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에서의 부활절 예배
일부 기독교 단체에서 팽목항을 찾아가 종교적인 행사를 한다는 기사를 보고 이 목사라는 분이 그것에 반대하는 칼럼을 썼습니다. 그는 먼저 이런 내용을 전제로 하였습니다.
"먼저, 저도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또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자체도 그렇지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책임 있는 자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정부의 관련자들은 희생자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신, 불신을 막론하고 귀를 막고 있는 자들에 대한 저항운동을 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봅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각자 형편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그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절기를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설령 그것이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정통 교회가 할 일은 아니라고 이해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에서 발생한 특정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시대의 건전한 교회들에서는 기독교 절기를 그런 식으로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이어나갔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세월호 침몰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을 연관 지어 종교적인 행사를 주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 종교인들이나 할 법한 일이다. 성경은 결코 그와 같은 종교 행위를 하도록 허용하지 않으며 참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연관 지어 종교 행사를 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순수하게 따르는 성숙한 신앙인들이라면 그와 같은 행사를 주관하지 않는다. 교회가 기억해야 할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에서 발생하는 참사와 연관 지어 기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칼럼의 SNS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론의 글을 썼습니다. 그 중 박득훈 목사는 이런 반론을 제기하였습니다.
"첫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분명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은 고난과 슬픔의 현장이라는 점입니다. ... 팽목항을 비롯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함께 모여 슬퍼하는 현장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 그분께 예배드릴 수 있는 오늘의 갈릴리입니다. 광화문 부활절 연합 예배에서 실종자 허다윤 양의 어머님은 "제발 이젠 실종자 가족에서 벗어나 유족이 되게 해 달라"며 슬픔의 고통스러운 무게에 짓눌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흐느껴 우셨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와 교회는 그녀의 슬픔과 억울함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아니 비난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그녀 곁에 가까이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녀와 함께 울며 예배드릴 때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 혹은 가족과 함께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고 돌보고, 팽목항을 찾아 그 역사적 의미를 찾고 억울하게 죽임당한 이들을 기억하는 일은 모두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신앙적으로 해석해 주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곁에 있다는 걸 공적으로 말해 주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야말로 진실을 은폐하려는 권력에 실질적인 항거와 도전이 됩니다. 그런데 전자는 허용하면서 후자는 안 된다고 말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기에 혹시 우리의 위선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요? 또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교회 교인 중에 한국의 행정, 입법, 사법부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교인이 있다면 그들에게 권력의 편이 아니라 희생자 가족의 편에서 세월호 사건을 의혹 없이 밝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권면하는 일도 멋진 일이요 중요한 일입니다. ... "
두 사람의 의견이 반대로 치닫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 목사의 글을 들으며 여러분들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박 목사의 글을 읽으며 또 그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용이 정 반대인 이 두 내용이 다 옳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생각이 드는 여러분들이 잘못된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저의 의견이 궁금하실 것입니다. 아니 이미 저의 생각은 두 번째 글과 같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입장을 조금 뒤에 밝히겠습니다.
이 논쟁을 보면서 떠 오른 성경이 아모스서입니다. 소선지서 가운데 아모스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가끔씩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5:24)
오늘날 기독교에 꼭 다시 회복되어야 할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어지니교회와 성도들이 그 일에 한 몫을 담당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입장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모스
아모스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아마도 그는 여로보암 2세의 전성기였던 주전 760년경에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안정과 함께 경제적인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왕하 14:23-29) 육로와 행상에 걸쳐 국제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암6:13)포도주와 곡식을 팔아 부자가 된 신흥계급이 생겨났으며(암8:4-6), 사치스런 여름 별장과 겨울 별장도 등장했습니다. (암3:15) 이런 집들은 고가의 수입품인 상아제품들로 장식되었습니다.(암6:4)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빈부격차가 심해져 사회적 양극화가 극에 달했습니다. 위화감이 조성되고(암2:6-7)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보호자가 되어야 할 사법부조차도 뇌물에 매수되어 약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사라졌습니다. 어디 가서도 그것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암5:10-12) 겉으로 드러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최상이었지만 안으로는 사회적 불의와 도덕적 타락으로 썪어 문드러져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8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성읍 드고아 출신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모스는 남 왕국 유다 출신으로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활동을 한 것입니다. 그는 본디 양을 치고 뽕나무를 가꾸는 자였습니다. (암7:14-15) 목자라는 말에 '노케드'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비교적 부유한 목축업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부패한 이스라엘에 맞서 그것의 종말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아모스는 "정의의" 선지자 혹은 예언자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본문의 배경
본문은 보통 "제의 비판"이라고 불리는 부분입니다. 소선지서 가운데 최초의 문서인 아모스가 첫 포문을 연 이 "제의 비판"의 주제는 이후의 선지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1:10-17, 미 3:9-12, 렘 7:1-15 등) 본문의 내용은 4:4-5와 관련됩니다. 먼저 그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 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가서"라고 옮긴 히브리어의 원뜻은 "오라"입니다. 이 말은 본래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성소로 오라고 초대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길갈과 벧엘이라는 두 장소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벧엘은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던 중 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곳에 돌단을 쌓은 후 예배를 드렸던 곳입니다. 물론 그 뜻도 하나님이라는 '엘'과 집이라는 '바이트' 혹은 '베이트'가 합쳐진 말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많은 교회들에게 붙여졌던 이름입니다. 이런 전통의 장소인 벧엘은 이후 분열왕국 시대에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 1세가 단을 쌓은 곳이기도 합니다.
길갈은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진입하여 처음으로 진을 친 곳입니다. 그리고 요단강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돌을 가져다 이스라엘 언약궤가 요단강을 지날 때 그 물이 갈라졌던 것을 기억하도록 그 열두 개의 돌을 길갈에 세웠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능하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이스라엘이 영원히 그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에게 성소가 되었고 당시 제사장들은 그런 성소에 가서 제사할 것은 권고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너무도 이상합니다. 그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도 맞는 말인데 그것을 "범죄하며""죄를 더하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패러디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려 너희 죄를 속하라"는 말 대신 "죄나 실컷 짓고 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소가 죄를 씻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죄를 더하는 자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를 향해서 아모스가 말한다면 "교회에 가서 싸움질이나 실컷 하고 오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소를 찾으라는 말은 거룩한 곳을 가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룩한 분"을 만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5:4-5절 말씀은 그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변질된 예배는 하나님과는 무관한 종교놀음 또는 형식주의에 빠져 자기만족을 추구하도록 만듭니다. 오늘날 하루 잠깐 짬을 내서 교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있으나 진정한 예배가 없는 삶, 그것이 바로 북 이스라엘의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박 목사님이 한 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분명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은 고난과 슬픔의 현장이라는 점입니다"라는 말은 설득력이 있는 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간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 지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예배
1) 절기와 성회의 거부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는 절기와 성회를 거부하십니다. 절기와 성회는 이스라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예배의 기본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여기에서 사용된 '멸시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 '마아스'는 '버리라는 의미로 심각한 거절을 표현하는 경우에 사용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강한 거부감을 드려내 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버리심은 하나님에 대한 배반과 반역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절기 거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거부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절기와 성회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그들은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각종 절기 헌금을 빠지지 않고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그러한 예배를 거절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드리는 절기와 성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즐기는 의례적인 행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아니라 자신의 뜻과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결국 예배가 자신을 섬기는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2) 제사의 거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사 자체를 거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2)
여기서는 세 개의 전통적인 핵심 제사인 번제, 소제, 그리고 화목제까지 모두 거부됩니다.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에서 "받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라차"의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드리는 모든 제사를 합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제사를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사에 담겨 있어야 할 참된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3) 찬양의 거부
그리고 노랫소리와 비파소리마저 거부하십니다.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3)
이들의 노래와 악기에서 나오는 음악은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 한낱 소리에 불과합니다. 이 소리라는 말 '하몬'은 전쟁의 소리, 혹은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소리를 낼 때 생기는 소음과 같은 말니다. 결국 거부하시는 모든 것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코를 막고, 눈을 닫고 귀를 막아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작자들이 하는 일체의 형식적인 제사행위가 꼴 보기 싫어 하나님께서 엄청 괴로워하고 계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당신을 향해 드려지는 예배를 오히려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의 자리가 하나님을 고문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4) 공법과 공의의 실종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배의 결과는 반드시 정의와 공의로 드러나야 합니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은 더 괴로워하시고 오히려 그 예배 때문에 화가 나십니다. 정의'미슈파트'와 공의'체다카'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없는 예배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니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의와 공의는 동의어로 쓰였으므로 그 둘의 뜻을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교회와 사회의 공동체 의식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자들의 예배는 하나님과 무관한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새 사람
한 사회의 정의와 공의의 척도는 그 사회의 약자들이 얼마나 제대로 보호되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약자들의 탄식이 그치지 않는 곳에서 드리는 예배는 무익한 허례허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오늘의 본문이 '제의 비판'의 효시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제 그 결론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종교적이며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다고 믿는 제사 혹은 예배를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배척하시고, 비종교적이고 세속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정의와 공의가 하나님의 일차 관심사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제사법이 윤리 혹은 도덕법보다 앞서지 못함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윤리적 도덕적 삶이 종교적 의식보다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윤리적 삶으로 대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와 도덕적 삶이 분리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제가 번역하고 있는 책이 에베소서 주석입니다. 그 책을 번역하면서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목격하게 됩니다. 바울 서신에서 믿음 혹은 교리와 도덕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는 어떤 간격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설명이 끝나면 반드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와 함께 윤리적인 권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는 새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에베소서의 경우는 그 내용의 분량이 똑같습니다. 앞의 3장은 교리적인 해설이고 뒤 3장은 윤리적인 권면입니다.
예배와 윤리, 믿음과 도덕적 행함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결코 구원이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은 반드시 선한 일을 통해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번역 중에 '새 사람의 창조는 세상 한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다.'라는 말이 제 마음에 와서 꽂혔습니다. 그렇습니다. 새 사람의 창조는 지금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내 삶은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내 삶은 새 사람으로서 선한 일을 위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적과 방향이 없는 개인적인 수양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향과 목적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의와 공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늘 말씀드리는 성령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의 사람들을 나와 똑같은 형제와 자매로 대해야 합니다. 그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내 것과 똑같이 느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기서 소유의 포기는 오히려 하찮은 것입니다. 참된 공감과 긍휼은 반드시 십자가라는 자기희생까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함 삶이 교회의 벽을 넘어 우리가 속한 사회를 향해서도 똑같이 이어져야 합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일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입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몽상가들의 착각이 아닙니다. 예배는 바로 그 몽상가들의 꿈처럼 보이는 일들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을 공급해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와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우리의 불가능을 당신의 능력과 풍성함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 바로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의 말씀이 팽목항에서의 부활절 예배에 대한 저의 대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불행은 복음의 삶을 교회 안에 가두어 놓은 인간 탐욕의 자연스런 결과물입니다. 아모스가 질타한 이스라엘의 제의 비판이 오늘날 교회 예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탐욕을 합리화하여 결과적으로 자기를 경배하고 있는 어리석은 예배가 하나님 없는 교회를 만들었고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들의 이전투구는 오히려 당연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도 예배와 정의를 어우러지게 하는 새 사람의 선한 일을 등한시 한다면 우리는 기존의 교회들의 이전투구에 더해 비판이라는 들보를 하나 더 우리 눈에 넣은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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