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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애인 이야기

 

결혼식 날, 식이 다 끝나가고 있지만, 내 친구 형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결혼식 내내 형주의 얼굴을 찾았지만, 정말 보이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사진 촬영까지 마치고 다시 예식장 로비로 나와 형주를 찾았지만 끝내 형주는 보이지 않았다. 섭섭함 보단 걱정이 앞선 순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형주의 아내가 예식장 계단을 급히 올라왔다. 이마에는 얼마나 뛰어왔는지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석민 아빠는 오늘 못 왔어요, 죄송해요. 석민 아빠가 이걸 전해드리라고 해서..' 형주의 아내는 미안한 듯 조심스레 봉투 하나를 건넸다.

'철환아, 나 형주 내 아내의 눈동자에 내 모습도 담아 보내마.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리어카 사과 장수 친구이기에 이 좋은 날, 너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어제 아침부터 자정까지 사과를 팔았다. 번 돈이 만 삼천 원이다. 아지랑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날, 우린 흙 속을 야무지게 뚫고 나온 새싹을 바라봤었지. 그리고 희망을 노래했어. 나에게 너와의 행복한 추억이 있다는 게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지금 난, 참석하지 못하는 미안함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 글을 쓰고 있지만 가정을 이루는 네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만은 기쁘다. 아내 손에 사과 한 봉지 들려 보낸다. 지난 밤 노란 백열등 아래서 제일로 예쁜 놈들만 골라냈다. 신혼여행 가서 먹어라.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

편지와 함께 들어 있던 만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세 장.... 뇌성마비로 몸이 불편한 형주가 한 겨울 거리에서 추위와 바꾼 돈, 만 삼천 원. 나는 웃으며 사과 한 개를 꺼내 들었다. "형주 이놈, 왜 사과를 보냈데요." 장사는 무엇으로 하려고... 그리곤 씻지도 않은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댔다. 그런데 왜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걸까. 새신랑이 눈물 흘리면 안 되는데..

- 연탄길 < 행복한 고물상자> 저자 이철환 -

 

가슴이 찡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일 뿐 이들의 현실은 답답합니다. 그래도 어쩌면 뇌성마비 장애인의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잘 사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아내도, 자식도 그리고 이렇게 마음을 나눌 친구까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밖에 외출조차 하지 못하고 반려동물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밖으로 나와도 사람들의 시선을 이기는 일이 더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갇혀 사는 쪽을 택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 분들의 아픔을 우리는 너무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복음으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바로미터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죽은 후의 이루어지는 구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받은 하나님 나라라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사회입니다. 그곳은 전혀 다른 관계들로 이루어진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사회입니다. 우리는 소외가 없는 인간 사회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회가 가능하고 그 사회가 바로 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곳에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구분도 사라집니다. 근본적으로 장애가 사라지는 곳일 뿐 아니라 장애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무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이유가 되는 곳, 그래서 서로가 함께 어우러져 삶을 생생하게 축하하는 모꼬지가 되는 것,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나라에 대한 예고입니다. 평화의 왕이 통치하는 평화의 나라, 예수님에 의해 확연하게 드러난 그 나라의 모습이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오래 전에 이리도 생생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배경과 상황

 

스가랴는 주전 520-518 사이에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유다 사람들을 상대로 활동하였습니다. 1:1을 보면 "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리오 왕 2년은 주전 520년 입니다. 또 7:1에 보면 다리오 왕 제 사년 아홉째 달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해는 주전 518년이 됩니다.

 

스가랴는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로 소개 됩니다. 느헤미야 12장을 보면 바벨론에서 귀환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명단이 소개되고 있는데 16절에 "잇도 족속에는 스가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름이 선지자 스가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스가랴는 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이며, 유력한 제사장 가문에 속한 상류층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접근할 수 있었고(슥6:9-12), 정치 지도자인 총독 스룹바벨과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슥 4:6)

 

학개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고, 학개가 하나님을 최우선에 둘 것을 촉구함으로써 종교적 각성을 일으켰다면, 스가랴는 동족들의 성실성에 호소하면서 미래에 대한 약속을 선포함으로써 학개가 시작한 운동을 심화시켰습니다. 그는 학개보다 더 멀리 종말론적 희망까지 내다보았고 그것이 신약에서 예수님의 성취로 드러났습니다. 물질적 어려움과 고통으로 인해 깊은 회의와 절망감에 빠진 공동체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구체적으로는 성전의 재건과 예배의 회복이 그것을 이기는 길이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스가랴가 활동하던 포로기 이후 당시 유다 백성들의 삶은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신앙적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미래의 소망과 현재의 고난 사이에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조국의 영광이 아직 실현되지 못한 현실에 깊은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의 그런 실망감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인 결속력도 갈수록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스가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으로 돌파구를 제시합니다. 스가랴 9:9-10은 새로운 미래를 여는 새로운 통치자인 "메시아"를 예고하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의존하는 평화의 왕에 대해 선포합니다.

 

평화의 왕의 인간적 특징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9)

 

본문은 시온과 예루살렘을 향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표현문구는 시온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의인화 한 것입니다. 스가랴는 전령의 입장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메시아를 향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권고합니다. 그 메시아는 평화의 왕으로서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공의로운 사람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는 공의로 통치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공의로운"은 히브리어로 '차디크'입니다. 차디크는 이상적인 왕의 통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정의를 수행하는 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오해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공평한 사회입니다.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는 사회입니다. 더 쉬운 오늘날의 말로 하면 하나님의 정의로운 사회는 갑질이 없는 사회입니다. 가진 자가라고 해서 가난한 자를 무시하지도 않고, 힘센 자라고 해서 약자를 못 살게 굴지도 않고, 비장애인이라고 해서 장애인에게 무시의 눈길을 보내거나 함부로 동정의 눈길을 보내지 않는 사회입니다. 모두가 한데 어울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소유만큼 다른 이들을 섬기며 함께 서로를 사랑하며 생생한 인간의 삶을 살도록 하는 사회입니다. 창조의 본연의 모습으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사회가 바로 하나님의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인 메시아는 공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구원을 베푸시며"라고 나와 있습니다. 물론 평화의 왕인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고통과 절망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원문을 보면 히브리어 동사의 나팔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동태입니다. 그러므로 그 단어는 '구원 받다'라는 수동적 의미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적 왕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께 의지하는 왕이며,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왕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철저히 수동적인 평화의 왕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왕은 김일성이나 후세인과 같은 통치자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한 번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바라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을 닮았는가 아니면 김일성을 닮았는가를 말입니다. 만일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을 보고 예수님을 닮았다는 생각이 드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예수님을 정말 잘못 이해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말해 탄생부터 죽음까지 철저하게 무력無力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분은 한 번도 힘을 추구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또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심지어 자신의 사역이 자신에 의해 주도되는 것조차도 피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늘 기도했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 그분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분의 무력함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 예수님의 무력함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활로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구원을 받으셨습니다.

 

셋째, 그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겸손한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아니'는 문자적으로는 '가난한'이라는 뜻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 단어는 정신적으로는 겸손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세의 온유함을 나타낼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평화의 왕인 메시아는 구원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 메시아는 동시에 겸손한 자입니다. 그래서 이 메시아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만 움직입니다. 그의 통치의 성공 여부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신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도, 사역과 통치를 하는 데 있어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모습이 사실은 하나님의 전능한 신적 용사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입니다.

 

이 평화의 왕인 메시아는 나귀 새끼를 탑니다. 그냥 나귀도 아니고 나귀새끼입니다. 크고 건장한 백마를 타지 않는 이 모습이 바로 겸손한 평화의 왕의 모습의 백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나귀 새끼의 등에 겉옷을 걸치고 왕으로 등장하는 모습은 매우 희화적입니다. 마치 벌거벗은 왕처럼 우스꽝스런 모습입니다. 우리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나귀새끼는 겸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찍이 창세기에서부터 예고된 왕의 모습입니다.(창49:10-11 참조) 유다의 후손 가운데 태어날 왕은 나귀 새끼를 탈 것임이 예고되었습니다. 분명 스가랴가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는 온 열방을 다스릴 왕으로 올 것이지만, 그는 나귀 새끼를 타는 비천한 신분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말씀들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요? 백마를 타는 정도가 아니라 바벨탑을 지어놓고도 그것이 모자라 헐떡이는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만일 그런 분들이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정말 안다면 처음부터 그런 길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속아 엉뚱한 길을 가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며, 무엇보다 그들에게 진정한 복음의 빛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평화의 왕의 통치의 특징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10)

 

첫째, 하나님이 평화의 왕과 더불어 때로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전쟁 무기를 파괴할 것이다.

 

"병거", "말", "활"은 모두 전쟁의 필수 무기들입니다. 이런 무기들이 제거된다는 것은 전쟁의 종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상징이며 평화의 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우리가 아는 평화는 힘의 평화뿐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평화는 오직 힘으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묶어 놓은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평화입니다. 하지만 평화의 왕의 평화는 힘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 비폭력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평화입니다. 십자가는 무력함의 상징입니다. 힘을 가진 자에 의해 소멸되어버리는 것으로 보이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참혹하고 무력한 십자가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던 평화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진 평화는 아무도 희생당하지 않는 전혀 다른 종류의 새로운 평화입니다.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 새로운 평화는 이 땅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만들 것입니다.

 

둘째, 평화의 왕은 이방 사람에게도 평화를 전할 것입니다.

 

평화의 왕인 메시아는 이방 사람들에게 '샬롬'을 전함으로 다툼과 분열의 사회를 샬롬의 상태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샬롬이란 축복 혹은 온전함을 뜻합니다. 이 말씀을 이사야 2: 4절과 미가 4:3의 예언과 일치합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사 2:4)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미4:3)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시작된 평화의 왕의 통치가 전 세계로 확장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평화의 왕은 온 땅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장차 도래할 평화의 왕의 통치 영역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그리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입니다. 여기서 "바다에서 바다까지"라는 표현은 땅의 사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다고 보았던 고대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 세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적 왕의 통치 영역은 온 땅에 미칠 것입니다. 이 왕은 온 땅을 다스리는 우주적 왕권을 수행할 것입니다. 메시아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는 없습니다. 메시아의 통치는 모든 지역에서 실행됩니다. 결과적으로 온 세계에 평화가 실현될 것입니다.

 

평화의 왕 예수가 통치하는 나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예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무력武力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온전히 무력無力하게 체포당한 후 끌려가셨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력無力해 보이던 십자가가 세상의 모든 무력武力을 무장해제 시키고 이 땅을 평화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력武力으로 무력無力을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무력無力으로 무력武力을 대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무력武力을 사용하지 않는 분이시고, 오히려 힘을 포기하시는 분입니다. 힘을 내려놓음으로 말미암아 상대의 힘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힘마저 무력無力화시키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평화의 왕이신 진정한  메시아의 통치입니다.

 

신학자 톰 라이트는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 유다로부터 시몬 벤 코시바에 이르기까지 예수 당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그 밖의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길은 평화의 길, 십자가의 길이라고 선포했다. 원수의 무기들로 하나님 나라의 싸움을 싸우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 하나님 나라를 원칙적으로 상실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 나라를 곧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초대교회는 힘으로 지배하고 군림하는 세상적인 논리나 십자군의 논리가 아닌, 힘을 내려놓고 섬기고 희생하는 십자가의 논리를 실천함으로써 세상의 방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참된 평화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일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강자의 힘의 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섬김만이 궁극적으로 평화를 성취할 수 있음을 깨닫고 이를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만드는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힘의 부재를 통해 만드는 세상입니다. 인간의 모든 힘을 내려놓는 곳에서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이해하기 어렵고, 인간이 선뜻 받아드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복음을 보고 어리석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도 꺼릴 수밖에 없습니다. 망설여지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하고, 선택하고, 용기를 내야합니다. 낙하산 없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 수영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 물로 처음 뛰어들 때의 두려움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아직 복음의 삶 속으로 뛰어들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두려움과 막막한 절망의 순간 우리는 암탉의 날개 아래 있는 병아리와 같은 평화를 경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난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쓴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미국은 장애인들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상대적으로 물질적 복지가 잘 되어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미국에 사는 장애인들도 여전히 친구가 없어 외롭기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이다. 자동차 문화와 개인주의 때문에 더 외롭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듯이 장애인도 물질적 복지만 가지고 살 수 없다. 친구와 존중과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예비 장애인들이다. 장애인의 날을 맞이하여 장애 때문에 불편하게 살아가는 분들을 더 많이 생각하길 원한다."

 

장애인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미국도 장애인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장애인의 날을 맞이하여 장애 때문에 불편하게 살아가는 분들을 더 많이 생각하는 일로도 장애인의 소외를 해결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장애인의 문제는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거기서 그들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아니라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구심점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특별히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평화의 왕과 그분이 통치하시는 평화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세상을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며, 장애우들을 비롯하여 인간의 모든 상처를 보듬어 안아 고치시는 하나님의 치유하심입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우리의 이기심과 현실에 급급한 안목으로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를 넘어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맛보아 알아 위대하신 그분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찬양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어지니♡
글쓴이 : 늘 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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