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임마누엘 (마1:18-25)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말함에 있어서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할 것이며 성령으로 잉태한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은 예수라 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마태는 이러한 증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구원자이신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는 일이며 또한 주님의 오심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일이라고 증거한다. 임마누엘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 7장에 언급되어 있다. 이사야 6장에서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선지자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성전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연기가 자욱하였고 천사들은 두 날개로 발과 얼굴을 가리우고 날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는 영광이 가득한 광경을 보고 얼마나 죄가 많은 백성 가운데 있는 존재인지를 깨닫고 이사야는 망하게 되었다고 부르짖었다. 이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시는데 그 목적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성읍이 황폐하고 파멸되도록까지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게 하여 선지자들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하겠지만 그러나 그루터기와 같은 거룩한 씨를 남기겠다고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남은 자들을 예비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러한 흐름은 마태복음의 전반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사야 7장에서는 임마누엘에 대한 기록이 언급되어 있는데 당시의 국제적인 상황은 북이스라엘이 아람군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남유다를 공격하려고 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에 유다의 아하스왕은 아람군대의 배후에 있는 신흥국가인 앗수르와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대응하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아하스왕에게 보내어 말씀하시기를 "북이스라엘과 아람군대가 강해 보이지만 그들은 연기만 나는 부지깽이이니 너는 염려하지 말고 내 앞에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아하스왕은 이미 앗수르와의 군사동맹을 통하여 도움을 청해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여 여호와의 도움의 손길을 바라볼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하스는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보내셔서 아하스왕에게 "너희가 구하는대로 내가 도와주마"라고 징조를 구하라고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다윗의 집이여 왜 너희들이 나 여호와를 괴롭게 하느냐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인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리고 그 아이가 커서 철들기 전에 그 땅에 큰 번성이 오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기 열심, 자기 언약에의 신실하심, 자기 사랑을 통해서 친히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실 것이다. 이처럼 이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마태는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다고 증거한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구원자이시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임마누엘이시다. 예수님은 옛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오신 임마누엘, 즉 자기 백성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구약시대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휘장으로 가리우고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러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권세를 의뢰하는 자들을 심판하시지만 자기를 의뢰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구원이 되게 하시려고 자기 열심과 사랑 그리고 자기 신실하심을 통해서 친히 다윗의 후손으로 사람이 되셔서 우리 중에 오셨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태는 임마누엘의 의미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번역이며 이방인들을 위한 번역이다. 그리하여 천하만민을 위한 복음임을 증거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이면서 또한 천하만민을 위한 구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사역할 당시에도 북이스라엘 왕국은 아람군대와 결맹하였고 남유다왕국은 앗수르와 군사동맹을 체결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지 아니하고 세상권세를 의지하여서 그들은 결국 멸망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그들 가운데 임마누엘하신 그들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지 아니하고 거절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가결하면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 왕이 없나이다"라는 공적인 고백을 통하여 세상권세를 의지하여 자신들의 영광을 보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배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열심 그리고 그의 진실하심으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다시금 살리셔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의 모든 것들의 주가 되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거절하였지만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 의와 평강의 왕국을 세우셨다. 이러한 은혜의 역사는 우리의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의 결과이며 그 분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에 깨어서 이러한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섬김이 참으로 합당한 일인 것이다. 지금도 세상은 자신들의 권세를 자랑하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자신들의 배이며 욕망인 것이다. 심지어 믿는다고 하는 교회까지라도 그들이 추구하고 구하는 것은 세상의 영광과 부요함이며 자신들의 유익과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이 삶의 목표가 되고 있다. 이처럼 세상이나 믿는 자들까지라도 "가이사외에는 우리 왕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실정이다. 진정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하심과 열심으로 구원의 일을 이루신 목적이 이것이겠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이 믿는 자의 이 세상에서의 보다 부요한 삶을 위해서인가?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믿는 성도는 고난의 생을 사시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의 길을 가는 동안 모든 고난과 핍박가운데서 벌레처럼 쓰레기처럼 취급을 당한다 하더라도 임마누엘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임마누엘하여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믿음에 깨어서 우리의 전 삶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이루어 간다면 진정 이 세상을 마치고 종착역에 내려설 때에 해보다 더 빛나는 영광으로 덮입혀주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