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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의 주석학적. 인간학적 이해
야훼는 나의 목자
시편 23은 야훼 하느님을 목자(牧者)로, 인간을 그 분의 양떼로 묘사한다.
성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하여 여러가지 이미지를 사용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가 목자와 양이다. 족장 야곱이 처음으로 하느님을
"나의 목자"(창세기48:15)로 부른 이래 여러 예언자들과 시편 저자들은 하느님을
목자로, 인간을 양으로 불러왔다. 하느님을 목자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위와
자비로운 통치를 나타낸다. 이점을 에제키엘(에스겔)예언자가 잘 보여준다.
주 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보고 내가 돌보리라. 양떼가
마구 흩어지는 날 목자가 제 양떼를 돌보듯이, 나는 내 양떼를 돌보리라. 먹구름이
덮여 어두울지라도 사방 흩어진 곳에서 찾아로리라.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내 양떼를 쉬게 하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상처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힘 나도록 잘 먹여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주겠다.
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하리라.(공동번역 에제키엘34:11~16)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도 목자로 불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양떼로 불린다.
나아가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착한 목자라 칭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목자라고, 그것도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요한10:11~15)
목자와 양떼의 관계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를 목민관(牧民官)이라 불렀고, 백성을 다스리는 법을 목민법(牧民法)이라고
샜다. 정약용 선생이 쓰신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일종의 정치학 원론이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은 물론 우리 문화에서까지도 백성과 그 백성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관계가 목자와 양으로 제시된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목자와 양. 목자의 임무와 양의 속성을 알 필요가 있다.
시편 23을 쓴 이는 다윗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목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젊은 시절
양을 키우며 살았던 사람이다. 그 누구보다도 목자와 양의 사이를 잘 알고 있던 다윗은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라고 노래하면서 자신이 목자로서 양들을
돌보았을 때의 체험을 상기했을 것이다.
다윗이 하느님을 목자로, 인간을 양으로 표현한 것은 목자와 양은 깊은 인식과 철처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계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목자와 양의 관계는
상호간의 깊은 인식에서 이루어진다. 목자는 양들 하나하나를 알고 있고 그 각각의
특성까지도 알고 있다. 우리같이 양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 그놈이 그놈처럼 보이지만 목자의 눈에는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구별되어 보인다.
목자는 어느 양이 아파서 비실대는지, 어느 양이 거센지, 어느 양이 항시 딴 기로 빠져
나가 애를 먹이는지 그 습성을 다 파악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점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ㅓ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요한10:14) 여기서
'안다'란 히브리어 동사 야다(yada)는 우리가 통상 이해하고 있는 '안다'와 다르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더불어 정을 통해 안다.'라는 뜻이다. 정신적인 일치와
더불어 성적인 일치를 의미할 때 야다라는 말을 쓴다.
이 단어는 다음 말의 '안다'의 뜻과 흡사하다고 보면 된다.
"어려서부터 이성을 너무 빨리 알면 안되지." 또는 "어려서부터 너무 빨리 세상을
알면 안되지"의 '안다.이다. 그러니 예수께서는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라고 했을 때 안다는 것은 당신이 우리를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들, 긍정적 부정적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정적인 모습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보아 주기 위해서이다. 하느님께서 헤매고 길 잃은 양을 찾아오고, 상처입은 양을
싸매주고 아픈 양은 잘 보살쳐 준다고 했듯이(에제키엘 34:11~!6) 착한 목자이신
예수게서도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보아 주시며 선을 이루신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있다."(요한 10:14)고 확언하신 예수께서는 우리 개개인을 알고
계시다.
(중략)
목자와 양, 상호간의 깊은 인식은 양떼들편에서도 이루어진다. 양들도 목자를 잘 알고
있기에 목자가 아닌 도둑이나 삯꾼을 따라 나서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요한10:16) 얼마나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화가 있다.
성서 공부를 하기 위해 팔레스티나에서 머물고 있던 한 신부가 양치기들의 삶과
양떼들의 생태를 알기위해 한동안 그들과 함께 살았다. 어느날 갑작스런 기상 변화로
심한 폭풍우가 몰아쳐서 양들을 동굴로 피신시켜야 했다. 그런데 그 부근에는 동굴이
하나 밖에 없어서 두 무리의 양떼가 한 동굴 안에 피신하게 되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동굴 안에 있던 그 신부는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비가 그치고 떠날 때
어떻게 이 많은 양떼들이 서로 섞이지 않고 자기들 목자를 따라갈까 하는 것이었다.
양들 엉덩이에 소유주를 표시하는 동장이 찍혀 있는 것도 목걸이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신부의 의문은 너무나도 간다하게 풀려버렸다.
폭풍우가 그치자 양치기 한 사람이 먼저 일어나 나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한 무리의 양떼들만 일어나서 그 목자를 따라가고, 다른 양떼들은 그대로 동굴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어 두 번재 양치기가 노래를 부르면서 나가니 나머지 양떼들이
일어나 그 목자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던 신부는 양치기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자기도 그들처럼 해보고 싶었기 떄문이었다.
노래를 다 배운 그 신부는 양치기더러 숨어 있으라고 한 다음 그 노래를 부르면서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간 뒤 양떼들이 따라오는지 보려고 뒤를
돌아보니 놀랍게도 한 마리 양도 따라오지 않는 것이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오는 것이지 멜로디를 알아듣고 따라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목자와 양의 유비(類比) 안에서 목자는 주님을 가리키고 양을 우리를 가리킨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듯이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다. 주님의
음성이 아닌 다른 음성을 듣고 따라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하신 " 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말씀은 단지 주님의 바람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다. 이 점도 양들의 속성을 통해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켈러(Phillip W. Keller)에 의하면 양보다 더 우둔하고 완고한 짐승은 없다고 한다.
좀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양들은 바른 길만 빼고는 어떤 길이든지 가는 완고한 짐승이고
길을 잃어버릴 줄은 알아도 집을 찾아서 돌아올 줄은 모르는 우매한 짐승이다.
이 완고함과 우둔함은 사실 우리 인간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모습이다. 다음 이야기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목자의 음성을 따르지
않는 완고하고 우매한 동물임을 보여준다.
어느날 번개와 벼락이 쳐 깻묵을 보관하고 있던 헛간에 불이 붙었다. 양떼들이 깻묵
타는 고소한 냄새를 맡고 달려와 빨갛게 불타고 있는 깻묵더미 앞으로 자꾸만 가려고
하였다. 이를 본 목자는 급히 달려가 양떼들을 불구덩이에서 떼어놓기 위하여 작대기를
휘둘러 댔다. 한 무리를 떼어 놓으면 다른 무리가 불을 향해서 달려들고 이러는 가운데
다행히 불길이 잡혀 양떼들은 살긴 살았지만 뜨거운 불기운 때문에 얼마나 기진했던지
몇 주일을 빌빌대었다. 그런데 그 목자 말로은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양들은
똑같은 짓을 다시 할 것이란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길래 양들은 불에 타 죽는 것도 모르고 불길을 향해 돌진하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그토록 잘 알아듣는 양들이 목자가 작대기를
휘두드는데도 개의치 않는가? 깻묵 때문이다. 완고하고 우매한 양들은 고소한 깻묵
냄새만 맡을 줄 알았지 자기들을 태워버릴 뜨거운 불길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양이 우리 인간을 유비하는 존재라면 깻묵은 우리가 집착하는 현세적 욕심을 유비한다.
그러니 우리가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 알아듣기를
거부하는 것은 현세적 욕심때문이다.
(계속..)
- 송봉모 著 '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 중에서 발췌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울님들에게 충만히 내리기를 소망합니다,,
평안하소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시편 23은 야훼 하느님을 목자(牧者)로, 인간을 그 분의 양떼로 묘사한다.
성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하여 여러가지 이미지를 사용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가 목자와 양이다. 족장 야곱이 처음으로 하느님을
"나의 목자"(창세기48:15)로 부른 이래 여러 예언자들과 시편 저자들은 하느님을
목자로, 인간을 양으로 불러왔다. 하느님을 목자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위와
자비로운 통치를 나타낸다. 이점을 에제키엘(에스겔)예언자가 잘 보여준다.
주 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보고 내가 돌보리라. 양떼가
마구 흩어지는 날 목자가 제 양떼를 돌보듯이, 나는 내 양떼를 돌보리라. 먹구름이
덮여 어두울지라도 사방 흩어진 곳에서 찾아로리라.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내 양떼를 쉬게 하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상처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힘 나도록 잘 먹여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주겠다.
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하리라.(공동번역 에제키엘34:11~16)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도 목자로 불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양떼로 불린다.
나아가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착한 목자라 칭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목자라고, 그것도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요한10:11~15)
목자와 양떼의 관계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를 목민관(牧民官)이라 불렀고, 백성을 다스리는 법을 목민법(牧民法)이라고
샜다. 정약용 선생이 쓰신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일종의 정치학 원론이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은 물론 우리 문화에서까지도 백성과 그 백성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관계가 목자와 양으로 제시된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목자와 양. 목자의 임무와 양의 속성을 알 필요가 있다.
시편 23을 쓴 이는 다윗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목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젊은 시절
양을 키우며 살았던 사람이다. 그 누구보다도 목자와 양의 사이를 잘 알고 있던 다윗은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라고 노래하면서 자신이 목자로서 양들을
돌보았을 때의 체험을 상기했을 것이다.
다윗이 하느님을 목자로, 인간을 양으로 표현한 것은 목자와 양은 깊은 인식과 철처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계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목자와 양의 관계는
상호간의 깊은 인식에서 이루어진다. 목자는 양들 하나하나를 알고 있고 그 각각의
특성까지도 알고 있다. 우리같이 양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 그놈이 그놈처럼 보이지만 목자의 눈에는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구별되어 보인다.
목자는 어느 양이 아파서 비실대는지, 어느 양이 거센지, 어느 양이 항시 딴 기로 빠져
나가 애를 먹이는지 그 습성을 다 파악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점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ㅓ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요한10:14) 여기서
'안다'란 히브리어 동사 야다(yada)는 우리가 통상 이해하고 있는 '안다'와 다르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더불어 정을 통해 안다.'라는 뜻이다. 정신적인 일치와
더불어 성적인 일치를 의미할 때 야다라는 말을 쓴다.
이 단어는 다음 말의 '안다'의 뜻과 흡사하다고 보면 된다.
"어려서부터 이성을 너무 빨리 알면 안되지." 또는 "어려서부터 너무 빨리 세상을
알면 안되지"의 '안다.이다. 그러니 예수께서는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라고 했을 때 안다는 것은 당신이 우리를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들, 긍정적 부정적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정적인 모습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보아 주기 위해서이다. 하느님께서 헤매고 길 잃은 양을 찾아오고, 상처입은 양을
싸매주고 아픈 양은 잘 보살쳐 준다고 했듯이(에제키엘 34:11~!6) 착한 목자이신
예수게서도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보아 주시며 선을 이루신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있다."(요한 10:14)고 확언하신 예수께서는 우리 개개인을 알고
계시다.
(중략)
목자와 양, 상호간의 깊은 인식은 양떼들편에서도 이루어진다. 양들도 목자를 잘 알고
있기에 목자가 아닌 도둑이나 삯꾼을 따라 나서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요한10:16) 얼마나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화가 있다.
성서 공부를 하기 위해 팔레스티나에서 머물고 있던 한 신부가 양치기들의 삶과
양떼들의 생태를 알기위해 한동안 그들과 함께 살았다. 어느날 갑작스런 기상 변화로
심한 폭풍우가 몰아쳐서 양들을 동굴로 피신시켜야 했다. 그런데 그 부근에는 동굴이
하나 밖에 없어서 두 무리의 양떼가 한 동굴 안에 피신하게 되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동굴 안에 있던 그 신부는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비가 그치고 떠날 때
어떻게 이 많은 양떼들이 서로 섞이지 않고 자기들 목자를 따라갈까 하는 것이었다.
양들 엉덩이에 소유주를 표시하는 동장이 찍혀 있는 것도 목걸이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신부의 의문은 너무나도 간다하게 풀려버렸다.
폭풍우가 그치자 양치기 한 사람이 먼저 일어나 나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한 무리의 양떼들만 일어나서 그 목자를 따라가고, 다른 양떼들은 그대로 동굴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어 두 번재 양치기가 노래를 부르면서 나가니 나머지 양떼들이
일어나 그 목자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던 신부는 양치기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자기도 그들처럼 해보고 싶었기 떄문이었다.
노래를 다 배운 그 신부는 양치기더러 숨어 있으라고 한 다음 그 노래를 부르면서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간 뒤 양떼들이 따라오는지 보려고 뒤를
돌아보니 놀랍게도 한 마리 양도 따라오지 않는 것이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오는 것이지 멜로디를 알아듣고 따라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목자와 양의 유비(類比) 안에서 목자는 주님을 가리키고 양을 우리를 가리킨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듯이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다. 주님의
음성이 아닌 다른 음성을 듣고 따라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하신 " 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말씀은 단지 주님의 바람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다. 이 점도 양들의 속성을 통해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켈러(Phillip W. Keller)에 의하면 양보다 더 우둔하고 완고한 짐승은 없다고 한다.
좀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양들은 바른 길만 빼고는 어떤 길이든지 가는 완고한 짐승이고
길을 잃어버릴 줄은 알아도 집을 찾아서 돌아올 줄은 모르는 우매한 짐승이다.
이 완고함과 우둔함은 사실 우리 인간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모습이다. 다음 이야기는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목자의 음성을 따르지
않는 완고하고 우매한 동물임을 보여준다.
어느날 번개와 벼락이 쳐 깻묵을 보관하고 있던 헛간에 불이 붙었다. 양떼들이 깻묵
타는 고소한 냄새를 맡고 달려와 빨갛게 불타고 있는 깻묵더미 앞으로 자꾸만 가려고
하였다. 이를 본 목자는 급히 달려가 양떼들을 불구덩이에서 떼어놓기 위하여 작대기를
휘둘러 댔다. 한 무리를 떼어 놓으면 다른 무리가 불을 향해서 달려들고 이러는 가운데
다행히 불길이 잡혀 양떼들은 살긴 살았지만 뜨거운 불기운 때문에 얼마나 기진했던지
몇 주일을 빌빌대었다. 그런데 그 목자 말로은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양들은
똑같은 짓을 다시 할 것이란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길래 양들은 불에 타 죽는 것도 모르고 불길을 향해 돌진하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그토록 잘 알아듣는 양들이 목자가 작대기를
휘두드는데도 개의치 않는가? 깻묵 때문이다. 완고하고 우매한 양들은 고소한 깻묵
냄새만 맡을 줄 알았지 자기들을 태워버릴 뜨거운 불길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양이 우리 인간을 유비하는 존재라면 깻묵은 우리가 집착하는 현세적 욕심을 유비한다.
그러니 우리가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 알아듣기를
거부하는 것은 현세적 욕심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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