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나온 김지혜 교수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김지혜 교수는 “우리는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라고 말합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말이 조금은 낯선 느낌이 들었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주민을 향해서 ‘한국인이 다 되었네요’라고 말하는 것은 이주민을 모욕하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가지세요’라는 말은 장애인들을 향한 모욕적인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마 조금은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표현 모두가 우리는 칭찬이나 격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하는 당사는 상대를 모욕주려고 한 말이 아니라 정말 칭찬과 격려를 하려고 했을 텐데 듣는 사람들은 모욕적인 말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이주민들은 한국인이 ‘다 되었다’는 말에 자신이 아무리 한국에서 오래 살아도 ‘우리는 당신을 온전히 한국인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모욕적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요 굳이 한국인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닌데 왜 한국인 된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말은 현재의 삶에 희망이 없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의 삶에는 당연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의 삶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모욕적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 외에도 일상적인 생활에서 남녀를 차별하는 말들에 대해 이 책에 기록된 것을 보면서 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상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내 입장만 생각하면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세상은 옛날 보다는 정말 많이 평등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차별은 결국 배타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내가 속한 공동체나 부류 안에 들여 놓을 수 없다는 배타주의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이런 배타주의는 하나가 되게 하지 못하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보아도 결국 서로 안에 이 배타주의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태산은 흙과 돌을 마다하지 않기에 높은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태산이 그토록 높고 큰 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작은 흙이라도 결코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도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포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곧 그릇이 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릇은 크기만큼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릇이 작으면 많은 것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의 그릇이 크면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요한이 우리라고 표현을 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요한이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께서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지금 이런 이야기를 예수님께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예수님께서 앞서 하신 말씀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지난 주 금요기도회 때 살펴보았는데요. 예수님께서는 누가 크냐고 변론하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곧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찮은 어린 아이를 영접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자신들이 그 사람들에게 금하라고 한 것이 잘못 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마 전도여행을 했을 때 목격한 사건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속에는 이러한 경험과 더불어 그들이 한 아버지가 데리고 온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던 쓰라린 아픔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데 자신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하였다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이 자신의 전유물인 양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에 대해 금하라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태도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왜곡된 신앙관입니다. 배타주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답변은 과거 모세의 답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70인의 장로가운데 엘닷과 메닷이라는 두 사람이 진 밖에 예언을 할 때 여호수아는 이를 금해야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 모세는 그것은 금하고 시기할 것이 아니라고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금하지말라고 하시면서 금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자체가 이미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하지 않는 다는 것은 상대에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결국 우리 편이 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우리를 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따르는 사람을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반대하지 않는 사람도 이미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배척 하지 말고 포용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만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금하지 말라고하신 이유에 대해서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막9:3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의지해서 기적을 행한 사람은 당장 비방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제자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고 제자들을 따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적어도 귀신을 쫓아냈다면 그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호기심으로 해볼 수 있겠지만 호기심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서 쫓겨나갈 귀신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록 너희를 따르지 않더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대해 금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포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51절이하에 나오는 내용도 가만히 보면 위에 내용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51절 이하에 보면 사마리아인들이 주님의 일행을 거부하는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은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니까?“라고 말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을 거부하였던 것은 오랫동안 뿌리깊이 내려온 민족적 반감 때문이었습니다. B.C 722년 앗수르제국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민족 혼합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으로서의 순수한 혈통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남유다 사람들은 이들을 이방인처럼 취급하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대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넘을 수 없는 증오심과 반목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사마리아인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북부에 갈릴리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오면 되는데 요단강을 건너서 요단서편에서 내려와서 다시 요단강을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스라엘 남부에 있는 사람이 북부지역으로 갈 때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막혀진 담을 허시고 싶어서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기를 원하셨는데 사마리아인들이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불로 이들을 멸해 버리자고 했을 때 오히려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과 사마리아인들의 모습은 이들 속에 있는 배타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잘 포용하지 못하고 배타주의로 나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조금 언급했듯이 늘 자기 기준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해서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틀리다고 생각하니까 포용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배척하는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솔직히 내가 가진 기준이 다 맞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가진 기준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관적인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잣대를 갖다 되면서 ‘틀리다’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배타주의가 만든 많은 장벽들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념에 의해 나누어진 남북의 장벽이 있습니다. 지역감정이라 불리는 영호남의 장벽입니다. 계층간,세대간,성별간,학연과 같은 수없는 인간적 기준에 의한 장벽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인간적인 장벽도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포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장벽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전적으로 옳다고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신앙의 스타일이 다를 수 있고 신앙의 색깔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파마다, 교단마다도 신앙의 색깔이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교파에서, 어떤 교단에서 신앙생활했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나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까지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 사랑하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나를 반대하는 자들 까지 가슴으로 품어야 한다는 말씀 아니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친히 그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가슴으로 품으셨습니다. 자신을 팔았던 가룟유다 역시 가슴으로 품으셨습니다.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 가버린 제자들을 품으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군인들을 포용하셨습니다.
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스탠턴은 당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한번은 두 사람이 함께 사건을 맡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스탠턴은 이 사실을 알고는 링컨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 따위 시골뜨기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라는 겁니까?” 라며 나가 버렸습니다. 스탠턴은 이렇게 링컨을 얕잡아 보고 무례하게 행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통령이 된 링컨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방부 장관 자리에 스탠턴을 임명했습니다. 참모들은 이런 링컨의 결정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고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참모들이 이런 인사에 대해서 재고 할 것을 건의하자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래도 스탠턴은 당신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 버려야지요!” 참모들의 말에 링컨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마음속에서 없애 버려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링컨이 암살자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배타주의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나와 의견이 다르고 나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도 포용해야 합니다. 이것을 넘어 나를 반대하는 사람까지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가슴을 가짐으로 하나님께 더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배타주의는 나누어지게 하는 독소입니다.(눅9;49-56)|작성자 아름다운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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