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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표적

 

작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M교회 K목사님은 대한민국을 정신차리게 하려고 세월호를 침몰시키셨다고 말해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 이전에 K교회 K목사님은 뉴올리온즈에 카트리나가 들이닥친 것은 그곳이 해마다 동성애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쓸어버리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분들의 하신 말씀들은 분명히 틀렸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말을 통해 그분들의 아는 하나님과, 그분들의 신앙과, 그분들의 교양과 수준이 드러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이단들이 창궐하는 것은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회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하고, 자기들의 교회가 다른 교회에 비해 수준이 높고, 모범이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결코 영원히 온전한 교회로, 완성될 수 없는 미래로서의 교회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육신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지만 결코 완성된 교회의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최선의 노력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성령님이 함께 하셔도 우리의 교회는 영원히 온전히 완성된 교회로서 모범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실험의 기회이고 우리의 그런 노력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그런 겸손한 모습을 통해, 필연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우리의 나약함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시고, 그렇게 드러나는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포함하여 온 인류에게 빛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목사님들이 잘못된 것은 그런 자신의 한계, 그런 교회의 숙명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하나님을 대변하는 능력 있는 종이라 착각하면서 실상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들과 같이 되고 싶은 다시 말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자신들의 모임이 교회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들 때문에 이단들이 창궐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심지어 아무리 악한 것이라도 거기에 긍정적인 것, 선한 것이 섞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그런 잘못된 말들에도 옳은 것이 섞여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시대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요구하는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16: 2-3)고 반문하셨습니다.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 2)고 권면합니다. 시대의 표적, 이 세대와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땅콩 회항 사건과 백화점 모녀 사건의 여운이 지나가기도 전에 이번에는 어린이집 폭행사건이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동영상을 저도 보았지만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세게 때리면 아이가 한 번에 날라가버립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떨어진 것을 줍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는 다른 아이들은 어느새 모두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그 모습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전율할만큼 질서 있는 그 모습 속에서 지옥의 모습을 봅니다. 거기서 어린이집 교사는 얼마나 희열을 느꼈을까요? 그리고 그런 모습이 바로 신이 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예, 인간은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신이 된 인간의 모습은 언제나 사탄일 뿐입니다. 어린이집 교사든 교회의 목사든 신이 된 사람은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움직여가는 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언제나 지옥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 백성은 바로 그런 사회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 전철을 타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전철을 타면 저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가장 현저하게 눈에 띠는 모습은 핸드폰을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모습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바로 그들이 느끼고 있는 불안과 공포와 공허감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은 필연적으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 세대를 본받는 삶이 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자신의 방식을 주입시키고, 거기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모습을 정확히 그리고 있는 글을 하나 보았습니다.

 

누가 그러던데요

 

이렇게 우리는 모래 위에 성을 쌓은 것처럼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인생에 대해 어떤 확신도 없이 그저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주위에서 다 유치원 다니고 초등학교 다니니까 당연하다는 듯 자기도 따라가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도 그렇게 따라가고 결혼까지도 남들 가는 대로 따라 해서 삽니다. 나이 드는데 시집 안 가면 무슨 큰 낙오자가 되는 것 같고 시집가면 애는 꼭 낳아야 할 것 같고 낳으면 키워야 하지요. 또 언제 죽을지도 모릅니다. 또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죽으면 천당 간다, 극락 간다, 어쩐다 말들이 많습니다.


직접 가 봤느냐고 물어보면 누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합니다. 이렇게 인생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의해 살아지고 있기 때문에 인생이 꿈처럼 허망하고 뒤죽박죽인 것입니다.

 

정말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생각해 보면 일상이 분주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정작 돌아보면 알맹이가 없습니다. 제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둠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삶의 힘겨움이 제일 크겠지만, 삶의 의미 상실, 모욕 받고 상처를 받았던 기억, 경쟁과 실패,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거기에 뿌리박고 있는 분노와 우울함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런 내적인 어려움은 우리를 염려와 걱정덩어리로 만듭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실상 가장 영적인 요구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적인 어둠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비틀걸음으로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빛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거짓 빛'이 있습니다. 오징어잡이 배에 밝혀진 집어등集魚燈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깁니다. 집어등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오징어들의 운명은 죽음입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거짓 빛은 돈과 성공입니다. 사실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약속합니다. 실제로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들은 집어등의 불빛과 같습니다. 거짓 빛은 언제나 너무 밝아 오히려 상황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불빛 속에 함께 드리워진 낚시 바늘을 인식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돈과 성공은 마치 이카로스의 날개와 같습니다. 이카로스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함께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에 빠졌습니다.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라핀과 새의 깃털로 날개를 만들었습니다. 날개가 완성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절대로 태양 가까이 날아 올라가면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하지만 이카로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고 태양 가까이 날아갔다가 파라핀이 녹는 바람에 바다에 추락하여 죽고 맙니다. 날아오르는 쾌감과 성취감이 아버지의 충고를 잊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은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자가 지신을 쉽게 망각하는 존재입니다. 옛날이야기이지만 인간의 헛된 욕망과 오만이 빚어내는 비극을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위험한 세상입니다. 돈을 매개로 하는 관계가 얼마나 허약한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집어등처럼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속절없는 인생을 살게 합니다. 강력한 유혹, 그래서 저항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 (엡 4: 22) 옛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세상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거기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치열한 저항의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집어등의 황홀한 유혹을 물리쳐야 하고,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낚시 바늘을 보아야 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날개가 파라핀으로 만든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닌 불완전한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날아오른 만큼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그 쾌감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에 민감해야 할 것입니다.

 

참 빛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 빛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야말로 '참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밝게 비추고 또 포근하게 감쌌습니다. 하지만 어둠이 장악하고 있던 세상은 그 빛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휘황한 도시의 네온사인 속에서는 아프리카나, 사막 한복판에서만 볼 수 있는 쏟아지는 것 같은 하늘의 별들과 진짜로 흐르는 물처럼 보이는 은하수를 볼 수 없습니다. 그와 똑같이 거짓 빛에 사로잡힌 이들은 참 빛과 만나기 어렵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4)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빛을 보고 있습니까? 그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 5:6)

 

이 빛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이 말하고 있는 새 언약입니다. 그것은 다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내면의 빛에 눈을 뜬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빛으로 세상을 비쳐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의 모습과 우리의 겉모습과 소유를 보고 계급을 매기고 판단하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내면의 빛에 의해 파악해야 합니다. 단순히 정체성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삶의 순간마다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우리의 최종목표를 가리키는 북극성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 날이 흐려 잠시 방향을 판단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햇살이 빛나는 낮 동안에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진로를 영원히 잊어버릴 만큼 그렇게 오래도록 감추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길로 삼은 사람은 그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북극성을 따라 항해하는 선원과 같이 노련하게 그리고 목표를 놓치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가야 합니다. 애초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도, 중간에 절망해 고개를 쳐들 수 없게 된 사람도, 높이 날아오르는 자신에 매료되어 발밑에 펼쳐진 광활한 풍광에 시선을 빼앗긴 사람도 다시 고개를 들어 오직 한분이신 우리의 표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가 보게 될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그것을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34) 우리는 하나님을 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보고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그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희망으로님의 글을 통해 그분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들을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하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암담했으면, 그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숨을 못쉬는 상황이 발생했을까요? 간호사를 부르고 한동안 난리를 친 후 정신을 차린 그분들은 그러나 주님을 다시 바라봅니다. 오직 자신들의 소망이 그분 한 분뿐이심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인생의 막장에서도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힘이 듭니다. 그런 자신들의 상황이 원망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들의 희망마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추스르고 나면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자신들을 가둘 수 없음을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삶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지금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치열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죄사함을 받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참 모습입니다.

 

내면의 빛

 

조지 폭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영국 중부 레스터셔에서 방직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난하기에 많은 교육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신실하고 사려 깊고 침착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8세 되던 해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잃을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동안 튼실한 것으로 믿었던 삶의 터전이 밑바탕부터 흔들리는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슬펐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렇게 그의 내적인 고민이 극에 달했을 때 그는 성경을 꼭 붙들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한 분,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분만이 네 처지를 말해줄 수 있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마침내 의심의 어두운 밤이 물러가고 새벽이 동텄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게 된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은 간결했고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평화주의자로 주변에 평화를 짓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전쟁을 반대하고, 노예제도를 반대했습니다. 당연히 많은 박해를 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면의 빛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었습니다.

 

조지 폭스는 퀘이커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철저한 평화주의자로 살아가며 세상의 전쟁이 일어난 곳 어디에서든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함석헌 선생이 그의 인생 말년에 퀘이커를 알게 되어 그들과 같은 길을 걸으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손가락질해댑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마저 그들을 이단이라 정죄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삶이며 진정한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내면의 빛을 중시하는 그들은 오늘날 피상적이 되어버린 기독교의 귀감이 되어야 합니다. 폭력의 세상 한 복판에서 평화를 지어가는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여호와를 보여주는 참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화를 보면 '아우라'를 그려놓은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머리 뒤에는 거의 예외없이 아우라가 있습니다. 저는 이 아우라가 바로 내면의 빛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 어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것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분명한 실체입니다. 조지 폭스와 퀘이커에게서 저는 그 아우라를 봅니다. 희망으로님 부부에게서도 그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아우라를 여러분들에게서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

 

끝으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10세기경에 살던 브루노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대주교로서,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가 젊은 시절 수도사로서 훈련에 전념할 때였다.


어느 날 그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한적한 곳을 찾아서 작은 움막을 쳤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서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에 힘썼다. 어느덧 저녁이 되어 등불을 켜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움막 밖에서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개구리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도무지 집중되지를 않았다. 부르노는 움막 밖으로 나와서는 개구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야. 이 녀석들아! 수도사가 기도하려고 하는데 왜 이리 시끄럽게 떠드느냐? 너희들 때문에 내가 시끄러워서 기도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좀 조용히 해라.”


그러자 개구리들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일제히 잠잠해졌다. 브루노는 움막 속으로 다시 들어가 하던 기도를 계속 했다. 그런데 이제는 언덕 너머에서 잠자던 개구리들마저도 다 깨어나서 더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이었다. 브루노는 다시금 움막 밖으로 나와서 더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개구리들은 다시금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가 움막 속으로 들어가서 기도하려고 하면 개구리들은  또 다시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브루노는 나오고 들어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급기야 그는 너무나도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기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좀 더 깊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산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저 개구리들의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제가 도저히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저 개구리들의 입을 좀 막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때 번개같이 그의 머리속을 스쳐가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다.
“너는 왜 너 혼자서만 기도한다고 생각하느냐? 저 개구리들은 기도할 자격이 없고, 찬송할 권리도 없다는 말이냐? 저 개구리들을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아라. 너 혼자서만 기도한다고 하지 말고, 네가 저 개구리들과 더불어서 함께 기도하며 찬양한다고 생각하면 안되겠느냐?”


브루노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혼자만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개구리들이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밖으로 나와 감격에 찬 음성으로 개구리들을 향해서 외쳤다. “오, 개구리 형제들이여.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마음껏 소리 높여 하나님께 찬송하십시다.” 그랬더니 개구리들이 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이 더 큰 소리로 개굴개굴 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바로 이 모습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연출해내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 한 복판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갈 때 주님은 그런 우리들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고 말씀해주시지 않을까요? 더 이상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 기록하신 그분의 법을 보고 따를 때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 바로 그런 상황, 여호와를 알라고 외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을 연출하는 그분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잿더미 앉아 기왓장으로 몸을 긁어대야 하는 상황도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찬양하며 살아가는 새 언약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어지니♡
글쓴이 : 늘 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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