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돈의 가치를 두는 사람도 있고 권력에 가치를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명예에 가치를 두는 사람도 있고 가족에게 가치를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생명을 잃어버리면 나와는 상관이 없게 됩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6: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은 온 천하를 얻었다고 해도 목숨을 잃으면 온 천하는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기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이렇게 가치가 있지만 목숨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입니다. 영혼은 소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 가운데 한 번 태어난 사람은 그 영혼은 영원합니다. 곧 영혼은 육신의 생명이 끝나면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유교에는 내세사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죽으면 이 세상의 삶은 끝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은 이 땅의 삶이 끝이 아님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죽은 이후에 영혼은 또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영혼이 이 땅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천국으로 가게 되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받지 못했다면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영혼은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나오고 있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율법 해석을 기초로 해서 수많은 금지 사항과 의무사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과 불명예스러운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죄인들로 간주했습니다. 죄인들은 유대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소외된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도 거리낌 없이 맞이해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리며 불평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앞에서 말씀 드린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죄인이라고 부르고 천국에 갈 수 없는 백성이라고 해서 ‘땅의 백성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땅의 사람들에 관해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규정을 정해 놓았습니다. “어떤 땅의 사람에게 돈을 맡겨서는 안 되고 그들의 증언을 받아들여서도 안 되며 그와 비밀을 나누어서도 안 되며 그를 고아들의 보호자로 세우지 말고 자선금의 관리자들로 삼지 말고 여행에서 그들과 동반해서도 안 된다.” 또한 그들과의 식사하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주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비판을 가하겠습니까? 그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쓰레기 같은 세리와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보다 말살 되는 것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옥의 땔감으로 심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마21: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혹시 우리도 바리새인과 같은 시각을 지니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평가 할 때 외형적인 것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소유하였느냐고 평가합니다. 직업이 무엇이냐로 평가를 합니다.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로 평가합니다. 얼마나 잘생기고 이쁘냐로 평가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기준에 못 미친다 싶으면 그 사람을 무시하기도 하고 관계를 가지지 않습니다. 특히 죄를 지어서 감옥에 다녀온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사람의 외형만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면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리와 죄인들의 외형적인 것만 보았다면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껍데기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보셨습니다. 천하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영혼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을 구원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수군거림과 불평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한영혼이 얼마나 가치있고 소중한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3가지나 하십니다. 첫째 비유는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 비유입니다. 둘째 비유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비유입니다. 셋째,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아버지 비유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비유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두 번째 비유를 연결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 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먼저 물으십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을 자신들의 생명처럼 아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양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인도했습니다. 밤이 되면 우리에 가둬두고 양들의 숫자를 확인합니다. 그 때 한 마리라도 모자라면 나머지 양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두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는 데 명수들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특성을 잘 알고 있고, 또 양의 발자국을 확인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험준한 들과 계곡을 누비며 기어코 그 잃은 양을 찾아온다고 합니다. 만일 양이 들짐승에 잡아 먹혔으면 그 털이라도 찾아와야 동료들에게 참 목자로 인정받는다고 합니다.
8절에서도 같은 의미에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드라크마는 데나리온과 같은 화폐의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단위이고 드라크마는 헬라의 화폐단위입니다. 그런데 유대사회에서는 결혼할 때에 결혼을 기념하는 증표로 남자가 여자에게 열 드라크마를 줄에 꿰어 주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여인이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었다는 것은 결혼과 사랑의 증표를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식었다는 표시가 될 수 있기에 충분한 이혼의 소지도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충분히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가옥은 진흙으로 방바닥이 이루어졌고, 그 위에 짚을 깔아 놓은 형태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조그만 동전을 찾으려면 가구를 들어내고 짚을 거두고 바닥을 빗자루로 쓸어내는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는 모습과 여인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아내기까지 찾는 모습을 통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예수님은 간절함과 수고로움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잃은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으셨습니다. 지금도 잃은 양을 찾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잃은 양을 간절히 찾고 계신 것일까요?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그 영혼의 가치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100마리 양 중에 한 마리 잃은 양은 1/100에 해당되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99마리가 남아 있는데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 까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아홉 드라크마가 남아 있는데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을 필요가 있을 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영혼의 가치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1/100의 가치 1/10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하나를 온전한 100의 가치로 온전한 10의 가치로 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겼지만 예수님은 한 마리 잃은 양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영혼의 가치를 100로 보셨습니다. 그러니 찾아낼 때가 까지 찾아다니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맞아들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겔33:11) 하나님께서는 악인조차도 한 마리의 잃은 양으로 보십니다. 그 영혼도 다른 영혼의 가치와 똑같은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이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거라사 지방으로 가셔서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십니다.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돼지 2천마리를 희생시키셨습니다. 군대귀신은 단번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무저갱으로 들어가지 말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서 산에 있는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예수님을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곧바로 군대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 2천마리에게 들어가게 되고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2천 마리의 돼지를 바다로 몰고 들어가서 몰사 시킵니다.
요즘 돼지 가격이 많이 내려서 양돈 농가들의 근심이 많다고 하는데 한 마리 당 30만원 잡아도 돼지 2천 마리면 6억입니다. 군대귀신 들린 사람은 외형적으로 따지면 전혀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세상가운데 없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6억이라는 돈을 투자하셨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지요. 예수님은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써놓은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나 혼자 이 땅 가운데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내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영혼을 가치 있게 여기시니 오늘 비유도 보십시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벗과 이웃을 초정해서 잔치를 엽니다.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이 벗과 이웃을 초청해서 잔치를 엽니다. 제 생각할 때는 찾은 잃은 양보다 찾은 드라크마보다 잔치 비용이 더 들어갔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비유의 결론을 7절과 10절에서 이렇게 내리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10).”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은 영혼이 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영혼의 소중한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부자의 영혼의 가치도 가난한 자의 영혼의 가치도 동일하게 소중합니다. 의인의 영혼의 가치도 죄인의 영혼의 가치도 동일합니다. 남자의 영혼의 가치도 여자의 영혼의 가치도 동일합니다. 어른의 영혼의 가치도 아이의 영혼의 가치도 동일합니다. 이 영혼의 가치를 바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차별 없이 모든 영혼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잃은 버린 영혼으로 생각하고 그들은 찾아내기까지 찾겠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한 영혼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외적인 것으로 혹시 평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영혼은 동일한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잃어 버린 영혼들이 돌아올 때마다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한 영혼의 가치를 바로 알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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