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사람들
저는 늘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가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 반대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안타까워하고 바른 교회의 건설을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오히려 더욱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그 사실이 저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없습니다. 그럴 때 제 마음속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은 옳은 것을 주장하고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물론 그 의지를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지를 관철하는 방식입니다.
이제까지는 틀린 것을 지적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였습니다. 오래도록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과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자신이 틀린 경우라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지적할 때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엄청난 분노를 쏟아놓습니다. 그러므로 잘못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달아 알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스스로 깨달은 경우에도 그 잘못으로부터 벗어나기로 작정할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대형교회들에 분란이 일어나고 싸우다가 갈라지는 것을 수도 없이 지켜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러한 현상에 대해 한 줄기 기대를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혹 그런 과정 중에서 깨달은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물가에서 숭늉 찾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들이 지나야 할 영적 여정이 멀기 때문입니다. 또 아무리 선과 악이 분명히 갈라지는 일이라도 싸움과 다툼을 통해서는 제대로 된 해결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인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조급한 인간에게 기다림이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제입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침묵 속에서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기대마저 저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집을 나가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찾아 나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높은 곳에 올라 아들이 돌아오는가를 살핍니다. 아버지는 그림자만 보아도 아들을 알 수 있습니다. 못 먹고 초라해져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먼 거리에서도 아들을 알아보고 아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에게 새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겨주고 반지를 끼워줍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게 합니다. 그동안 아버지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그 기다림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을까요? 그러나 아버지는 기다립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이 아니라 새 아들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아버지의 그 마음입니다. 오늘날 싸움과 분쟁에 쌓여 있는 교회들을 바라보며 교회를 개혁하고 싶은 조급함이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말을 내뱉고, 잘못을 지적하고 변화를 촉구한다면 이전투구의 장만 넓힐 따름입니다.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가를 더 깊이 깨달아 그것을 자기 혈관 속으로 용해시켜야 합니다. 그런 후에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돌아오면 입혀줄 새 옷과 신발과 반지와 살진 송아지를 준비해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후예들답게 사람들은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선악의 구별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옳음을 확신하며 말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렇게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없어 보입니다. 자신의 입장에 따라 춤추고 있는 선과 악의 가벼움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선생님'이라 부르며 다가온 청년을 향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말하는 선, 인간이 말하는 악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악의 대립을 그대로 절대화할 수 없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인간이 선과 악을 알 수 없다거나 선과 악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 역시 아닙니다.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해야 합니다. 다만 더 선한 것과 덜 악한 것을 식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그렇게 하기 위해 예외 없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그런 인간의 실존을 바라보게 합니다. 피상적으로 현상만을 바라보고 행동하려는 사람들에게 먼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을 바라보며 행동한다면 우리는 결과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정욕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싸우고 다투는 것으로는 올바른 길로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싸우기를 좋아하는 정욕
겉으로는 화려한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출처를 살펴보면 그것이 단순히 허망된 말임을 알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특별한 영적 통찰력이 없더라도 조금만 물러나 바라보거나 조금만 시간을 두고 관찰해보면 그것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분쟁과 다툼에 관해 마치 어두운 곳에 밝은 조명을 비추듯이 변명의 여지가 없는 폭로전을 펼칩니다. 그의 어조는 거침이 없고 단호합니다.
교회 안과 밖에서 싸우고 분쟁하는 일들은 아무리 좋은 대의명분이나 화려한 신학적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해도, 실제로는 버리지 못한 세상적인 탐욕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수술용 칼로 푹 찌르듯이 환부를 드러냅니다. 겉으로는 교회를 위하고 주님을 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는 올바른 명분들을 내세우지만 사실 그 뒷 배경에는 그냥 자기 욕심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싸우기를 즐겨하는 육신의 정욕에 따라 움직이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 죄 때문에 교회는 분쟁과 상처와 수치에 휘말립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암 덩어리를 도려내고 싶어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안과 밖에서 분쟁들과 싸우는 잡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목사들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지만 그 안에서 서로 내세우는 것들은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직분을 내세우고, 어떤 이들은 공로를 내세웁니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이들도 자신의 옳음을 내세우면서 싸움에 합류합니다. 모두가 뒤엉켜 얽히고설킵니다. 엉킨 실타래처럼 풀 수가 없게 됩니다. 아무도 불의를 당하지 않고, 불이익을 당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멱살을 잡고 세상의 법정에까지 끌고 가며 싸웁니다. 그냥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독하게 싸웁니다. 대의명분이 있고 신앙적인 이유들을 내세우지만 야고보 사도의 영적인 눈앞에서 그들의 속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핵심을 찌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싸움과 분쟁은 어디서(포맨) 오는 것입니까?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틀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기편의 말이 맞고 상대편의 말이 틀렸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상대편이 못되고 어리석기 때문이고 우리 편이 지혜롭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말이 지혜로운가 아닌가를 떠나 이 모든 상황을 분쟁과 싸움으로 몰고 가게 된 그 근본적인 영적 정서, 다시 말해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감출 수 없는 숨은 동기를 지적합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싸움 '폴레모스'는 격한 말입니다. 전쟁이라는 의미입니다. 말 그대로 칼을 들고 상대를 죽여 없애는 물리적인 전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절에서 이어지는 것처럼 살인하고 시기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매우 격한 의미를 간직한 말입니다. 여기서 시기한다는 말은 '젤루데'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젤롯당'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젤롯당들은 정치적 억압뿐 아니라 경제적 착취와 압박의 문제를 전쟁을 통한 무력 저항으로 풀어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에 무력으로 항거하였고, 그들의 최종 목표는 수많은 소작농들과 노예들의 빚 문서와 노예문서들을 강탈해 불태워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관점으로 보면 그들의 그러한 행동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야고보 사도의 관점은 예수님의 정신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어떤 폭력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도 강조한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인들의 문제 해결 방식은 평화를 짓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그 평화를 짓는 일의 모범입니다. 자신을 죽이러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도 칼을 휘둘러 자신을 방어할 수 없습니다. 검을 사용하는 자는 검으로 망할 뿐입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의 모범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싸움과 다툼은 겉으로 드러나기 훨씬 이전에 사람의 속에서부터 일어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것을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이라고 하였습니다. 원문에 좀 더 가깝게 표현하자면 "당신들의 지체 안에 있는 싸우기를 좋아하는 정욕으로부터"입니다. 인간의 속에 악한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열정(에쩨르)이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앞서 야고보 사도가 사람이 자신의 정욕에 이끌려 시험에 든다고 했던 그 정욕과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앞에서 사용한 정욕 '에피쑤시아'는 어떤 대상을 향해 일어나기 시작하는 욕망을 가리킨다면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정욕(헤도네)는 그것에 머물러 즐기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싸우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정욕입니다. 악한 줄 알지만 그것을 즐깁니다. 겉으로 보면 옳음을 놓고 싸우는 것 같지만 실상은 타락한 인간에게 호소력이 있는 악을 즐기는 정욕, 싸움을 즐기는 정욕입니다. 겉으로는 진리를 위한 고상한 투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악한 성향을 진리에 대한 논쟁으로 가장한 위장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이 실상이며 이것이 처참한 사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미 어떤 이의 말만을 듣지 말고 그 행동을 주시하며 더욱이 그 말이 동반하는 영적 정서를 분별하여 깨달음으로써 그 말의 출처와 기원을 가늠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말다툼이나 분쟁, 옳고 그름에 대한 주장들이 다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그것들이 정당화하고자 하는 '싸우기를 즐겨하는 정욕', 곧 상처주고 헐뜯고 죽이고 말하게 하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그런 악한 정욕의 불을 꺼버리지 않으면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연코 그들 안에 심겨 있는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태도는 더더욱 아닙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 지혜는 땅에 속해 있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근본적으로 싸우기를 즐기고 좋아하는 정욕이 들어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멀쩡히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재산을 나누어달라는 그의 요구는 율법은 물론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욕에 휩싸인 그의 마음은 그것을 옳다고 믿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싸워 이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랐습니다. 그가 만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싸움을 좋아하고 즐기기까지 하는 그의 마음속의 정욕은 마침내 원하는 바를 얻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멸입니다.
이것은 다만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어느 한순간 떠오른 자신의 깨달음이나 생각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싸움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관철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우리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싸움 자체를 즐기고 좋아하는 정욕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우리 마음속에 싸우기를 즐기고 좋아하는 정욕이 자리하고 있음을 생각하며 싸움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닮아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습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도 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싶다면 하나님께서 간절히 듣고 싶어 하시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듣고 싶어 하시는 이름은 여호와, 엘로힘, 아도나이와 같은 비인격적인 칭호가 아니라 , 아바, 아버지입니다. 아바는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을 부를 때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아람어 칭호 '아바'를 사용하면서, 아람어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헬라어로 번역된 말 '아버지'를 붙인 것입니다. 교회 전통은 이렇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언제부터인가 아빠란 말은 떨어져 나가고 아버지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다 큰 사람들이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분을 진노의 하나님이나 징벌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마가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자 그분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말씀하셨고, 또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요15:23)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셨고 당신만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려주실 수 있는 분임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은 사랑이신 아바, 아버지입니다.
아바, 아버지라는 호칭은 다만 친밀감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둘째 아들과 큰 아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집에 돌아오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덥석 안아주며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용서하고 위로하고, 잔치를 열어 주시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6:3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싸움을 즐기고 좋아하는 정욕에서 벗어나 자비하신 아바,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안에 떠는 노예의 영이 아니라 아들의 신분을 주시는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그 영 안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영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롬8:15-18참조)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여러분!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벧후1:4)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닮을 수 있을까 고개를 흔들게도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주님의 영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젠가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닮은 그분의 자녀의 모습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정리하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내 안에 싸움을 즐기고 좋아하는 정욕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끈질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많이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옳은가를 헤아리고 있는 제 마음이 이미 잘못된 마음입니다. 그대로 내쫓고 잊어야 할 둘째 아들도, 당신의 마음을 알지도 헤아리지도 못하는 큰 아들도 모두 그대로 품어주시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그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어 교회가 제 모습을 찾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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