 있고 따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볼 수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구약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는 듯합니다.
유명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가 있는데 안토니오 성인은 그리스도의 인생을 4가지로 나눴습니다. 4 계절로 나누는데 이것을 어떻게 나누었는가 하면 겨울로부터 시작해서 가을로 분리됩니다. 그리스도 역사의 겨울은 무엇인가?
엄동설한에 태어나셔서 헤데로의 박해를 피해서 에집트로 피신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땅에서 남의 나라 땅에로 망명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겨울입니다. 그러면 봄은 무엇일까? 봄이 되면 농부들이 곡식을 가꾸기 위해서 씨를 뿌립니다. 씨는 무엇인가 하면 하느님의 말씀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하느님 백성들에게 즉 땅에 씨를 뿌립니다.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복음 선포의 시절이 봄입니다. 여름은 무엇인가? L.A. 나 시카고 등지에서 너무 더워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여름은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난 다음에 이제 예루살렘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수난 받고 돌아가시는 것이 여름입니다. 혹독한 여름입니다.
봄에 뿌린 씨앗이 가을이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면서 지금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는 지금의 계절이 가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계절로 본 인생입니다. 또한 우리의 생애와 똑같습니다. 세례를 받기전 겨울의 혹독한 시련을 겪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서부터는 그리스도처럼 복음을 선포하는 씨앗을 뿌리는 봄을 맞습니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서 박해를 받기도 하고 결국 죽음 까지 겪게되는 여름시기를 겪습니다. 그런 연후에 지상에서 뿐 아니라 부활한 그들에게 채워지는 선물로서 하늘나라의 삶을 삽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용과 같은 내용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땅과 하늘이 연결되는 것을 보여주시게 되고 아름다운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되고, 열매와 꽃이 많이 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계절로 본 사계절입니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많이 들었죠. 중요한 것은 광야부분입니다. 지난번에 공부했죠. 이 부분은 홍해를 건너서 광야를 거쳐 마지막에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르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과정을 우리가 보면서 구약과 신약의 핵은 무엇인가? 구약에서의 핵은 경험, 큰 경험, Exodus 의 경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 두 가지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신앙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앙핵심은 부활입니다. 성탄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입니다. 부활 없이는 우리들의 승리도 없습니다. 우리가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족보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 1,1 -17 봉독)
첫 번째 물음입니다. 14대, 14대, 14대, 42 대가 됩니다. 42대이면 우리들이 One 세대 (one generation)를 몇 년으로 칩니까? 보통 One generation을 25년으로 칩니다. 42대라고 했는데 한 번 봅시다. 25 x 42 = 1,050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가 1,050년밖에 안됩니다. 그것밖에 안되겠습니까? 이것이 42대입니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족보에 나오는 족보의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밖에 안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2,000 년이라고 했는데 틀리죠. 족보는 사실상 숫자로 따져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 안에 빠진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죠. 그러면 지금부터 헤아려 봅시다. 처음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14대라고 했습니다. 14대가 맞는지 안 맞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아브라함 ~ 다윗 14대입니다. 그 다음에도 한 번 봅시다. 솔로몬 ~ 여고니야 .... 까지가 14대 맞습니다. 그 다음에 스알엘 ~ 예수님까지 13대입니다. 우리가 잘못 헤아렸습니까? 같이 헤아려보니 아브라함 ~ 다윗까지가 14대 맞고요. 솔로몬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 까지가 14대 맞습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까지가 13대가 됩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은 한 명을 잘못 썼다, 빠트렸다. 라고 하는데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맞다고 하지 않는데 예수님이 13대에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가 더 들어가야만 이 14대가 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알파로서 14대에 들어간다. 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이 사람들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바로 이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헤아려 보십시오. 13대밖에 안 나옵니다. 처음에 14대 그 다음에 14대 그리고 예수님으로 13대가 끝이 나는데 지금 이 세상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 순례를 하고 있다. 순례하는 과정에 있어서 예수님은 날아가고 없어요. 그러면 누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른다. 이 사람들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의 평화와 모든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고 이 사람들이 13대에서 더하기 한 알파인 14대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풀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족보의 숫자를 확인해서 하나가 안 나오니까 아마 하나를 빠뜨렸을 것이다. 빠뜨린 것은 앞의 내용에서 빠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다음에 올 사람들을 가리킨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14대로 보고 그 사람들을 보고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런 이론도 있습니다. 그럴듯하고 기분 좋은 말입니다.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나쁜 것은 아니니까 우리 그렇게 이해하도록 합시다.
아 그런 것이 있구나. 예수님에서 13대가 끝나는데 14대는 왜 빠졌을까? 그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들의 역할이 있구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거기에 있구나 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결론은 새로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있어서 14번째 역할을 하는 것이 위의 의견 이였습니다.
예수의 족보 (루가 3, 23 - 38 봉독)
지금까지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이 어떻습니까? 거꾸로죠? 맞습니까?
우리들이 마태오 복음에서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제일 처음엔 아브라함부터 시작했죠. 그래서 죽 내려왔는데 바빌론 유배도 나오고 다윗도 나왔죠. 그 다음 맨 마지막에 누가 나옵니까? 예수님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루가 복음에서는 누구부터 시작했습니까? 예수님부터 시작했죠. 그리고 올라가서는 아브라함을 거쳐서 셈을 거쳐서 노아를 거쳐서 마지막에 누구한테 갑니까? 하느님께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 결국은 하느님. 마태오 복음의 족보는 위에서부터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루가 복음에서는 다시 예수님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이르렀습니다. 족보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마태오 복음과 루가복음을 같이 보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에서 다시 우리를 하느님께로 끌고 올라갑니다. 마태오와 루가의 예수님 족보 이야기의 핵심은 그리스도이시지만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인간의 영적인 성숙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분들이 다 성인입니다. 이런 삶을 살지 않으면 성인이 안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살았던 성인들의 삶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이 하느님께로 이른 여행, 여정을 살았던 삶들을 교회에서는 성인들의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과정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였고 내려와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서 따라 올라갑니다. 모방해서 하느님께로 올라갑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과정이요, 이것을 하느님께로 이르는 여행, 여정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가졌는지를 보기 전에 지난번에 약속한 것처럼 민수기 33장을 보도록 합시다. 민수기 33장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에집트에서 모압에 이른 경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시작해서 에집트를 출발하고 가나안 땅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출애굽이라는 인간이 살고있는 한계 그 종살이로 살다가 해방을 맞고 광야생활을 거치고 난 다음에 요르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이르는 긴 여행을 민수기 33장에서 이야기하고 있고 여기나오는 지명들은 다 나름대로의 뜻이 있습니다.
오리게네스라는 서기 100년대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민수기 33장에 있는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에서 시작해서 가나안 땅에 이르는 여정 즉 지상 삶에서 영원의 삶으로 이어 가는 이 긴 여정을 오리게네스는 민수기 33장과 마태오 복음 1장 1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을 비교하여 우리에게 비유로 알려주셨습니다. 지금부터 아주 오래 전 1,800여년전에. 여기에 오리게네스 신학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여정입니다. 오리게네스가 설명하고 그렸던 것이 바로 민수기 33장입니다. 이 33장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부터 시작해서 가나안 땅까지 이르는 긴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 여정에 나오는 각지명을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이름들과 비슷하게 맞추어 놓았습니다. 이름들이 비슷비슷합니다. 그 안의 이름들은 다 뜻이 있습니다. 뜻을 찾아가 보니 결국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하느님께로 가는 영혼의 긴 여정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루가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 이 두 개를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여행을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이 두 개를 한 맥락에서 보고있는 것입니다.. 그 한 가운데 계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부르시고 맨 마지막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람의 아들 그리고 하늘과 땅에 무엇이 연결된다고 했습니까? 계단이 이어지고 이 계단으로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미사강론때 말씀드렸습니다. 이 과정은 민수기 33장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오리게네스라는 신학자가 이 과정을 찾아내었고 그 과정을 우리는 오리게네스의 도움을 받아서 마태오 복음 족보 역사와 루가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여서 우리 삶을, 영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공부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공부하는 삶을 언제 우리가 보는가 하면 다섯 번째 시간 때 할 가나 혼인잔치때 이 과정을 다시 한 번 들춰내서 설명해 드립니다. 가나혼인잔치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늘나라에 까지 가면서 마지막에 일치되는 잔치가 가나혼인잔치로 영적 완성에 이르는 잔치가 가나 혼인 잔치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포도주입니다. 그에 대한 말씀을 다섯 번째 마지막 시간에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성서공부와는 차원이 좀 다르겠죠. 우리는 관심을 어디에 기울이는가 하면 삶을 살아가면서, 영적인 성숙을 해 나가면서 하느님께로 이르는 이 과정에 대해서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체험해야 됩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경험 그리고 그리스도를, 역사를 소급해서 드러냈던 히브리 역사를 가나안으로 가는 긴 여정,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 여정은 똑같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보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했던 그 이전과 그 이후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이런 모습, 이 모습과 똑같은 뜻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민수기 33장, 에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백성들이 결국은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긴 여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제일 마지막에 나오고 루가 복음에는 첫 번째 나오는 그리스도 중심.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에게 그리스도가 내려오신 강생의 신비입니다. 강생의 신비요, 그리고 우리는 올라가는 영적 성숙의 여행, 그래서 우리가 부르심에 응답할 때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없으면 일이 안됩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가 있어야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리스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부활’ 그 다음에 찾아낸 것이 수난과 죽음, 광야생활등이 나올 것입니다. 구약의 전체적인 핵심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구약에서는 ‘경험’ 무슨 경험입니까? Exodus, 출애굽의 경험. 그 경험은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죠. 그 경험을 중심에 두고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해서 찾아낸 것이 창세기까지 찾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이후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과 똑같습니다. 그러면 다시 넘어와서 마태오 복음 1장을 봅시다. 루가 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마태오 복음에는 있는데 그것은 마태오 복음에는 5명의 여인이 나타납니다. 마태오 복음 1장에 첫 번째 어떤 여인이 나타납니까? 유다는 누구에게서 베레스와 제라를 낳습니까? 다말입니다. 두 번째는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았다. 라합니다. 세 번째는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룻은 세 번째 여인입니다. 그 다음에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우리야의 아내는 누구입니까? 바쎄바입니다. 제일 마지막에는 성모님이 나옵니다. 마리아에게서는 예수가 나셨다. 5명의 여인이 나옵니다. 첫 번째 창세기 38장에 라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여호수아 2장에 라합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리아가 나옵니다.
다말이라는 여인은 어떤 여인인가? 창세기 38장을 봅시다. 다말의 남편은 죽었는데 다말이 낳은 베레스와 제라는 유다의 아들이죠. 그래서 족보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족보에 나오는 우리 선조들의 이름입니다. 유다는 무슨 짓을 하다가 그렇게 되는지 알겠죠. 그래서 다말이 왜 족보에 나왔는지 아시겠죠. 그 다음 두 번째 여인 라합, 여호수아 2장을 봅시다. 라합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창녀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직업이 창녀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룻에 대해서 봅시다. 룻기는 긴데 룻의 시어머니는 나오미인데, 시어머니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다 죽죠. 그래서 다른 며느리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룻만은 이곳에 시집왔기 때문에 끝없이 살아야 된다고 떠나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보기에 며느리가 너무 착하죠. 그래서 보아즈와 결혼을 시킵니다. 보아즈의 아들인 오벳은 다윗 왕의 할아버지입니다. 그 다음에 바쎄바 2사무 11. 12 장에 보면 다윗왕은 어느 날 궁궐을 산책하다가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가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여자를 왕후로 삼아야 되겠다고 했는데 그 여자는 장수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술책을 써서 우리야를 전쟁터에 나가 죽게 합니다. 그리고는 바쎄바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이야기가 사무엘 후서에 나오는데 바세바가 다윗에게서 아들을 나았는데 그 아들은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두 번째 낳은 아들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이것이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예언자 나단으로부터 엄청나게 얻어 터집니다. 얻어터지는 내용 중에 한 파트를 봅시다. (2사무 12장 1절-7절 봉독) 바쎄바는 우리야의 한 아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수없이 많은 궁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남의 아내를 탐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바로 바쎄바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보면 다윗은 성인이죠.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다윗은 어떠합니까? 그래도 다윗은 우리 조상입니다. 맨 마지막에 성모님이 나옵니다. 그러면 족보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읍시다.
족보에 나오는 인물 중에는 다윗과 같은 왕들이 있습니다. 유명한 왕들이 있습니다. 족보에 나오는 인물 중에는 창녀를 비롯해서 많은 여자가 나옵니다. 족보에는 착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족보에 나오는 다섯명 여인들을 볼 때 첫 번째 여인 다말은 창녀 짓을 합니다. 두 번째 라합은 직업이 창녀입니다. 세 번째 룻은 과부입니다. 네 번째 나오는 바쎄바는 착한 여자이지만 다른 남자와 간통을 합니다. 자 이렇게 죄인들입니다. 두 번째로 보면 라합과 룻은 이방인입니다. 이스라엘 족보에 다섯 명의 여인이 나오는데 이중 두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마태 8,5-13 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를 보고 마지막 정리를 하겠습니다.
(마태 8,5-13 봉독)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 잔치에 참석하겠으나” 이 말씀은 많은 이방인들이 몰려와서 들어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라합과 룻은 이방인들의 대표입니다. 그래서 족보에 나왔습니다. 지난 시간 요나서를 공부하면서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말씀드렸죠.
그 다음에 다말은 어떠한 여인이었습니까? 공손한 여인이었는데 이스라엘 풍습에서 큰아들이 죽으면 그 아내를 둘째아들이 아내로 맞습니다. 그러다 둘째아들이 죽으면 셋째아들이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풍습 때문에 다말은 둘째의 아내가 되었는데 둘째도 죽었죠. 셋째아들은 어려서 나중에 크면 결혼해라 했는데 결혼 안 시키죠. 다말은 왜 법대로 하지 않느냐 하면서 속임수를 사용합니다. 시아버지 유다를 꼬셔서 아들을 낳아 족보에 올라갑니다.
라합은 히브리의 하느님께 신앙고백을 합니다. 창녀가 정찰병들을 구해주고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우리야는 자기임무에 충실했으면 백성들에게도 충실했습니다. 왕궁에서도.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합니다. 우리야가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보여줍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충고에 따라서 말씀에 따라 보아즈의 자식을 낳습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여인들은 어떻게 해서 족보에 나올 수 있는 영광을 가졌는가? 여인들은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따르지 않습니다. 울타리가 쳐진 룰을 벗어난 행동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계시. 하느님께서 펼쳐나가시는 역사에 순응합니다. 결국 이 여인들이 그리스도를 낳게 하는 우리들의 할머니입니다. 이 여인들 중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과부가 된 사람도 있고 창녀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결혼이라는 것만이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혼이 구원에 필요하고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결혼이 모든 것의 필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결혼을 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여인들을 볼 때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습니다.
족보에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왕도 있고 창녀를 꼬여서 자식을 낳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의 아내를 꼬여서 그 남편을 죽여서까지 차지하는 인물도 나옵니다. 착한 사람도 나오지만 악한 사람도 나옵니다. 착한 여인이 있는가 하면 창녀도 있고.. 이것이 우리의 족보입니다. 그 족보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그러면 결국 나의 삶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낳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모습을 보면 내 모습 속에는 고귀한 부분이 있습니다. 내 모습 속에는 창녀와 같은 부분도 있습니다. 내 모습 속에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내 모습 속에는 고귀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속되고 상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를 낳아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을 보면 좋은 사람밖에 안 나와요. 좋은 사람밖에 안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행적대로 다 안 나와요. 시집가면 다 빼놓았어요. 따져보면 성서에서처럼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쁜 짓을 많이 했을 거예요. 그런데 요나서에서 처럼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족보를 가지고 있지만 나를 향해서, 우리 선조 가운데서, 누군가가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이 못살았다해도 우리 선조들 가운데 창녀가 있다해도 바로 그 할머니들이 낳은 자식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이 나오는 것입니다. 족보이야기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이 재미없는 족보이야기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족보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비참한 사람들의 모습을 이야기 해 준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태어난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태어나고 우리는 마태오 복음에서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했고 그리스도가 태어난 것에 의해서 우리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긴 여행을 되새겨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족보의 시작이요, 족보의 끝입니다. 다음에는 족보이야기를 미사 중에 들을 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이끌어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족보이야기를 드리면서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에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글: 민성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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