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기 전 그는 뭐라고 기도했을까
차디찬 서해 바다에 침몰한 그 커다란 선박 어디에선가 죽어갔을 어린 생명들과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들려오는 소식 하나, 하나에 희망을 걸면서도 그 아이들과 함께 그 어두운 뱃속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부모들을 생각하며 숙연할 수밖에 없던 한 주였습니다. 승객들의 안전을 뒤로 한 채 먼저 배를 탈출한 선장과 승무원들에 대해 분노가 일기도 했고, 그런 낡은 배를 들여와 돈을 벌려 했던 해운사 사장이 밉기도 했고, 자신이 살아남은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다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교감 선생님을 보고 그런 분노도 함부로 표현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이런저런 해석을 하는 많은 글들도 읽어보았습니다. 다 옳은 말을 하는 글들이었지만 그런 주장들이 마음에 들어오기보다는 이럴 때는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침묵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냥 말없이 순간순간 화살기도를 날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가톨릭 신자인 사회복지사 이장섭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가슴 아픈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 글이 제게는 주님께서 제게 주시는 부활의 메시지로 들렸습니다. 먼저 그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카타리나 씨는 50대 후반의 여성이다. 그녀는 일찍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소박하고 신실하게 신앙의 길을 걸어왔다. 한적한 농촌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카타리나 씨는 성당에서 교우들을 만나 미사를 드리고 어울리는 것이 무척 소중하고 즐거운 일이다. 성가대에서도, 신심단체에서도 신앙심 좋고 능력 있는 직업여성이라고 칭송이 자자하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홀로 살고 있지만 가끔 다가오는 외로움도 이런 분위기 덕분에 잘 견뎌내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그녀에게 우울한 소식이 들렸다. 같은 마을에 사는 청년인 재민이(가명)가 26살의 꽃다운 나이에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재민이의 할머니를 잘 알고 있었고 재민이의 집안 사정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재민이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할머니와 함께 지적 장애를 가진 어머니를 돌보며 살았다.
어려운 살림에 학교를 휴학하고 돈을 벌어 오겠다며 서울로 떠났던 재민이가 마을에 다시 돌아온 것은 1달여 전이었다. 할머니를 통해 들으니 전문대학을 다니느라 대출받은 학자금과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다단계 사업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사채를 쓰게 되었는데, 빚을 갚을 길이 없자 사채업자에게 폭행까지 당했다고 한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온 재민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나는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어”라고 한탄하던 것이 재민이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재민이 할머니의 눈물어린 탄식을 들으며 카타리나 씨는 부끄럽고 죄송스런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신은 주말이면 서울의 노래 모임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즐기고, 돌아오는 길에는 감실에 보석이 박혀 있다고 소문난 강남의 멋진 성당에서 공연을 보고 오곤 했다. 이태리로 성지순례 갔을 때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약탈해온 금으로 천정을 도배했다는 성당을 구경하며 황홀한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재민이네 사정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친척들이 도와주겠지. 젊으니까 잘 살아가겠지’ 하고 외면한 채 그렇게 자기 생활에만 빠져있는 동안 아까운 젊은이가 세상을 버린 것이다. “내가 왜 재민이를 도울 생각을 못했을까.” 카타리나 씨의 슬픈 사연을 바라보면서 최근 우리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세 모녀 자살 사건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2년 통계청의 사회 조사에서도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의 40%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답했다.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었다’고 응답한 사람 가운데 20대의 28.7%, 30대의 42.6%, 40대의 51.5%, 그리고 50대의 52.6%가 생활고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런 수치들은 2008년 통계청의 사회 조사보다 훨씬 증가한 것이다.
한쪽에서는 세계 경제 7위권 진입을 외치고 유사 이래 가장 잘사는 시대라고 손나발을 불며 찬양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매일 40여 명의 사람들이 힘들어 못살겠다며 세상을 버린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표현한 것처럼,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사회이며, 한쪽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한쪽에서는 음식이 버려지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는 이런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교회에는 카타리나 씨처럼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정화하여 개인적인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다. 온유하고 자비한 태도로 세상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겠다는 착한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주리고 목마른 자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은 교회 내에서도 강경론자로 매도되고 있다. 친구와 부유한 이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자주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는 이들,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교황의 권고는 아직도 문밖에서 찬바람을 맞고 떨고 있다. 형제적이고 정의로운 구조를 통해 이 세상이 하느님의 현존을 향해 개방되도록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여전히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거친 길이다.
재민이는 자살하기 며칠 전에 교회에 다녀갔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던 재민이는 텅 빈 교회에서 하느님께 뭐라고 했을까? 탐욕과 거짓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세상에게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라고 요구하지 말고,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교회가 나 같은 약자들의 피난처가 될 수는 없겠냐고 울부짖지 않았을까? 염치나 양심의 가책도 없이 불의하고 무정하게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짓밟고 외면하는 세상을 제발 고쳐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을까? 그의 절망과 분노가 오래도록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정말 사바세계임을 다시금 절감합니다. 그러면서 이장섭님의 이 글이야말로 복음을 대변하는 이 시대의 절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어떤 목사나 사제나 신학자의 복음 해설보다 더 복음적인 내용입니다. 복음은 세상에 절망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알리는 기쁜 소식입니다. 죽음의 영이 곳곳에서 생명을 집어삼키는 이 세상의 실체를 파악한 사람만이 복음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지만 그러나 정작 세상을 절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이 시대 기독교의 아이러니입니다.
반복음
이 시대 기독교에 식상하고 절망한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절망의 이유를 제대로 아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이 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이 피상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떤 이들은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점을 권위주의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민주적인 교회가 되는 것이 그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의 세속주의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 역시 세속주의로부터의 과감한 탈출은 과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단들은 초점을 흐리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잘못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정통이라는 정체성을 붙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잘못되어 있는 교회를 정통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그대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문제로 권위주의, 세속주의, 기복신앙, 이단으로 지적하는 것은 다 맞는 진단들이지만 그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오늘날의 교회가 반복음적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인 주원준님은 그것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교회의 반민주성이 지적될 때마다 필자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훼손되어서 문제라는 생각 보다는 복음이 손상되어서 문제라는 느낌을 더 받는다. 교회 내부 질서가 비민주적이라는 지적이 일어날 때에는 교회가 추구하는 과정과 목표가 복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지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높은 건물을 세우고, 세례 받는 신자 수의 목표치를 상향조정하거나 조기달성하기 위해서 다그치고, 세상에서 힘쓰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성직자들이 부유해지고 권력화 되고, 가난한 사람이 고위 성직자에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에서 일부 깨인 신자들이 교회의 비민주성을 제기하는 맥락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반민주성이 아니라 반복음이다. 복음이 실종된 것이다. 교회는 민주적 절차로 작동하는 단체가 아니라 복음의 영감으로 사는 집이다. -주원준, 가톨릭교회에 민주화 운동이 필요한가-
또 개신교 원로신학자인 김영재님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단이라는 말을 시한부 종말론이나 종말론적 그리스도임을 사칭하는 자에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면서 1920년대부터 시작된 이단들에 대한 정죄는 오늘날 분열로 인해 교회의 권위가 현저하게 약화되어 이단들도 교단을 형성하여 전통적인 교회나 교단들과 대등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분열된 교회와 교단들의 틈새에서 이단들이 준동하고 발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비윤리적인 행태들이 들어나도 그것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하지 못하는 것은 정통이라는 교회들에서도 똑같이 그러한 비윤리적인 모습들이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단이냐 아니냐의 교리 논쟁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드러나고 있는 비윤리적인 행태가 반복음적인 교회들에게 필연적으로 맺히는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드러나는 문제들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가장 핵심적인 것은 주원준님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가 반복음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서 복음이 실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복음을 되찾는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것이 바른 복음인가를 놓고 논쟁만하는 것이 아니라 말없이 그리고 신실하게 복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도 아니고,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위함도 아니고, 단지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셨던 방식이며 또 그분의 그러한 사랑에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의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돈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돈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맘몬이 다스리는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라는 글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돈의 위력은 막강해졌습니다. 물론 돈이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돈이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무한대에 가까운 힘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자본은 이제 어떤 힘센 국가나 정부도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한 힘과 권력을 지녔습니다. 자본이 재벌은 물론 정치가들을 만들어내고 대통령까지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가뜩이나 돈에 시달림을 받고 있어 돈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돈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단순히 설교 시간에나 부리는 객기 정도로 폄하되기 일쑤입니다. 사실 그렇기도 합니다. 설교자들 역시 말은 그렇게 하여도 실제로는 돈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돈 많은 사람을 대접하고, 헌금을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소원이 하나님을 잘 믿고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이 벌어 헌금을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떵떵거리며 교회에 다니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도 먼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사고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반복음적인 사고인가를 성경을 조금이라도 심각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거의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암묵적인 동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돈이 사람들의 주인이 되고 사람들은 돈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는 바로 그러한 세상 한복판에서 자신의 주인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의 사람들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황제는 주님이시다!"라는 인사말을 나누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가 주님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다.'라는 그들의 고백 때문에 체포당하고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모두 상실하고 심지어는 가족들로부터도 절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거나 유지하기 위해 그야말로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자신의 믿음을 실천하기 시작하면 빈정거림과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처럼 그렇게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 이상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로마와 종교지도자들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그분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시작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더 이상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임재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실현되었기 때문에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게 되는 미래의 피안의 세계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경험할 수 있는 현재성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그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삶으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때까지 사탄의 영향력 아래서 신음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적으로 도래하였음을 상징적으로 입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은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말았습니다.(창1:31)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질병과 고통 그리고 사망과 같은 죄악의 결과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망가진 모습을 원래의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기적이 갖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고,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셨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바로 '오실 그이', 즉 메시아이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할지를 물었을 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그리고 복음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는 기간 중에도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행1:3)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체포되어 로마에 머무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전한 것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연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였습니다.(행 28:23) 사도행전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이 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며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더라."(행28:31)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죽음입니다. 그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이 세상은 더 이상 사탄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배하는 곳임을 만천하에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부활을 통해 사탄의 권세는 완전히 꺾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탄이 다스리는 세상, 혹은 맘몬이 다스리는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증거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맘몬은 신자유주의의 후광을 등에 업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위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강력한 맘몬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돈이 없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러한 맘몬의 위협을 무력한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한 변화를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처럼 연약하고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에수님은 그런 우리들을 위해 제자들에게 먼저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사탄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는 이 시대에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면서 우리들 가운데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활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이요 면류관입니다.
사랑의 송가
또한 부활은 영원한 사랑의 송가입니다. 사랑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소중한 약속은 어쩌면 바로 그것입니다. '열심히 사랑하라. 생명조차 아끼지 말라. 왜냐하면 그 사랑의 열매는 부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 사건과 부활은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송가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사랑에 응답할 차례입니다.
변해가네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생각한 그 길로만 움직이며
그 누가 뭐라 해도 돌아보지 않으며 내가 가고픈 그곳으로만 가려했지.
그리 길지 않는 나의 인생을 혼자 남겨진 거라 생각하며
누군가 손 내밀며 함께 가자 하여도 내가 가고픈 그곳만 고집했지.
그러나 너를 알게 된 후 사랑하게 된 후부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가네.
나의 길을 가기보다 너와 머물고만 싶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가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우- 너무 빨리 변해가네.
(작곡, 작사 김창기/ 노래 김광석)
가수 김광석이 부른 노래의 가사입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본성이 요구하며, 두려움과 염려를 극복하고 반대의 길을 가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는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변해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누군가를 알고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이후 모든 것이 변해간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 내가 변화된다는 것은 그동안 '나'라고 고집했던 것들보다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될 때 시작되는 은혜요, 선물이었습니다. 누군가 강요하거나 그래야 한다는 당위나 강박이 아닌 자발적이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변화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모두 이 선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여인들도, 삭개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도 그리고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사랑하게 된 뒤 완전히 다른 모습의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사랑을 체험하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당신을 버리고 달아난 제자들에게도, 방황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분은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붙들고 있는 온갖 허황되고 거짓된 우상들과 끊임없이 죄로 향하는 우리 자아와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사랑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분은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끝이 부활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은 아무런 조건 없이 맺은 약속입니다. 부활은 사랑의 종착역입니다. 부활은 그래서 사랑의 송가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부활을 어떻게 이해해왔습니까? 교리적으로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고 들어오지 않으셨습니까? 부활은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어지는 투박하고 무미건조한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매일 죽고 부활하는 것을 실천한 사람들에게 맺히는 열매였습니다. 나 자신을 훌훌 털어버리고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실 때 나도 모르게 사랑하며 변화된 작은 모든 것들이 모여 이룬 결정체였습니다.
우- 너무 쉽게 변해가네,
우- 너무 빨리 변해가네.
이 노래가 바로 부활신앙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신앙이었고, 그게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진짜라면 우리 주변의 재민이들에게 자살하지 않고 다시 살 힘을 주고, 탐욕과 거짓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세상 속에 사회 안전망을 만들어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어,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세상이 짓밟아도 여전히 함께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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