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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들어가면서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서에 없다. 성서에는 하느님 아버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함께 언급하는 구절들은 있다.


“그대들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보내실 협조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요한 14,26).


“내가 아버지로부터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이 나에 관해 증언 하실 것입니다.”(요한 15,26).


그러나 성서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모른다. 삼위를 언급하는 성서의 구절들이 모두 우리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인식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밝히 말하는 언어가 아니다. 하느님에 대해 논하는 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우리의 구원이 모두 하느님의 일임을 방어하기 위한 삼위일체라는 단어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사실과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 신앙인들 안에 일어나는 변화가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긍정하기 위한 단어이다.


1. 삼위일체 교리의 발생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 안에 우리가 발견하는 생명이 참으로 하느님의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참으로 하느님 생명의 숨결이라는 사실을 긍정하기 위해 발생하였다. 니체아공의회(325년)에 모인 교부들은 하느님은 창조주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Arius)를 반박하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적(實體的)으로 동일하다1)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참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시대의 사상으로는 하느님과 예수가 같은 하느님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예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2)


콘스탄티노풀공의회(381년)에 모인 교부들은 성령도 ‘주님이시며...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신다.’고 결의한다. 성령은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거슬려 공의회가 채택한 것이다. 그 시대의 사고로 성령도 하느님이 아니면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발생하는 삶이 하느님과 무관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서열이 낮은 것은 그 위의 서열인 존재와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되는 시대였다. 따라서 예수와 성령을 한 분이신 하느님의 서열에 올려놓지 않으면, 예수와 성령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변화는 하느님과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일 수 없고,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일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철학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위(位)로는 세 분이시고 본체(本體)로서는 하나이시며, 먼저 계심도 후에 계심도 없고, 높고 낮음도 없으시며 세 분이 온전히 같다.’라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과거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4세기에 필요하여서 발생한 삼위일체 교리이고, 그 교리를 발생시킨 이설(異說)이 없는 오늘이기에, 우리가 그 교리를 오늘 반복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


시대가 흐르면서 계속되는 논쟁에 대처하고 깊이 있는 신앙의 인식을 위해 하느님의 삼위(三位)적 형상에 대한 표현들은 점점 더 추상화되고 결국 전문가들만을 위한 지식이 되고 말았다. 세 분에 대한 언어가 추상화되면서 삼위에 대한 사고는 하느님 안에 내재(內在)하는 생명에 대한 추리로 발전하였다.


하느님에 대한 신학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단순한 성서의 언어 대신에 산출(産出), 출생(出生), 진출(進出), 관계(關係), 실체, 개념, 순서 등 인간의 신앙 실천과 관련 없는 언어로 건너가 버렸다.3) 이런 추상화는 그 시대 잘못된 이론들 앞에는 필요한 것이었지만, 오늘의 신앙인을 위해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만든다. 따라서 과거 철학에 익숙하지 못한 현대인들에게, 삼위일체에 대한 과거의 전통적 교리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2.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형상(形象)의 상징성(象徵性)


2. 1. 상징성


그리스도인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세 개의 형상을 사용하여 하느님을 고백한다. 이 형상들은 상징성을 지닌다. 상징은 그것이 통용되는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다.4)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 하나의 세계가 열린다. 인간 생명의 기원이신 하느님, 무상으로 우리의 생명을 주신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원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세계가 열린다. 그 상징성 안에서 우리는 성숙한 하느님의 자녀로 산다. 자녀는 아버지로부터 배워서 같은 실천을 하면서 사람으로 산다. 그러나 가상적으로 아버지 하느님에게 접근하면 하느님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인간의 자세가 나타난다. 기복(祈福)적 신앙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가상적 접근에서 나타난다.


성령을 하느님의 숨결이라고 말할 때, 그 상징성을 살리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이 그 실천의 생명과 숨결로 살아 계시다는 말이다. 예수 안에 하느님 자녀의 삶을 발견하고 그 삶을 우리가 실천할 때 하느님 생명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가상적으로 접근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위상(位相)이나 능력이 격상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을 빌리면 자기 자신을 ‘세우는’(1고린 14,4)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 발생 초기부터 예수가 가르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 삶을 배워 실천할 때 ‘성령이 우리 안에 일하신다.’고 믿었다. 원시교회는 성령이 신앙인들 안에 일하신다는 사실을 강하게 믿었다. 초기 교회는 예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산다고 믿던 시대이다. 루가복음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명이 나서 말씀하셨다...‘아버지께서 제게 모든 것을 넘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아들이 누구인지, 또 아들과 아들이 계시해 주려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알지 못합니다.’”(10,21-22). 성령이 예수 안에 일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초기 신앙인들이 기록한 말씀이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배우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예수로 말미암아 하느님 생명의 숨결이신 성령이 그들 안에 살아계신다고 믿었다.


2. 2. 상징성을 잃은 철학적 언어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형상들은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에 계속 작용한다. 4세기 신학 논쟁에서 플라톤에서 유래한 철학적 사고가 원인인 이설(異說) 앞에 교부들은 같은 철학적 언어로 답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 시대 이후 철학적 언어가 신학의 유일한 언어로 통용되면서 하느님을 철학적 사고로 합리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으로 삼위적 형상들이 지닌 모호함은 사라졌지만, 그 형상들의 성서적 기반과 그 상징성이 동시에 사라졌다.


그 시대에 ‘로고스’라는 개념이 ‘아들’이라는 형상을 추방했다. 신학자들은 이 개념으로 하느님에 대한 이론을 구축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아들이라는 형상이 지닌 상징성을 외면하여, 아들이라는 형상의 의미를 약화시켜버렸다. 이 철학적 이론화는 삼위일체 신학을 인간 삶을 움직이지 못하는, 창백한 이론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한 과거 전통적 신학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것은 삼위일체의 가치를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문화 안에서 그 형상들이 지닌 상징성을 살리려는 것이다.


3. 아버지와 아들


3. 1. ‘아버지’ 형상이 지닌 문제점


삼위일체를 말할 때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형상이다. 이 형상이 지닌 인간 정서적 기능을 평가하지 않으면 환상으로 빠질 위험이 다분히 있다. 현대 정신분석학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람을 아들로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 형상을 심히 비판한다. 인간 욕구 충족을 위한 투사(投射)로서의 ‘아버지와 아들’ 형상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자녀가 어렸을 때 받았던 아버지의 보호에 대한 욕구가 잠재의식 안에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에서 언급되는 ‘아버지’는 인간 욕구를 투사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는 미성숙한 아들의 부족, 연약함, 죽음 등 아들 앞에 닥친 장애와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환상적 존재로서의 아버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3. 2. 아버지의 베푸심을 실천하는 아들


인간은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스스로를 완성시키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앞에 주어진 어려움을 극복하는 각고(刻苦)의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성취한다. 그 각고는 때때로 죽음과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이 어느 수준의 자율성에 도달하는 것은 결별을 겪고 상처 받는 과정을 거쳐서 되는 일이다. 어머니의 품속과 결별하고, 부모의 사랑을 다른 형제자매들과 공유해야 하는 상처를 입고, 포기의 과정을 체험하고,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전능함에 대한 환상을 버리면서, 인간은 어느 수준의 자율성에 도달한다. 타인은 지나친 나의 욕구를 버리도록 강요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타인은 상처로 다가온다.


자기 생명을 잃을 것에 동의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생명을 얻는 사람이다. 십자가에 임하는 예수의 자세에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은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미봉책(彌縫策)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녀는 아버지가 준 생명을 산다. 아버지는 베푸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자녀도 형제들에게 베풀고 나누면서 아버지의 생명을 제대로 산다고 말하겠다. 아들이 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생명을 살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탈란트의 비유(마태 25,14-30)에서 말한다. 다섯 탈란트와 두 탈란트를 받은 사람은 각각 그것을 베풀어서 활용하였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받은 것을 간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탈란트를 받은 사람은 자기의 미래를 위해 안전하게 보존하려고 땅을 파고 그것을 묻었다. 그것은 탈란트를 베푸신 분의 생명을 사는 길이 아니었다.5)


3. 3. 아버지 행세를 하지 않는 아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를 보여 주는 분이다.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14,9). 그러나 예수는 자기 스스로 아버지 행세를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뜻이 소중하였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아들이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입을 빌려 성령을 “다른 협조자”(14,16)라고 말한다. 예수도 성령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게 하는 협조자라는 말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섬기는 자”(마르 10,45)였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사람들 앞에 스스로를 높이거나 하느님을 후광으로 삼아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스스로를 사람들 앞에 높이는 호칭이나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 보게 하는 복장을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인간의 자세가 아니다. 섬기는 사람은 아버지 행세를 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 살아 있는 순종이라는 단어는 흔히 아버지 자리를 찬탈하여 스스로 아버지 행세를 하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다. ‘랍비’, ‘아버지’, ‘스승’이라는 호칭도 쓰지 말라고 마태오복음서(23,8-10)는 말한다.


4. 성령


4. 1. 아버지의 생명을 확산시키는 성령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회로(回路)를 숨결 또는 영(靈)이라는 형상으로 깨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을 확산한다. 성서가 사용하는 영이라는 단어는 바람 혹은 숨결을 의미한다. 신약성서는 하느님의 뜻에 인간 욕구를 개방하는 것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기중심의 가상(假想)적 자세를 버리고 하느님의 베푸심을 실천하는 상징적 구조로 이동할 때, 성령이 일하신다는 뜻이다. “그대들이 악해도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진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루가 11,13). 신약성서는 성령을 힘, 자유, 사랑 혹은 친교라고 말한다.


4. 2. 차이를 만들어 친교를 이루는 성령


바울로는 신령한 언어에 심취한 고린토교회의 사람들에게 만일 그 모임에 그 언어를 해석하거나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이상한 언어로 말하지 말라고 충고한다(1고린 14,1-20).6) “예언하는 이는 세우고 타이르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이는 자신을 세우지만 예언하는 이는 교회를 세웁니다.”(14,3-4). “집회에서는 신령한 언어로 만 마디 말을 하느니 다섯 마디라도 내 정신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14,19). “신령한 언어는 믿는 이들을 위한 표징이 아니라 안 믿는 이들을 위한 표징입니다.”(14,22).


성령을 기원으로 한 말은 친교를 이룬다. 성령은 인간이 자기 안에 폐쇄되고 배타적이 되게 하지 않는다. 인간은 서로 다르다. 그래서 인간 상호간에는 의사소통의 풍요로움이 있다. 서로의 차이가 없으면 의사소통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모두 같은 키를 가졌다고 상상해 보자. ‘키가 크다’ 혹은 ‘키가 작다’는 메시지는 발생하지 않는다. 성령은 의사소통의 근거가 되는 차이들을 만들고 그 차이를 풍요로움으로 보게 하면서 사랑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4. 3. 실재(實在)를 보게 하시는 성령


성령은 또한 기쁨의 원천이시다. 아버지에 대해 가상적 인식에 머무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이 소중하기에 세상과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사람에게 세상과 이웃은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가상적 욕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은 계속 불만하고 낙담하면서 산다. 성령은 타인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 상징성 안에서 보게 해 주기에 기쁨의 원천이다. 성령은 세상과 타인을 그 차이와 아름다움 안에, 그 한계와 불행을 지니고 우리 앞에 자유롭게 있도록 하신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실재를 보게 하신다.


4. 4. 자녀의 자세를 갖게 하는 성령


예수는 예언자적 사명을 받아들여 하느님에 대해 말하며 투쟁하였지만, 죽음에 이르기까지 반대를 당한 아들이었다. 예수는 그런 현실을 거부하지도 않았고, 자기가 한 선택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기적으로 구해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바울로가 채집한 초기교회의 노래는 예수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하나의 노획물로 삼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버지 앞에 가상적 자세를 갖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노획물로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 여느 사람처럼 드러나셨도다.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까지,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셨도다.”(필립 2,6-8).


예수는 자기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아버지를 받아들였다. 예수는 자기의 욕구가 지닌 논리를 아버지에게 강요하지 않고, 자기 존재가 내포한 연약함과 죽음까지도 수용하였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내가 말한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요한 14,26) 협조자 성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자녀 된 자세를 갖게 하신다.


나오면서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고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라는 세 개의 형상이 있으면서 그 형상들에 대한 합리성의 추구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발생시켰다. 따라서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사실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세 분으로 거명되지만, 아버지이신 하느님이고, 그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보여 주신 예수님이며,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이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그분은 그냥 계시는 분이 아니라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베푸는 분으로 계신다는 말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그분의 생명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완전하심은 하느님이 자기도취적이거나 자족(自足)적 성격의 소유자라는 말이 아니다. 성령이라는 형상은 하느님이 당신 자신과 다른 것과도 친교 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성령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성령은 하느님이 당신 피조물인 타(他)를 향해 하시는 탈아(脫我 extasis)를 지칭하는 형상이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고(루가 1,35), 세례에서 성령을 받으시고(3,22), 성령으로 가득 차서 공생활을 시작하는 것(4,1)은 예수 안에 하느님이 충만히 현존하셨다는 사실을 말한다.


삼위적 상징 구조는 하느님이 개방이고, 의사전달이며, 생명과 나눔의 원천이라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은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신 스스로 친교이기에 당신과 상이한 것들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창조, 강생, 성령강림 등, 하느님이 우리 역사 안에 하신 일들은 하느님이 어떤 베푸심이고 어떤 사랑이신지를 말한다. 하느님은 친교 안에서 다른 것이 되어주는 생명이다. 하느님은 당신과 다른 피조물들을 창조하고 그것들 안에 계신다. 그 현상을 우리는 성령이라 부른다.


삼위일체를 믿는 교회라면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 섬기는 자녀로 살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아듣고 그 자녀 되는 길을 배우며, 그 자녀의 실천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존중하며 신앙인들 안에 자녀의 다양한 삶이 발생하게 도울 것이다. ◆

 

- 서공석 신부 - 

 

1) 그 시대 지성인들은 플라톤 사상으로 사고하였다. 그 사상에 의하면 실체는 우연(偶然)에 대립되는 순수 인식의 원리이다. 우연은 그 사물의 질, 형태, 양, 장소, 시간, 능동, 수동 등을 의미한다.

 

2) 그 시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 플라톤의 철학을 가르치던 플로티누스(Plotinus, 203-270)는 중기 플라톤 철학자로서 유출(emanatio)에 의한 창조를 가르쳤다. 순수 정신인 제일자(第一者)에서 모든 사물이 유출(流出)되었다는 것이다. 그 설에 의하면 유출은 곧 격하(格下)를 의미한다. 따라서 유출된 것은 유출하는 존재를 반영하지 못한다. 하느님에서 유출된 아들인 예수는 하느님을 반영 하지 못한다. 따라서 아버지 다르고 아들 다르다는 아리우스의 이 설(異說)이 발생한다. 

 

3)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제1편 94-105 참조.

   윤형중, 「상해 천주교 요리」(상), 가톨릭출판사 1990, 80-94 참조.

 

4) 상징성을 살린다는 것은 상징이 열어주는 세계에 들어가서 그 세계가 가진 질서를 살려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 때 주고받은 반지는 상징성을 지닌다. 그 반지를 보면 그 반지를 교환하면서 약속한 결혼이라는 세계가 열린다. 그러나 그 상징이 열어주는 세계를 보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그것을 우리는 가상적(假想的) 접근이라 부른다. 결혼반지의 예에서 그 반지가 상기시키는 약속을 생각하지 않고 그 반지의 금전적 가치만 생각하는 접근을 의미한다. 상징성을 살리면 주인공은 수고를 하지만 그 상징이 열어주는 풍요로운 세상에서 살고 가상성만 살리면 주인공은 수고를 하지 않지만 인간 삶의 고귀한 부분을 잃는다.  

 

5) 마태오복음 25장이 ‘탈란트의 비유’ 다음에 계속하여 ‘최후심판의 비유’를 이야기 하는 저의를 알아들어야 한다.

 

6) 심령기도를 하는 성령운동은 1920년대에 미국 개신교 일각에서 발생한 신심행위이다. 사도행전(2,4-11)에 성령이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자기들 언어로 말을 하고 듣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 고장의 언어로 알아들었다는 것은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지 그것은 심령기도를 말하지 않는다.

출처 : 천상의 비밀
글쓴이 : J_카타리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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