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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대의 교회당(편의상 교회로 통칭)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힐 정도입니다. 

서로, 문제는 있다고 제기하면서도 개선할 의지가 거의 없습니다. 

남들은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나는 상관없다는 의식만 있습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요... 

 

이 글을 쓰는 제가 

교회에 대하여 뭐라고 할 처지도 권리도 없지만 

교회를 지켜보는 자로서 힘든 마음에 대략 옮겨보고자 합니다. 

현대 교회는 그리스도는 없고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획은 없고, 사람이 계획한 것만 넘쳐납니다. 

입술로는 '주여주여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다' 외치지만 도무지 

그리스도의 열매를 찾아보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 된 교회로서 그분의 열매보다는... 

사람이 만든 열매만이 분주하게 넘쳐납니다. 

성공하는 교회, 앞서가는 교회, 교인들이 수가 넘쳐나는 교회, 

무슨 행사에만 주력하는 교회, 뭘 열심히 해야 하는 교회... 

작은 교회는 소규모에서 벗어나야 한다 역설하며 

큰 교회는 더 커져야 한다 하며, 전도 마케팅(?)에 올인합니다. 

예수님의 이름만 앞세울 뿐 예수님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교인들은 큰 교회에 다녀야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큰 교회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더 많이 나타나는 줄 오해합니다. 

교인들은 교회를 통해 성공의 길을 꿈꾸고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과 교제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사업가는 비지니스와 

판로를 확보할 수 있는 그런 교회를 선호하고 의지합니다. 

세일즈 교인은, 교인들을 자신의 잠재적 고객으로 인식합니다. 

이런 교회들은... 

예수님의 간판만을 달고 운영되는 친목 단체일 뿐입니다. 

성령의 열매(거듭남) 없이, 나뭇잎(교인 수)만 무성한 공회입니다. 

그나마 이런 경우는 외적으로 들어나는 표면적 문제일 뿐... 

진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영적 문제입니다.  

 

교회 예배 자체에만 중요시한 나머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갖춰야 할 사랑이 식은지 오래되었습니다. 

믿는 자의 기본은, 사랑임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강대상에서는 서로 사랑하라 힘주어 외치지만... 

예배당을 넘지 못하고 그 안에서만 쩌렁쩌렁 메아리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 형제를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호만 난무할 뿐, 이웃 형제 사랑은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즉, 이는 주님을 사랑함도 가짜라는 증거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한1서 4장 20절)

 

실 예로, 이번 코로나로 인해 그 열매가 보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예배는 생명이라 주장하며 목숨을 걸고 사수하자 

외칩니다. 

얼핏 보면, 믿음이 매우 좋고 사명감에 불타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 보입니다. 

내 이웃의 피해에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주장합니다. 

교인들이 코로나에 전염된다면, 교인들에만 그치지 않고 

그 교인의 샐활 범위에 들어오는 이웃 형제의 생명도 위험합니다. 

이것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내 이웃 형제가 코로나에 걸리든 말든 안중에도 없습니다. 

만약 내 이웃 형제가 나로 인해 코로나에 걸려 

생명이라도 잃으면, 과연 어떤 영적 상황이 벌어지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이웃은 내 이기심으로 인해, 주님께 인도되어 

회개하고 거듭나 구원받을 기회조차 전면 차단해버리는 것입니다. 

이웃 형제가 그로 인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면 과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님은 이런 모든 상황과 진실을 다 꿰뚫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누가복음 10장 30-34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장 35-37절)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5장 12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한1서 4장 21절)

 

율법주의에 찌들어있던 바리새인마저 양심에 찔려 

제사장과 레위인보다 그를 돌봐준 사마리아인이 옳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너희들도 이와 같이 하라고 교훈합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은, 예배 행위만 목숨 걸지 말고 

평소에 예배의 삶(사랑)을 살라는 뜻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예배의 진행을 맡은 그 시대의 목사급입니다. 

정황상 이들은 예배를 위해 황급히 가는 중이었습니다.  

이들은 강도 만나 심하게 다친 이웃 형제를 분명히 목격했지만... 

율법주의 예배 행위를 목숨보다 더욱 중요시하였기에 

다친 형제를 보고도 예배를 위해 그냥 냉정히 지나갈 뿐입니다. 

내 이웃 형제가 어찌 되든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사랑과 긍휼이 없이, 오직 예배 행위만 있었습니다. 

위 성경 말씀을 읽고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예수님께서 예배의 중요성을 위해 회당으로 달려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하여 매우 흡족해하셨습니까? 

 

그러나 사마리아인을 보십시오. 

그는 여행 중(일상의 삶)이었고, 그 과정에서 강도 만나 

심하게 상처 입은 자를 확인 후 그를 불쌍히 여겨 가던 길 멈추고 

그를 위해 자비를 베풀며 이웃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합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일상적 삶을 통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인을 정말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온전한 사랑 없이 율법적 예배 행위에만 열심인 

바리새인들을 우회적으로 질타하는 말씀입니다. 

이 상황은... 이천년의 시대적 간극만 다를 뿐, 영적 상황은 

현 상황과 아주 동일합니다. 

 

예배에 목숨을 거는 진짜 경우는 이런 상황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는... 거듭나, 사랑과 거룩으로 무장한 그리스도인들이 

이웃 형제에게 그 어떤 해도 끼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희생해가며 이웃 형제들을 사랑으로 살폈습니다. 

마귀는 이 현상을 그냥 두지 않고 바리새인들을 시켜 탄압했고, 

로마에서는 도미티안이나 네로 황제가 믿음을 탄압했지만, 

카타콤(지하동굴)을 만들어 목숨 걸고 신앙과 예배를 지켰습니다. 

이들에게는, 이런저런 인본적인 속셈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순수하고 거룩한 일상의 예배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목숨을 건 진정한 예배 수호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배의 본질인 사랑이 넘쳤으므로... 이웃 형제에 대하여 

자신의 몸을 던져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었습니다. 

이웃에게 해가 되는 것은 더더욱 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세우시길 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함께하고, 주님께서 세우신 계명인 

주님을 진정 사랑하는 만큼 내 이웃에 대하여도 사랑하려는 것... 

이것이 예배를 통하여 삶으로도 이어지는 교회... 

즉, 내 육의 삶이 죽고,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나를 인도하도록 

하는 교회... 이런 성도들의 모임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그리스도 십자가와 온전한 영적 헌신은 사라지고 

온갖 행사로 분주하고, 예배의 본질인 사랑은 사라졌으며, 예배를 

위한 예배, 예배 자체가 우상이 되어, 함께 모여 예배 행위만 하면 

마치, 주님께 내 의무를 다한 듯 포효하며 만족하는 모습만 

진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행하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평소 엿새 동안은 사랑 없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계속 살다가 

오직... 주일에만 목숨 걸고 교회에 나와 예배 행위에만 참석하면 

최선인 줄 압니다. 

내 자식이 엿새 동안 속 썩이다가 단 하루만 효자인 척 해보십시오. 

그 자식을 효자로 인정할 부모가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예배는 예배가 아닐뿐더러 꽹과리 소리만 난무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도무지 이런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아벨이 드렸던 온전한 예배가 아닌... 

형식에만 치우친 가인의 가증한 예배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사야 1장 11-13절)

 

정말 이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불같은 복음을 받았으면, 나를 진정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들고 단호히 그분이 가셨던 길을 따라가길 결단하며 

실제 그 길을 가야 할 영적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내 속에 있는 육의 속성을 태우고(회개하고) 주님의 마음을 

받으려는(거듭나려는)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나를 통해 사랑으로 배출되어야 합니다. 

이것 외의 모든 예배 행위는 세상 단체들이 늘 주기적으로 하는 

인본적 행사에 불과할 뿐이고, 종교인일 뿐입니다. 

 

너무나 많은 목사님들이... 

성공하는 예배가 아닌, 성공하는 교회 시스템을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만 앞세우는 그럴듯한 명분을 이용하여 세상적, 인본적, 

육적 성공을 목표로 한다면... 그건 바리새인의 예배입니다. 

그 교회는 살았다 하나, 죽은 교회의 표본이 될 것입니다. 

그 예배는 살았다 하나, 죽은 예배의 표본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주님께서는 그 속마음을 감찰하시므로 

절대 속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그럴듯)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잠언 21장 2절)

 

"내가 네 행위(본심)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3장 1-3절) 

 

주님을 사랑한다 고백하면서도 형제에 대하여 사랑이 없는 예배... 

예배 자체가 우상이 되어 예배를 위해 드리는 예배... 

세상적 인본적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세속적인 예... 

이런 예배는 주님이 매우 싫어하고 받지 않으시는 죽은 예배입니다. 

 

교회당에서 드리는 주일 예배는 정말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주일에만 주님이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평소 삶 가운데 

늘 주님을 가슴에 품고, 늘 그분을 의식하며,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가운데,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주님께서 원하는 예배이고, 그 사람이 어딜 가든지 

그곳이 바로 주님이 계신 지성소의 예배 자리입니다. 

 

"순종(온전한 믿음의 삶)이 제사(형식에 치우친 예배)보다 낫고...

(사무엘상 15장 22절) 

 

거듭 말씀드리지만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엿새 동안 거룩한 예배자로 산 성도들이  

주일에 다 같이 모여, 평소 드리는 예배 중 일부일 뿐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은... 

주일 하루만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고, 나머지 엿새 동안도 

안식일의 예배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부디,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깨달아 알고,  방향으로만 가는 

진짜 예배자, 목회자가 되시길 간절히 권면드립니다. 

 

랑별파파 (daum cafe: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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