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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홀로 서는 너를 위하여3. - 켄트 너번   

정승현 옮김
발행처: 한마음사 

1 아버지의 그림자

내가 성년에 대한 생각들을 형성하고자 시도할 때는
항상 아버지의 모습이 나의 눈 앞에 유령처럼 떠오른다.
나는 지금 그분의 모습 -
그분의 외모,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들을 거의 잃어버린 모습,
시간을 죽이기 위해 텔레비젼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시며
한가하게 시간을 소비하는 모습 -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분의 현재 모습을 보고 있지만
내 머리에서는 과거 그분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기억하고 있다.

온 몸이 흥건하도록 많은 땀을 흘리시며 밤늦게까지
풀을 뽑거나 갈퀴질, 혹은 페인트 칠을 하시던 그분의 뒷모습.
상자마다 가지런히 붙어 있던 목록표들과 각종 도구들을 걸어두는 걸이 못이 박힌,
항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던 지하실의 작업대.
그분이 화내던 모습과 이성문제에 대해 머뭇거리며 내게 무언가를 말씀하시려 하던 시도들.
그분이 보여준 침묵과 근면성, 그리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의식을 당신의 관습들을 통해
내게 보여주시려 했던 애매모호한 노력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또한 나는 기억한단다.
당신의 아이들이 자라고, 대학을 졸업하고, 짝을 찾아 독립했을때의,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얼굴 가득히 뿌듯해 하시던 그 자부심을.
그분 자신은 이제 그런 일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신다.
그분의 기억력은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내 앞에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줄줄외우시던 바로 그 분이
이젠 더 이상 그날이 언제였던가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신다.

그분의 작업대는 버려져 수라장이 되었고
오랫동안 잊혀진 계획의 파편들만이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
지하실 한쪽 구석의 상자 속에서 한무더기로 처박혀 있다.
내 기억 속에서 언제나 나를 훨씬 능가했던 - 어깨, 근육, 힘 모두
- 바로 그분이 이제는 골 깊은 주름이 지고, 쪼그라들고,허약해진 몸으로
조심스레 움직이고, 걸을 때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신다.

난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느껴야만했다.
그러나 그 슬픔에는 두려움과 착잡한 마음의 갈등이 혼합되어 있었다.
지나간 날들, 그 많은 하루하루의 나날들을 지나오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그분과 함께 살아왔는지를 느끼고 있고,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이 얼마나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크기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라는 존재가 자신의 삶에 분명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느끼고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러한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비록 그 그림자가 우리를 공포스럽게 하더라도,
비록 그 그림자가 이름도얼굴도 없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모든 구석구석으로부터 그 사람의 가치와
그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의 남겨진 기억을 전부 몰아낸다 해도,
그 그림자는 우리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미친다.
그 사람의 그림자는 결코 부인할 수가 없는 거란다.

내 경우는 무척 다행스러웠다.
비록 당신이 화가 나 있고 외로움이 가슴을 저밀 때에도,
아버지는 자신의 내적인 문제를 겉으로 드러내
내가 주눅이 들게 하거나 나쁜 영향이 미치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손은 내가 필요로 할 때 항상 내 어깨위에 있었고,
당신의 아들에게 자신이 짊어지고 살았던 가난의 고통스런 업보를
물려주지 않으시려고 평생을 열심히 일하셨다.
그렇게 행운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게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 속에는,
폭력과 무자비함과 술냄새와 물건들이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두려움에 떨던 순간들이 가득 차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기억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가슴저린 슬픈 상처들만이 남아 있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는 역시 아버지의 그늘아래서 살아간다.
그것이 현재의 우리를 만들었고, 우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형성시키는 거란다.

아버지가 된다는 건 또 다른 측면에서는 그 그림자가 가지는 힘을 이해하는 것이다.
너도 장차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낳게 되겠지.
그때에 너와 제 자식간에 갖는 접촉들이 그 아이의 삶의 나날들을
더 좋게도, 혹은 더 나쁘게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접촉들이 아이에게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있을 까?
어떤 말, 어떤 모습, 함께 하는 어떤 시간, 떨어져 있는 어떤 시간들-
과연 무엇이 네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에 대해 판단력 없이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아이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그 아이의 미래를 형성시키게 되는 걸까?

나는 하나의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그건 어스름한 불빛에 싸여있는 어떤 아파트의 현관이었단다.
나의 아버지가 그곳에 서 계셨고,수줍음을 잘타는 열살박이 소년이었던 나는
그 현관문을 쳐다보며 아버지뒤에 숨듯이 서 있었다.
우리는 자전거를 한대 가지고 서 있었지.
그건 핸드브레이크와 기어변속기가 달려 있는 보라색 경주용 자전거였다.
그 자전거는 내가 그때까지 보았던 자전거 중에서도 가장 멋지고 근사한최신형 자전거였지.
우리는 그때 그 자전거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있는 중이었단다.

아버지는 어느 날 이른 아침에, 도시의 해변을 따라 산책하시다가 우연히 그 자전거를 발견하셨다.
아버지는 그 자전거를 가져와 우리집 차고에 집어넣고 담요로 잘 덮어서 보관하셨다.
그리고는 내게 남의 자전거니까 절대로 타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몇 주일 동안 그 자전거는 우리집 차고에 틀어박혀 있었고
아버지는 지방신문에다 주인을 찾는 광고를 게재하셨다.
난 그 자전거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길 은근히 고대했고,
그러면 그 자전거가내 소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고 결국 주인이 나타나고 말았다.
우린 바로 그 주인에게 자전거를 돌려주기 위해서 그 집 문 앞에 서 있었던 거란다.

아버지가 문을 가볍게 두드리셨다.
그리고 잠시후 문이 열렸지. 안쪽에서 한남자가 밖을 내다 보았고,
그의 시선은 우리를 지나쳐 자전거가 있는 곳에 머물렀다.
이윽고 그는 우리에 대해서는 안중에 두지도 않았고,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계속 문밖에서 선 채로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자전거에 긁힌 자국이 많군요"라고 그 남자가 말했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그 남자는 자전거의 바퀴를 돌려보고 손잡이를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는 비난하는 듯한 눈초리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자전거를 발견한 즉시 끌어다가 우리집 차고 안에 넣고
담요로 덮어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고장도없을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난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자전거는 반짝거리며 음산한 현관 안쪽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그 남자는 자전거를 집 안으로 더 깊숙이 들여 놓고는,
"그러나 저러나 당신에게 보상을 해야겠지요"라고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를 몇장 꺼내더니 아버지에게 내던지듯이 불쑥 내밀었다.
아버지는 그 돈을 받지 않고 다시 돌려주셨다.

그 남자는 우리를 잠깐동안 노려보고는 자전거를 살피러 들어가 버렸다.
아버지와 나는 돌아서서 현관 아래로 걸어 내려왔다.
나는 아버지의 소매에 매달려 울먹이며 말했었다.
"아버지, 왜 저런 사람에게 그렇게 너그럽게 대하세요?
그 사람은 정말로 예의도 없고 비열하잖아요."

아버지는 계속 걸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마도 그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 그 일을 다시 떠올릴지도 모른단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묵묵히 옅은 황혼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론 결코 다시는 그 자전거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어 기억이 희미해진 먼 옛날의 그 장면이
다른 사람에 의해 또 다시 떠오르게 되었단다.
그것은 자전거 사건이 있은지 이미 오랜세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나는 약간의 사소한 행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근처의 교도소를 방문한적이 있었다.
교도소의 대기실에 않아 기다리는 동안에
죄수들의 명단에서 예전에 내가 가르쳤던 제자 한 명을 발견했다.
그 아이는 술이 취해 심한 난동을 부리고 기물을 파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그때 그 아이는 이미 초범이 아니었다.

나는 평소에 그 아이를 좋아했었단다.
그 아이는 항상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환하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녔었고,
그 미소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친절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이 언제나 그 눈가에 숨어 있는 듯이 느껴졌었지.
그 아이에게는 애초부터 가족이 없었다.
보육원에서 성장하여 떠돌이 여관생활에 이르기까지 항상 소외된 존재로 인생을 보냈었지.
그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했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필요없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교도관에게 그 아이를 잠시 면회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교도관은나를 데리고 연속적으로 이어진 단단한 철문들을 통과했다.
그 철문들이 내 등 뒤에서 꽝하고 닫힐 때마다 약간의 공허한 울림이 여운으로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형광등이 활기없이 빛나고 있는 어떤 비좁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요" 하고 교도관이 말했다.
잠시 후 교도관은 그 방에 나의 제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안녕, 크리스." 내가 먼저 인사를 했지만 크리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무엇엔가 놀란 듯이 깜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녀석은 좀 거칠기 때문에 깜깜한 독방에 들어가 있습니다.
빛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약간 필요할 겁니다."
나를 안내한 교도관이 말했다.
교도관이 밖으로 나가자 크리스가 나를 쳐다보더구나.
그때, 그 아이의 입술은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지.
"제발 부탁이예요, 선생님. 날 그 방으로 다시 돌려보내지 못하게 해 주세요.
이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힘좀 써주세요. " 크리스가 말했다.
그 아이의 눈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순수한 어린 아이의 눈이었다.
"제발!" 그 아이는 다시한번 말했다.
나는 이전에 그 애가 다른 어떤 사람에게 '제발'이라고 말하는 걸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잠시동안 그 아이를 주시했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아이의 눈동자뿐이었다.
"그래," 내가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한번 힘써 보마."
그 아이의 입술이 다시 한번 부르르 떨리고는, 내게 씩 웃어 보였다.

나는 교도관들과 접촉하여 크리스의 보석을 신청했다.
그들은 필요한 절차를 끝내고는 크리스의 옷을 돌려주었다.
나는 몇 장의 서류에 서명을 한 후에 그 아이를 내 차로 데려갔다.
그 아이한테 햄버거도 사주었지.
그런 후에 그 아이가 머물고 있다는 숙소까지 차를 태워주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할 때쯤에 그아이는 다시
예전의 으시대는 태도와 허세로 가득차 재잘거리고 있었다.
내가 차를 멈추었을 때 그 아이는차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또 봐요."그는 건방지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버렸다.

다음날 나는 크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말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화가 나서 나에게 한바탕 훈계를 시작했다.
"난 자네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자넨 그 녀석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칠게 행패를 부렸던 것처럼
자네에게도 거칠게 대하도록 그냥 내버려뒀단 말인가.
그 감옥 안에서 단단히 썩도록 그 녀석을 그냥 내버려 뒀어야만 했어.
도대체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 보며 이렇게 대답했지.
"아마도 그 아인 어느날 갑자기 그 일을 다시 떠올릴지도 모른다네."
나의 친구는 포기했다는 듯 머리를 가로 저었고 자기 일을 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몇 마일 떨어진 집에서는 나의 아버지가 텔레비젼 화면을 멍하니 주시하고 계실테지.

출처 : 好學의 智慧硏究所
글쓴이 : 잔잔한 호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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