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코로나 19로 인해 지금 인생에 한 번 경험하지 못한 상황 속에 살아가고 있다. 대구에서 31번 확진자가 나오기 전까지 코로나 19는 사스나 메르스 때 정도로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국 우한에서 벌어지는 일은 정말 남의 나라일인 줄 알았다. 우리의 착각이었다. 코로나 19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빼앗아 가버렸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고통가운데 있다. 우리나라도 좀 잠잠해 지는 것 같더니 다시 지역감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위기 상황을 맞이하면서 많은 전문가들이 코로나 19이후에 세상에 대한 예측을 내놓고 있다.
몇일 전 제이슨 생커가 쓴 《코로나 이후의 세계》라는 책을 읽었다. 생커는 미국 경제 주간지인 블룸버그가 선정한 세계1위 미래학자이고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금융 예측가다. 이 책에서 생커는 코로나 19이후에 일어날 금융을 비롯한 17개의 핵심 분야와 산업의 변화에 대해 예측한다. 또한 그는 코로나 19로 심각한 인명 피해와 손실이 발생하지만 기회는 존재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래에 닥칠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준비하고 대비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코로나 19펜데믹은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코로나 19 이후에도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생커는 코로나 19이후 변화를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면 코로나 19이후에도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도 코로나 19이후 교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 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방역지침을 바꾸면서 거의 모든 교회들이 현장예배를 드리고 있다. 큰 교회 같은 경우에는 오프라인예배와 온라인예배를 동시에 드리고 있다. 큰 교회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장예배에 50%정도 출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교회는 위기를 느끼고 있다. 앞으로 교회가 온라인 사역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모이는 교회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 안에서의 예배로 그치는 것 삶의 예배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라든 기업이든 교회든 시대의 변화를 읽고 대비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곧 끊임없이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변화는 나라와 기업과 교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사람들 가운데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부족함을 느끼기에 계속해서 변화하려고 노력한다. 좋은 강의도 듣고 책도 읽어본다. 훈련도 받아보고 수양도 해본다. 하지만 사람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다. 그 만큼 자아가 강하다는 이야기다. 자아가 깨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변화되기가 어렵다.
우리의 외형을 바꾸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열심히 운동하면 날씬한 몸매로 만들 수 있다. 근육질의 몸으로 만들 수 있다. 외형은 돈으로 바꿀 수 있다. 예전에 tvn에서 ‘렛미인’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은 외모로 인해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에 지원 사람들은 성형수술을 통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을 한다.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아픈 상처도 치유되는 경험을 한다. 외모는 돈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성형외과의사는 돈만 받으면 외모를 바꾸어 준다. 외모만 바꾸어 줄 뿐 사람의 마음은 바꾸지 못한다.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성형시켜주는 의사가 있다. 우리의 삶을 성형시켜주는 의사가 있다.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이 수술 하시면 강퍅한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한다. 아무리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성령님이 수술하시면 변한다. 성령님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변화전문가이시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전하다가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 갔다. 잡혀 간지 이튿날에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들과 대제사장의 가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한마디로 종교지도자들은 거의 다 모인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렇게 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은 붙잡아 놓고 다 모여든 것인가? 지금 이 문제가 그 만큼 중대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워놓고 심문하기 시작한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4:7) 이들은 성전미문에 앉아있던 지체장애인이 고침을 받았다고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장애인을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고쳐주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사도들은 이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겠는가? 사도들이 어떤 잡신이나 악령의 힘을 의지하여 기적을 행하였다고 하면 불신앙 죄로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를 행하였다고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한 율법을 범한 죄로 돌로 맞아 죽어야 했다.
결국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어떤 답변을 하든지 정죄할 수 있도록 질문했다. 사도들은 지금 죽음의 위기 앞에 서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어떤 떨림이나 두려움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담대하게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다. 베드로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장애인에게 행한 일은 착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10) 베드로는 먼저 당신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이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체장애인에게 일어나라 걸으라고 명령했을 때 그가 건강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베드로는 12절에서 오직 예수만이 구원자이심을 종교지도자들에게 선포하였다.
베드로는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면서 조금도 두려움 없이 이들의 범죄를 질책하였다. 얼마나 당당하고 확신에 찬 믿음인가? 예수님을 심문했던 산헤드린공회 앞에서 그들의 죄를 질책하고 회개를 촉구한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베드로는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살기 위해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제자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갈릴리로 고기 잡으러 간 사람이다. 이런 베드로가 목숨을 내어놓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베드로가 180도로 변화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성령님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기도하던 베드로에게 임하였고 변화되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 가운데도 임하셨고 모두 변화되었다. 자기 살겠다고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니까 생명 내어놓고 예수님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바울도 마찬가지다. 스데반 집사는 바울 앞에서 돌에 맞아 순교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인 사람이다. 이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이 임하자 완전히 변화되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성공을 위해 쫓아가던 내가 예수를 믿고 성령님이 임하자 변화되었다. 변화되어 말씀을 전하는 목사까지 되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사도들이 잘나서 변화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똑똑해서 변화된 것이 아니다. 저와 여러분이 능력이 있어서 변화된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변화시키셨다. 변화의 주체는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변화전문가이시다.
구약 시대의 성령님의 역사과 신약시대의 성령님의 역사는 좀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성령님께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처음 임하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성령님은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셨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성령님은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 구약시대에도 성령님은 사람들에게 임하셨다. 구약시대에 성령님은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임하셨다. 곧 성령님이 임하셔서 완수해야 할 사역이 끝나면 성령님은 떠나가셨다.
하지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 요14:16-17절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른 보혜사, 진리의 영이 성령님이시다. 오순절 날 임하셨던 성령님께서는 우리 속에 영원히 함께 계실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이것은 구약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여러분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성령을 받으셨는가?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시는 순간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신다. 고전12:3절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2:3) 또한 롬8: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가 그냥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 같지만 성령님이 아니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 성령을 받았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당신의 주님으로 고백하라고 하면 못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 보라고 하면 못한다. 곧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믿고 있다는 것은 성령님이 내안에 거하시는 증거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증표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했다. 고전3:16절 말씀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하지만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라는 것이다. 성령님이 인격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과 감정을 성령님도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무시를 당하면 기분이 나쁘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 인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령님도 마찬가지다.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와 계시지만 내가 무시하면 성령님은 무시 당한채로 일하지 않고 가만히 계신다. 내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하지 않으면 성령님은 가만히 계신다. 성령님은 변화전문가이시지만 성령님이 임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이 나의 삶을 주관 하시도록 나의 왕좌를 그분께 내어드려야 한다.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순간순간 성령님께 묻고 성령님이 나의 삶을 인도하시도록 부탁을 드려야 한다. 성령니을 애인처럼 가까이 지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성령님이 중심이 되어 사역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있다. 성부하나님, 성자예수님, 성령하나님을 믿고 있다. 세분 하나님께서는 함께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물론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 함께 계시고 지금도 함께 계신다. 하지만 구약시대는 세분 하나님 중에서 성부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시대였다. 신약시대에는 이 땅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사역이 펼쳐졌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재림하실 때까지는 성령님이 중심이 되는 시대이다. 곧 우리는 성령님이 중심적으로 사역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떠나가야 성령님께서 오셔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시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하고 성령님을 더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님을 통해서 지속적인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성령님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도록 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일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다. 성령님은 우리가 거룩해야 일하신다. 아무리 성령님을 인정하고 변화하기를 소원해도 거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전3:17절에는 이렇게 말씀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3:17)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곧 우리를 가르킨다. 성령님이 거하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그 사람을 멸시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신다.
거룩하지 않으면 온전한 성령의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지속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없다. 성령을 통한 기적을 체험할 수 없다. 성령님이 온전히 사용할 수가 없다. 디모데후서 2장에서 바울은 주인에게 쓰임 받는 그릇이 어떤 그릇이라고 했는가? 금 그릇도 아니다. 은그릇도 아니다. 질그릇도 아니다. 주인은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신다고 했다. 사람을 그릇에 비유한다면 깨끗한 그릇은 거룩한 사람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막16:17-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16:17-18)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표적이 나타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오늘날 이 시대가운데 믿는 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가? 방언을 말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뱀을 집어 올리고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는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같은데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표적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하나님의 파이프에 불과하다. 아무리 맑은 물이 흘러 들어와도 파이프가 깨끗하지 못하면 파이프를 통해 맑은 물이 전달 될 수 없다. 파이프에 녹이 끼여 있으면 맑은 물이 아니라 녹물이 전달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파이프가 깨끗하면 맑은 물을 그대로 흘려보낼 수 있다. 우리가 거룩하면 성령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기적을 행하신다. 우리를 계속 변화시켜주신다.
둘째,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은 다르다. 성령을 받는 다는 것은 말 그대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거하시는 것과 성령님이 내안에 충만한 것은 다르다. 가득 찬 것을 충만이라고 하지 않는다. 충만은 차고 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이 내 안에서 흘러넘치는 것을 말한다. 곧 성령님이 완전히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주위에 보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음에도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종종 볼 때가 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성령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계속해서 자신을 지배하고 이끄시도록 해야 하는데 성령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신앙적으로 나태해질 수밖에 없다. 충만하지 않으면 틈이 생긴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삶의 틈이 생긴다. 그 틈을 통해서 마귀는 역사한다. 틈이 없으면 마귀는 역사할 수가 없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라.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베드로는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목숨 내어놓고 예수를 전했다.
초대교회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했다. 그들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했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그들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온전히 지배하시니 사람이 두렵지 않다. 성령충만하니 죽음이 두렵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충만을 위해 늘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이 온전히 나를 지배하시도록 내 삶을 내어드려야 한다.
태양의 표면 온도는 6000도라고 한다. 태양의 중심온도는 1600만도라고 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온도다. 태양은 지구에서 1억5천km 정도 떨어져 있다. 1억5천km는 시속 300km로 KTX를 타고 한 번도 쉬지 않고 60년을 가야하는 거리다. 놀라운 것은 1억5천Km 떨어진 태양이 발하는 열이 지구의 동식물들을 변화시킨다. 성장하게 한다. 이렇게 대단한 태양도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을 변화시켰다. 바울과 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도 변화시켰다. 저와 여러분도 변화시켰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해서 변화되기 위해서는 거룩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저와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 지속적으로 변화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 성령님은 변화전문가다.(행4:5~12)|작성자 아름다운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