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이중직'은 필수, '전직'은 옵션

 

"앞서 제시한 모든 노력에도 이중직 상태가 장기 지속될 경우, 한 지역 교회로부터 장기간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없는 목사가 섬기는 그 교회가 과연 주님이 주신 독립적 교회인지 재고하고, 목사가 비난받지 않고 전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도 신중하게 고려해 볼 수 있을 것"

 

며칠 전 보았던 기사의 제목과 그 기사의 내용 일부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신부님 한 분이 제 글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몇 번을 만났습니다. 그걸 계기로 천주교 행사에도 몇 번 초대를 받아 참석을 한 적도 있습니다. 잘 알지 못했던 천주교를, 그것도 신부님들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한 번은 수녀원 한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피정을 온 신부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신학교 교수라고 했습니다. 그분에게 저와 사귀던 신부님이 제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습니다.

 

그러면 교단에서 돈을 주지 않나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신부님의 질문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은 개신교가 기독교가 아니고 교회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돌아갈 길이 있었다면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화를 더 이어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위 기사에서도 한 지역 교회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지역 교회라는 말이 함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생각하지 못하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사업장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경쟁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단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한 지역 교회가 장기간 생활비를 지원하지 못하면 목사는 그 교회가 과연 주님이 주신 독립적 교회인지 재고해야 합니다. 생활비가 그 목사의 소명을 결정하는 근거입니다. 돈이 목사 소명의 관건이 되었습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렇다면 목사가 헌금을 유용한다는 지적이 가능합니까. 목사가 비자금을 만드는 것이 죄가 됩니까. 헌금을 많이 한 교인이 더 많은 권리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목사의 잘못으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그동안 냈던 헌금을 돌려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돈이 주인이 된 교회에서 성범죄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검사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권력이 있기 때문에 룸살롱에서 대접을 받습니다. 룸살롱에 가서 술만 마시는 경우가 있습니까. 더구나 향응으로 제공받는 룸살롱에서 성접대가 없다면 그게 향응입니까. 진도가 나가면 아예 여성 한 분과 아파트가 제공되는 것이 아닙니까. 검찰총장을 하신 분의 혼외자식이 어떻게 생겼겠습니까. 그것은 돈과 권력이 결탁한 일종의 모델케이스입니다. 교회도 거기에서 예외가 아닐 뿐입니다.

 

결국 오늘날 교회가 맘몬의 신전이 되었다는 사실을 공표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학교를 가기 전에 소명은 검증이 되어야 합니다. 한 지역 교회가 생활비를 주면 하나님이 계신 것이고 생활비를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생활비를 주지 못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중직을 가지고 전직을 한다는 것은 소명이란 것이 애초에 잘못된 것입니다. 무슨 소명이 그렇습니까. 그게 무슨 소명입니까. 물론 은혜를 받았다고 무조건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잘못된 복음이해입니다.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는 것은 먼저 스스로 교사의 자질과 교사로의 부르심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높아지려는 욕망의 발로가 아닌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과 확신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도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서 섬기는 종이 되겠다는 방향성에 대한 깨달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맘몬의 신전과 그리스도의 몸임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판단의 근거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목사나 선교사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천한 일을 하는 뭇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맘몬의 일을 하는 목사나 선교사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대인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목사를 잘 살펴보십시오. 교회의 관심사가 가난한 사람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현존하십니다. 그분을 나 몰라라 하는 교회는 결코 교회가 될 수 없고 그런 그리스도인들 역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구제나 사회사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구현이며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며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가장 분명한 표지입니다. 교회의 표지는 말씀과 성례와 권징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의 가장 우선되는 관심사가 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과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중직'은 필수, '전직'은 옵션이라는 오늘 교회의 현실은 오늘날 교회의 정체성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바로미터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맘몬의 신전이 되었다는 가장 분명한 표지입니다.

 

오늘날 개혁을 주장하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자비량 목회가 대세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분들이 아무리 교회를 개혁해도 맘몬의 신전이라는 오늘날 교회의 정체성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참된 목사는 가만히 앉아서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일하는 모든 교인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목사가 일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목사가 가장 약한 지체의 손과 발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목사는 초기교회 당시 가장 천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던 무두질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목사가 돈을 벌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섬기지 않고 섬김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잡아야 할 것은 돈을 벌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가 가장 낮은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이 될 때 목사가 섬기는 종으로서 교사의 역할을 담당할 때 그의 소명이 참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목사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겉옷을 벗어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목사들은 양복에 넥타이를 맬 것이 아니라 언제든 일할 수 있는 작업복을 입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작업복마저 벗어부칠 마음의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중직'은 필수, '전직'은 옵션이 된 오늘날 교회의 현실에서 보아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시고 당신의 목숨을 희생의 제물로 내어놓으신 주님이 목사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서 돈은 판단의 근거나 동인이 아니라 무력화의 대상이며 사랑과 생명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되던 시절이 그립니다. 그때는 돈을 좇다가 잘못된 사람들이 더러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이 돈을 좇게 되었습니다. 이 엄연한 현실을 보고 돌아서는 분들이 더러라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출처/http://cafe.daum.net/eojini/RfWV/1190    /어지니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