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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

 

먼저 짧은 글 하나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 VIP 손님들께 최고 품질의 달걀을 대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유용 교수님께서 10주간 정도 매주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손님들은 달걀 요리를 참 좋아하십니다. 달걀 프라이, 삶은 달걀 찐 달걀 계란말이 달걀찜 등등입니다. 우리 손님들은 험한 노숙생할을 하십니다. 가장 먼저 치아가 상합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음식을 참 좋아합니다. 치아가 부실한 분들이 희한하게도 익힌 계란 프라이는 싫어하십니다. 꼭 완전히 익혀달라고 하십니다. 계란 프라이를 몇 개 해드릴까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이 하나민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두세 개를 해드리면 정말 고마워하십니다. 체면 때문에 두세 개 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십니다. 치아가 하나도 없는 할머니는 계란 한 판 나눠드리면 온 세상을 다 얻은듯 좋아합니다.

 

서영남 대표님의 글입니다. 이런 서대표님의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하지만 그냥 마음이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그분처럼 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건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갖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마도 머지않아 그런 기회가 올 것입니다. 아내는 늘 저에게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느냐는 채근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서대표님이 이렇게 일하실 수 있는 것은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0여 년을 수사로 살면서 그분은 여러 면에서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수사를 그만두고 세상으로 돌아온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제가 오로지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분이 알하시기 시작하면 저도 그분을 따라 일하게 될 것입니다. 돌아보면 이제 저도 많이 변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무척 강해졌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불만도 없는 제 삶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저의 모습이 무책임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을 빚어 만드시는데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십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주님처럼 산다는 것이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주님을 닮기 위한 열정뿐만 아니라 실제로 주님의 마음이 품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짧은 글에서 서영님님의 마음을 보고 그 마음이 주님의 마음임을 느끼기 때문에 이 분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치아가 상한 분들을 보는 이 분의 마음에서 주님의 아픈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성하지 못한 치아를 가지고도 잘 먹을 수 있는 달걀을 좋아하는 그 분들에게 달걀을 줄 수 있게 되어 기뻐하는 마음 역시 예수님의 마음을 꼭닮은 긍휼한 마음입니다. 두 개를 차마 달라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소중하게 드러내는 그 마음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제가 민들레국수집 대표 서영남 사장님에게 가지고 있는 이런 느낌들은 아직 그런 일을 시작도 하지 못한 사람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그 마음을 느끼고 볼 수 있게 된 초보 하나님 백성의 마음입니다. 이 말은 누구라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가 똑같이 혹은 비슷하게 느끼게 되는 마음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저만의 생각이나 마음이 아니라 신실한 주님의 백성들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공통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서영남님은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노숙자분들을 VIP 고객으로 모시면서 단순하게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는 인생 막장에 다다른 그들에게 그들이 실제로는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존엄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삶을 생생하게 살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민들레 국수집 주변이 아름다운 하나님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선이나 인간의 호승심에서 나오는 생색내기 봉사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본연의 모습,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잔치가 아니라 천국의 잔치이며, 세상 한 복판에 복음의 꽃을 피워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저 역시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꿈에 여러분들이 꼭 동참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그리스도인의 갈림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 앞에 두 갈레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사는 길입니다.

 

세상의 생명

 

우리는 요한복음을 묵상해 왔습니다. 순서대로라면 13절을 보아야 하는데 오늘 본문은 중간을 건너뛰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 머릿속에 51절 말씀이 강렬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도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나아가 우리가 주목해야할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단순히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명이 세상을 위한 것임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우리 자신만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주어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은 동시에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영원한 생명을 받은 우리의 삶의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영원한 생명을 받아 안심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세상을 위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실이 제게 더욱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죽음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라는 현대의 삶의 방식은 탐욕을 정당화하고 가진 자들의 횡포를 당연한 것으로 감싸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진 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조금이라도 가진 자는 자신만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횡포를 부립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부당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막상 자신이 높은 자리에 서게 되면 자신도 세상의 방식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기 아래로 보이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짓밟습니다.

 

나이가 중년 이상인 사람들에게는 역전의 기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집도 살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상승의 기회가 보장되었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그래서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희망이 되는 속담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에게 위로 올라가는 길이 닫힌 것은 이미 오래전 일입니다. 더 이상 상승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닫힌 문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부모의 권력을 등에 업지 않으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힘과 권력을 장악한 대기업들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자녀만을 골라 뽑기 때문입니다. 실력을 갖추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런 사람들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태여 정규직으로 뽑아 많은 돈을 지불할 필요도 없습니다. 비정규직으로 뽑아도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는 아르바이트 외에는 아예 취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 박탈당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삼불'이라 하여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할 수 없는 암울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Ecocide'라는 단어가 생겨났습니다. 경제와 자살이라는 말이 합쳐져 경제적 이유 때문에 자살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것은 이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다리 밑에 그물을 쳐좋았고,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뛰어내리는 바위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 놓고 거기에 다시 한 번 생각하라는 표지를 세워놓았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한강 다리 위에 생명의 전화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더욱 심각한 현상은 그런 세상을 원망하며 묻지 마 살인을 하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이곳저곳에서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총기 소지가 가능한 나라였다면 우리나라는 벌써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한 젊은이가 터키로 가서 국경을 넘어가 IS대원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아직 확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한 젊은이가 일정한 경제적 대가를 받고 거기에 합류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원망이 그를 죽음의 용병으로 만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한 젊은이의 정신 빠진 행동이나 미친 짓, 혹은 소영웅주의로 폄하해버립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번 그 젊은이의 입장이 되어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는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이 불공정한 세상을 한 번 뒤집어엎고 싶다는 생각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그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이 영웅이 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런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죽음의 문화가 창궐한 어두운 곳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얼마나 생명이 필요한지를 느낄 수 있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는 말씀이 허투루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서 시작된 생명의 나라입니다. 죽음의 문화 한 가운데서 생명을 꽃 피워내는 일,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서영남대표님의 글을 먼저 인용한 것도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노숙인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치아가 먼저 상하고 다른 모든 것이 상해가고 있습니다. 먹지 못해서 죽어가고, 술을 마셔야하기 때문에 죽어가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송곳같이 찔러대는 경멸의 아픈 시선을 받으며 그들의 인격이 손상되고 그들의 존엄이 사라지면서 한 걸음씩 몸과 영혼이 죽음을 향해 내몰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죽음의 문화가 장악하고 있는 어두운 곳이라는 자각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을 먹고 우리는 어두운 세상 한 복판에 생명의 꽃을 피워내라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필연적으로 생명 운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들레 국수집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 저만의 특별한 소명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떠나는 제자들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도 오늘날과 같이 죽음의 문화가 창궐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식민지 수탈의 한 복판에서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선택받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그런 자신들의 삶이 편안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을 합리화시켜줄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 문둥병자들, 그리고 이방인들과 같은 단어들이었습니다. 주변의 죽어가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그들은 그런 합리화를 자신들의 삶의 방식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죽음의 문화 한 가운데 생명의 떡인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고 세상을 위한 생명이 되라시며,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제자들은 그분의 곁을 떠났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 (60)

 

그들은 보고 들었습니다. 성경기자는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제자라는 분명한 호칭을 붙이고 있습니다. 떠나가는 사람들은 단순한 무리 중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열두 제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전의 기록을 되짚어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고 (2), 예수님께 왔으며 (5), 예수님을 보고 "그 선지자"라 환호했고 (14),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살 수 있고, 그것이 단순히 그 자신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생명을 위한 것이라 말씀하시자 그들은 물러가 다시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66) 기사에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 가운데 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들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을 하기 전에 떠오른 것이 칼빈의 5대 강령 '튤립' 가운데 하나인 견인입니다. 그것은 한 번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은 끝까지 놓지 않으신다는 교리입니다.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칼빈주의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거의 모든 개신교 신자들은 이에 대해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견인의 교리가 잊혀지지 않는 건 그것이 '이신칭의'와 함께 구원의 확신을 확실하게 유지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택하시면 결코 떨어지는 경우가 없다는 이 말씀은 연약한 인간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교리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동안의 확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도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따라 구원이 유지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외의 바울 서신서에서도 우리는 중간에 탈락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구원을 위해 끝까지 경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겠다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지만 중간에 돌아서서 세상을 향해 가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수가 너무도 적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확인했던 것처럼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은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이었습니다. 2만 명이 넘는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 곁에 남은 사람은 열두 제자와 기록에서 제외되는 여자와 아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 14)

 

떠난 이유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어렵다고 하면서 주님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해 이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어느 때입니까? 설교의 내용이 자기 마음에 합한 경우입니다. 설교의 내용이 맞다고 생각이 되어도 그것이 싫으면 우리는 은혜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자신을 찌르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자신도 언젠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분노가 치밉니다. 어디서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 사람 이단 같다는 말로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합니다. 본문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입니다. 듣기가 너무 거북한 이라는 헬라어 '스켈레로스'가 사용되었습니다. 단순히 너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대로 따라 하기에는 벅차고, 그러다보니 그것이 불쾌해지고 만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그 표현이 너무 모질어서 거북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 환영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6-27)

 

분명 우리가 그대로 따르기에는 너무 벅찬 것들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말은 너무도 생소합니다. 그만큼 복음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도덕적인 삶에 대한 요구도 그대로 실천하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5:29)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5:39)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4)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거칠고 너무 어려운 것들이 이렇게 산재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모질고 거북하게 들리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의 참뜻을 헤아리고 그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말씀들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깨달아 알 수밖에 없으며 어떤 성취를 이루더라도 이러한 말씀들을 충족할 수 없기에 말씀에 순종하면 할수록 겸손해질 수밖에 없고, 순종할수록 기쁨도 커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떠나간 제자들처럼 예수 믿기로 결심하고 따라나선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 이르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자기 부족의 한계를 깨달은 인간 앞에 펼쳐지는 선택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세상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45)

 

주님의 말씀은 추호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우리도 당신처럼 우리의 살과 피를 다른 이들을 섬기고 우리 자신을 대속물로 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생명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은 결코 영혼 구원이나, 개인 구원만으로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복음은 복음의 절반을 잘라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갈림길을 애초에 없애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활짝 열린 문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67)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떡을 먹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삶은 이제까지와 같이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이 죽음의 세상 한 복판에 생명의 삶으로 드러나 죽음에 내몰리거나 죽음의 문화에 절망한 사람들에게 희망의 기쁜 좋은 소식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물론 그 삶은 세상을 위한 생명의 삶이 될 것이며, 거기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의 살과 피를 내어주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종은 "진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진리는 관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좋은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관계를 이루어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 세상의 관계와 전혀 다른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동안 복음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진 삶을 살아왔는가를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가 먹고 마시며 숨쉬는 모든 순간이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장소와 방법이 다르겠지만 그 삶은 서영남님과 비슷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우리 모습 속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것입니다. 팍팍한 현실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세상의 생명으로 피어날 우리의 꽃을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어지니♡
글쓴이 : 늘 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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