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간 가장 이슈된 것은 정인이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 성도들도 충격을 많이 받으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어린 아이를 그렇게 할 수 있을 까라는 생각에 충격이 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것은 정인이 양부모가 다 크리스천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둘 다 목회자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로서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들이 목회자의 자녀로 자랐다는 것은 항상 교회와 신앙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들었을 것이고, 성경공부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이들이 균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지만 공동체 속에서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를 갖춘 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살아야 합니다. 신앙과 삶의 균형을 이루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균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전에 선배목사님이 목사가 되기 전에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는 그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드린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좀 모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제가 목사가 되고 저 자신과 많은 목회자를 만나면서 인간답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그제 서야 선배목사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목회자라고 할지라도 삶과 신앙이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어느 시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으라” 이 말도 균형있는 신앙생활하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만 밑줄을 긋고 삶은 그 성경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시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철학 교수였던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에 보면 하버드 대학을 자퇴한 여학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학생은 가난했기에 학교에서 청소 일을 하면서 용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잘 사는 한 친구가 종종 놀리곤 했고 때로는 성희롱마저 했습니다. 여학생은 그 남학생과 윤리학 수업을 두 번이나 같이 수강했는데, 그 친구는 매번 ‘A+’를 받았습니다. 자퇴하기 전 교수와 가진 면담에서 그 여학생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선을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이 여학생은 남학생을 겨냥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윤리학을 아무리 ‘A+’를 맞는다고 해도 윤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정인이 양모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들의 모습은 균형을 잃어버린 현대 그리스도인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운전을 하다가 보면 핸들이 한쪽으로 쏠릴 때가 있습니다. 핸들이 한쪽으로 쏠린다는 것은 바퀴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퀴가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한쪽 바퀴 쪽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동차 바퀴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한쪽으로 쏠리면 사고 날 위험성도 있고 운전자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자동차 바퀴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도 역시 어느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균형을 잡지 않으면 사고가 터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달리 하늘나라를 사모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백성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영역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만 하는 바로 이 땅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민스러운 문제에 부딪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몸은 땅에 속해있으면서 삶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에서 다시 부르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주야를 하나님과 함께 보내게 됩니다. 모세는 이 사십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도 받고 백성들에게 가르칠 율법과 계명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때 성막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설계도를 받게 됩니다. 모세는 물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시내산으로 올라갔지만 실제로 40일이라는 시간동안 최고의 지도자가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40일 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하면 국정을 운영하는데 차질이 있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게 마련입니다. 특히 모세는 세상의 지도자들과 달리 하나님께서 세운 신적인 권위를 가진 지도자였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실제로 중요한 일들은 모세가 직접 지시를 하고 결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곧바로 시내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대한민국 국적이고 또 하나는 천국국적입니다. 이 둘 중에 우리의 진짜 국적은 천국입니다. 우리가 돌아갈 본향은 천국입니다. 비록 우리가 대한민국으로 이 땅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천국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의 속한 백성임에도 불과하고 그 사실을 망각하고 이 땅의 가치와 이 땅의 것에 파묻혀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지가 하루아침에 왕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가 진짜 왕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왕자가 되었으면 왕궁에 들어갔으면 왕궁의 법도를 배워야 하고 왕자로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왕자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왕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왕복을 입었음에도 불과하고 여전히 거지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왕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비록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땅의 백성들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처럼 이 땅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이 땅의 삶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삶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뵙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가면서 결코 이 땅의 일을 무책임하게 팽개쳐 버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장로들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면서 아론과 훌이 함께 있으니 그들에게 모든 것을 의논하라고 지시를 합니다. 이것은 모세가 땅의 일을 결코 가치 없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책임 있는 행동입니다. 나중에 모세는 40일 동안 시내산위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시간을 보내고는 어떻게 합니까? 다시 이스라엘백성들이 있는 곳으로 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올라가십니다. 세제자는 그 곳에서 예수님이 변형되사 그 얼굴과 옷이 해같이 빛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 하는 장면도 목격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 베드로는 너무나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는 예수님께 변화산에서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초막 짓고 살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중고등부 시절에 수련회를 가서 중고등부 학생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교회에 모이는 시간도 더 많아지고 모이면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그냥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세제자가 원하는 대로 변화산에 머물기를 원하실까요? 교회에서 우리끼리 모여서 살기를 원하실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을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변화산으로 데리고 올라간 것은 그 곳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이후에 십자가의 죽음을 처음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며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마음도 베드로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예수님을 지금까지 따랐던 것들이 다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 제자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나타내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이야기 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음성도 듣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변화산에 이렇게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면 이제 다시 땅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변화산은 계속해서 머물러 있을 곳이 아닙니다. 변화산에서 용기와 희망을 가졌다면 이제 땅에 내려가서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계속해서 머물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이면서 훈련받는 장소입니다. 신앙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남자들이 군대에 가면 곧바로 자신이 근무할 군대에 배치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훈련소에 들어가서 몇 주간 훈련을 받습니다. 훈련소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난 다음에 자신이 근무할 곳에 배치를 받게 됩니다. 기초 군사훈련외에 특기병으로 가는 사람들은 그 분야에 대한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자대에 배치를 받게 됩니다. 자대에 배치를 받고도 군인들은 정기적으로 훈련을 계속해서 합니다. 결국 군인들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자대에 배치를 받고서도 계속 훈련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라를 지키고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적과 싸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훈련받고 교육받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힘을 공급받는 곳입니다. 이렇게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면, 은혜와 힘을 공급받았다면 세상이라는 전쟁터로 나가야 합니다. 그 곳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지, 교회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훈련을 받고 충전 받았다면 세상에 나가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에서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구요. 그것이 삶의 현장가운데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균형잡힌 신앙생활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열심이 있는 성도들 가운데 교회 일만 하나님의 일인 줄 알고 가정도 직장도 소홀히 하고 교회봉사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는 일입니다.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직장일도 가정일도 가족들 돌보는 일도 잘해야 합니다. 특히 안 믿는 가족들 가운데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이 없는 가족들은 가정에서 해야 할 일을 뒤로 하고 교회에만 매달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금 아마 믿지 않는 가족들 가운데는 뉴스에서 코로나 19 감염자가 교회에서 많이 나온다는 보도를 보고 교회가지 말라고 말리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가정에서 맡겨주신 일도 감당해야 하고 교회가운데 맡겨주신 일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세상 사람들보다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균형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어느 신학교에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교수가 아무리 공부하라고 타일러도 그는 기도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시험시간이 되었습니다. 문제의 답을 전혀 알 수 없었던 그는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는 단 한 문장만 써놓고 유유히 교실을 빠져 나갔습니다. 담당 교수는 채점란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니 100점, 학생은 다 모르니 0점.” 공부하는 학생이 시험을 잘치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면 최선을 다해 공부해야 합니다. 이것이 균형잡힌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총독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는 분명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민족들이 연합해서 예루살렘성벽 쌓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쳐들어 온다고 하였을 때 먼저 하나님께 지켜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도 하고 적들의 공격에 대비해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4:16-18절 말씀입니다.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을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을 지켜 주시고 성벽공사를 완공해 달라고 기도만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성벽을 완공하기 위해서 한 손에 연장을 잡고, 한 손에 창과 칼을 잡았습니다. 일하는 자는 일하고, 파수하는 자는 파수했습니다. 전력투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이것이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유지하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 멈춘 자전거 위에서 균형 잡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전거가 움직이면 균형 잡기는 쉽습니다. 핸들을 조금씩만 조절하면 됩니다. 물론 이것은 페달을 계속 밟으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정체되어 있으면 균형 잡기가 힘듭니다.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는 만큼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해야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균형을 잡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쏠리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희생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과 삶이 균형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도 밑줄을 그어야 하지만 우리의 삶에도 밑줄을 그어야 합니다. 교회안에 그리스도인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어 세상가운데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편지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균형잡힌 그리스도인 (출24:12-18)|작성자 아름다운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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