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물론 조금은 사그라 들은 것 같지만 여전히 외모를 중요시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외모를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양이면 단정한 옷을 입고 단정한 외모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외모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입니다. 곧 사람은 자신을 꾸미는 것보다 자신을 가꾸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외모를 꾸미는 것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내면을 가꾸기 보다 외모를 꾸미려고 하는 데 신경을 많이 씁니다.
이런 모습이 안타깝게도 교회에도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는 마치 더 큰 교회를 짓는데 경쟁이라도 하듯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건물을 아름답게 짓고자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본질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보여주기 위한 외형만을 추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을 보십시오. 그렇게 웅장하게 아름다운 교회를 지었지만 지금 그 곳에는 수십 명의 노인들만 예배를 드리는 곳이 많습니다. 박물관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슬람교에 팔려서 교회가 이슬람사원이 되기도 하고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팔려 나이트 클럽이 되기도 했습니다.
비단 이 모습은 유럽의 교회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아직 그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많은 교회들이 매물로 나오고 있습니다. 짓다가 부도가 난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를 이단에 팔아넘긴 교회도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까? 결국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고 외형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에 본질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사라져 버린 교회는 결국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상가운데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고 무너지게 됩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유럽교회의 수순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는 모습과 성전에서 가르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오후예배때 한 번 말씀을 드렸는데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두 번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쯤에 일어난 성전 정화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사역 마지막에 성전을 정화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전 정화사건은 4복음서에 다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는 장면을 보통 성도들이 생각할 때 지금 현대의 예배당과 같은 성전 안에서 이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때 예루살렘성전과 현대예배당은 구조자체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계시는 성전은 헤롯성전입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헤롯성전은 담으로 둘러 싸여져 있는데요. 성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이방인의 뜰입니다. 그 다음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여인의 뜰이 나오고 또 문을 통과해서 가면 이스라엘의 뜰이 나옵니다. 마지막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사장의 뜰이 나옵니다. 번제단과 성소는 제사장의 뜰에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셨다는 것은 이방인의 뜰에서 행해진 사건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방인의 뜰에서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거나 돈을 바꾸는 환전상 들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는 자신이 특별히 구별해 기른 소나 양을 사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종교지도자들이 매점매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외국돈이나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진 돈으로 연보하지 말고 성전에서만 쓰는 세겔로 바꾸어서 연보를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백성들은 그것에 순종하여 성전에서 소, 양, 비둘기를 사서 제사를 드렸고, 돈을 바꾸어서 연보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종교 지도자들이 그 소나 양을 비싸게 팔아서 이득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돈을 환전하는 차액을 그들이 챙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행동은 그 당시 기득권세력이었던 종교지도자들의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을 잃어버린 이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은 예배하고 기도하는 곳이어야 하는 데 그 곳을 돈벌이를 하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으니 예수님은 분노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결국 성전이 본질이 잃어버리게 만든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종교지도자들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욕심이 성전의 본질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진정한 예배가 드려져야 하고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종교지도자들의 욕심으로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욕심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로 하여금 본질을 보지 못하도록 눈멀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심리학 실험이 있습니다. 이 실험은 전 세계 심리학교과서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그 실험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농구 경기 동영상을 실험에 참가자들에게 보여주면서 흰 옷을 입은 팀이 공이 패스한 횟수를 세어 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실험 참가자들은 열심히 동영상을 보면서, 흰 옷을 입은 팀의 공이 몇 번이나 패스했는지를 정확하게 맞춥니다. 그러나 이 실험에는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여섯 명의 사람들이 공을 주고 받는 동안 그 사람들 사이로 커다란 고릴라가 오른쪽에서 나와 중간에서 가슴을 친 다음 왼쪽으로 사라집니다.
이 과정에서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지나가고, 실험 장소 뒷부분에 있는 커튼의 색깔도 바뀝니다. 나중에 실험에 참가자들에게 고릴라를 보았는지 물어보았는데, 놀랍게도 봤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50%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절반이상의 사람들이 공이 패스된 횟수를 세는 데 집중해서 고릴라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고릴라와 검은 옷을 입고 지나간 사람과 커튼의 색깔이 바뀌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동영상에는 고릴라는 없었다”고 까지 말을 했습니다.
실제로 고릴라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보지 못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같은 동영상을 다시 보여주자 아까와 다른 동영상을 보여준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도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면 나머지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곧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사람은 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들어 가보면 그 속에 욕심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속에 욕심이 들어가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것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곧 그 욕심이 다른 것을 못 보게 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욕심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욕심 가운데서도 자신의 삶 가운데 유익을 주는 좋은 욕심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 잘 해보고자는 욕심은 좋은 욕심입니다. 이양이면 내가 맡은 일에 열심히 하고자하는 욕심은 분명히 유익한 욕심입니다. 신앙적인 욕심도 좋은 욕심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 헌신하고 싶고 기도하고 싶고 예배하고 싶은 것은 좋은 욕심입니다. 물론 이것도 지나치면 문제가 되겠지요. 그런데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욕심은 잘못된 욕심입니다. 잘못된 욕심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욕심이 욕심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우리로 하여금 눈멀게 합니다.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죄를 짓고 심지어 사망에 이르기까지 만듭니다.(약1:15절)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 때문에 본질을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겉모양만 성전이지 성전이 아닙니다. 이 땅의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써의 본질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모임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름다운교회도 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로써 본질을 잘 지키고 있는지 교회로써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의 지성인의 대표라고 하면 손봉호 교수님은 한국교회가 개 교회 우상주의 빠져 있다고 지적을 하셨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도 개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으면 그 일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않는 다고 할 지라도 그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면 한다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말입니다. 이 모습은 성전에서 매매하고 돈을 바꾸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주님의 일을 하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예배는 제대로 드리지 않습니다. 돈을 버는 일과 예배드리는 일이 겹치면 돈을 버는 일을 선택합니다. 돈을 버는 목적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일까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돈을 버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욕심이 들어가서 본질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을 끊임없이 점검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면서도 그것이 문제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를 대상으로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하시는 분들은 정말 이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분들이 적당한 이윤을 남기는 것은 괜찮지만 욕심이 들어가서 그것으로 인해 많은 돈을 벌려고 하면 안 됩니다.
본질은 대들보와도 같습니다. 대들보가 없으면 집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집의 중심을 잡아주는 대들보는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본질을 놓쳐버리면서 우리의 삶은 껍데기가 되고 한 순간에 우리의 삶이 무너지게 됩니다.
마7:22-23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 앞에서 선 사람들이 자신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말을 합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대체 알지 못하겠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했다고 말하는데 왜 주님은 이들을 불법을 행한 자라고 하시면서 떠나가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들은 한마디로 주님의 이름을 도용했을 뿐 결국 자신의 이름을 드러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속에 본질 되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 땅 가운데 살았던 삶은 주님을 믿는 척 했던 껕데기의 삶이었습니다. 그 실체가 주님 앞에 가니까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순간도 욕심 때문에 본질을 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를 대신 해서 죽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본질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본질은 욕심이 들어가면 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 일을 하든지 내 욕심으로 하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욕심으로 하는 것이라면 빨리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본질을 잡을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내 속에 있는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고 본질을 쫓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누가복음 19장 말씀묵상] 욕심이 본질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45-48절)|작성자 아름다운 설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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