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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일

 

제가 목회를 시작한 이래 가장 충격적인 일은 한 집사님의 말이었습니다. 오래 전 저는 이지선 자매의 글을 읽고 그녀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말 꽃다운 나이의 꽃다운 어여쁜 한 여대생이 자동차 사고로 화상일 입어 그때까지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그 끔찍한 사건을 딛고 은혜 안에서 회복되는 모습은 누구라도 눈물 없이 지나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역경을 딛고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고 고마워서 교회에서 그녀의 동영상과 함께 나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그런 모습이 도대체 무어냐고 말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도대체 그딴 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모습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동시에 신앙생활 잘하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그 사람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목회 초년병이었던 저는 그때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었습니다.

 

어쩌면 그 집사님의 그런 반응은 한국 교회가 공들여 심어놓은 열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천 벌이라고 말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 목사는 미국 뉴올리온즈에 닥친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도 그 도시가 동성애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입만 열면 미국이 축복 받은 기독교 국가라고 침을 튀기는 분이 또 다시 다른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만일 그 목사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그토록 무자비하게 동성애자들을 쓸어내기 위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신실한 당신의 백성들까지 몰살시키는 잔인한 분이시라는 말입니까? 그분은 의인이 열 명만 있어도 타락한 도시를 멸망시키지 않는 분입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란 도대체 어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까?  

 

이런 표현은 조금 죄송하지만 사실 이런 생각은 머리만 달려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목사를 추종하는 신자들이 수만 명입니다. 그런 설교를 할 때면 아멘을 외쳐댑니다. 그런 목사가 신학생들이 꿈꾸는 목사 랭킹 3위에 오르는 한국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과연 다른 이들의 불행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남의 불행을 당연시하고 거기에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두 눈을 희덕이며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다는 자의식에 빠질 것입니다. 그런다면 과연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일 수가 있을까요?

 

이제는 그 어리석은 모습을, 그 어처구니없는 신앙의 행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결코 그런 태도를 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벌을 주시는 무자비한 폭군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며, 공평과 정의로 그런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당신의 백성들이 그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늘 격려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지난주에는 분당에 나갔다가 세월호를 상기시키는 노란 리본을 나누어주고 있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리본 몇 개와 엽서를 받고 그냥 돌아오려다가 그분들이 수고하는 모습이 고마워서 우리가 먹으려고 샀던 버블 호떡을 드렸습니다. 일하시는 분이 네 명인데 호떡이 세 개밖에 없어 다시 한참을 걸어가 세 개를 더 사서 한 개를 더 드리고 저와 아내가 한 개씩 먹었습니다. 유치하게 괜스레 마음이 으쓱해졌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세월호 사건 역시 희미해졌고, 선체 인양을 요구하고 책임자 색출과 처벌,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를 촉구하는 그들에 대한 시선이 싸늘해졌습니다. 언제까지 세월호 타령만 하고 있을 것이냐고 말하며, 지난 번 일베 사건에서처럼 그들을 조롱하는 이들까지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고통을 느끼고 있는 한 우리들이 그들 곁에 머물러야 하며 그들이 기댈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우리의 역할이 우리의 신앙과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불행을 내 일로 알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불행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우리가 보는 성경의 주된 메시지라는 것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바댜

 

선지자 오바댜는 이름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오바댜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종' 혹은 '여호와를 섬기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오바댜서는 구약 성경 중에 가장 짧은 책입니다. 이 책은 장이 없이 21개의 절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역사적 배경 역시 분명치 않습니다. 오바댜서에는 그 시대에 통치했던 왕의 이름이나 어떤 특정한 사건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에돔이 유다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사건이 오바댜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바댜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파국의 현장을 경험한 인물로 보입니다. 따라서 오바댜서는 주전 587년 이후에 나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에게서 비롯된 족속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싸웠고, 급기야 그들이 성인이 된 이후 장자권 다툼으로 갈등이 극에 달해 결국 야곱이 집을 떠나게 됩니다. 에서는 집을 떠난 야곱이 20년 만에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의 집에서 돌아올 때 이미 에돔 지역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에서의 후손이 에돔이고, 야곱의 후손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렇게 볼 때 에돔과 이스라엘, 두 국가는 형제 국가입니다. 불행하게도 두 형제 국가가 철천지원수 관계가 되 것입니다. 오바댜서는 이러한 두 국가의 깨어진 관계를 보여주고 특별히 그래서 에돔의 멸망에 관한 예언서입니다.

 

에돔 대한 심판의 이유

 

10절에서 오바댜는 에돔이 영원히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에돔이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악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오바댜가 유다를 지속적으로 야곱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쌍둥이 형제였던 유다의 조상 야곱과 에서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에돔은 결코 형제의 나라인 유다에게 해를 입히면 안 되는 나라였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돕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도 아닌 형제의 나라인 에돔이 야곱에게 잔인한 포학을 행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에돔을 영원히 멸절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주전 약 350년 후에 이루어집니다. 유다가 망한 후 마카비 시대에 이르러 유다는 강대국들의 힘의 불균형 상태에서 독립을 성취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스몬 왕조인데 그 왕조의 히르카누스에 의해 이두메 사람들이라고 불리던 에돔이 완전히 멸절되어 이후 독립된 민족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11절은 유다가 이방인의 공격을 받아 약탈에 시달릴 때 드러났던 에돔의 행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방인과 외국인은 바벨론 군대를 가리킵니다. 이 군대는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고, 승자의 몫으로 챙길 전리품들을 나누기 위해 제비를 뽑고, 그 성읍의 재산을 그 거주민들에게 새롭게 분배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당시 전쟁에서 이긴 쪽이 행하던 전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돔은 형제가 고통을 당하는 현장에서 거리를 두고 멀리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유다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바댜는 그런 그들을 향해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덕적 해이를 말하고, 개인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불행에 대해 책임이 없음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모습이 바로 비극적인 모습이며 그러한 방관자적 태도는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를 통해 강하게 지적되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에서는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더욱 확장되는데 그러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행위로서 개개인의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25:41-43)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대부분의 정통 교회에서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교리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보다 칼빈을 더 숭배합니다. 그들은 "칭의"와 "견인의 교리"를 내세우며 인간의 행위는 결코 구원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읽어보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았던 삶의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 결정되어 양과 염소로 나눠집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마태복음의 이 구절은 후대에 첨가 되었다거나 아니면 상급의 논리로 극복하려 들 것입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편리한 논리를 내세우고 있을 뿐입니다.

 

구체적인 악행들

 

이어지는 12-14절에는 유다가 유린당하는 현장에서 형제의 나라가 해서는 안 되었던 구체적인 사례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에돔이 하지 말았어야 할 포악한 행위들은 여덟 가지가 열거됩니다.

 

"네가 형제의 날 곧 재앙의 날에 1)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2)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3)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12)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4)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5)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6)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13)

네거리에 서서 그 7)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8)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 (14)"

 

먼저 12절에는 금지 사항 가운데 3가지가 언급됩니다. 그 첫 번째는 방관입니다. 두 번째는 타인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셋째도 둘째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입을 크게 벌린다는 것은 단순히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조롱한다는 의미입니다.

 

13절에도 3가지가 언급됩니다. 전체적으로 네 번째에 해당합니다. 침범입니다. 다섯 번째는 똑같이 방관이지만 저는 어것을 구체적인 도움의 행위를 실천하지 않는 것으로 조금 더 진전시키고 싶습니다. 여섯 번째는 약탈입니다. 이 사실은 역으로 에돔의 행위를 드러냅니다. 에돔은 유다가 처한 가장 슬픈 그 날, 그 나라에 들어가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유다가 바벨론 군대에게 무자비하게 유린당할 때 유다의 변두리 작은 성읍들은 분명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기회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14절은 나머지 두 가지를 더 보여줍니다. 일곱 번째로 그들은 도주로를 차단했습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로 그들은 환난을 당한 사람들을 팔았습니다. 인신매매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 에돔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그 외의 성읍들을 약탈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침략을 피해 달아나는 유다의 낙오한 병사들과 피난민들을 붙잡아 베벨론 사람들이나 혹은 노예상인들에게 넘겼습니다. 베벨론 사람들의 진노를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을 도와주기는커녕 그들을 붙잡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우리는 에돔의 이러한 행위들을 별다른 감정의 변화없이 읽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를 포함한 우리의 사회 전반에 걸쳐 그러한 행위들을 승인할 뿐만 아니라 그런 기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암시와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에돔을 향한 오바댜의 예언을 주목해 보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방금 전에 살펴본 것처럼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심판의 근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그들의 택한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형제 구실을 못했음은 물론이요 오히려 다른 민족들보다 더 교활하게 잔혹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만국의 심판

 

이제 하나님의 심판은 만국으로 확장됩니다. 15절은 에돔과 만국에 임함 여호와의 날을 언급합니다.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보복이 실현되고 에돔과 만국이 범한 죄악에 대해 보응을 받게 될 날입니다. 에돔은 그들이 받아 마땅한 것으로, 즉 그들이 저지른 행위에 합당한 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다."

 

16절에서 오바댜는 에돔과 민국에 임할 심판을 묘사하면서 술 취한 자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오바댜는 '마시다'하는 동사를 세 번이나 반복함으로써 에돔과 열방을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돔이 거룩한 산에서 이미 마신 잔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마시는 행위는 즐겁고, 유쾌한 것으로 기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에돔이 예루살렘 시온산(성산)에서 마신 잔은 아마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 승리를 기념하면서 마신 술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바댜의 심판 선포에 따르면 에돔이 잔을 마신 것처럼 만국인도 마시게 될 것입니다. 에돔이 이미 마셔버린 잔이 승리의 잔이었다면 만국이 앞으로 마실 잔도 승리의 잔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장차 만국에게 주어질 잔은 승리의 잔이 아니라 진노의 잔입니다.

 

결국 에돔이 불의한 행동과 방법으로 취한 이득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들이킨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유다의 패망의 기회를 틈타 얻은 모든 것은 그래서 들이켰던 잔은 축배가 아니라 독배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축배로 마신 잔이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독배라는 말입니다. 남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마신 잔은 에돔이 마셨던 것과 같이 축배의 잔이 아니라 독배가 될 것입니다. 남의 피눈물로 얻은 것은 결국 자신에게 독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만국인이 마시게 될 잔은 스스로 멈출 수 있는 잔이 아니라 끊임없이 숨이 차도록 마셔야 하는 잔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어 '마시다'라는 동사 '라알'은 소리를 내며 벌컥벌컥 마셔야 하는 "고문행위"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질 심판은 숨도 쉬지 못할 정도고 정신없이 들이켜야 하는 술 고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재앙이 계속적으로 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재앙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입니다. 그것이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같이 되리라"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이 숨 쉴 틈도 없이 재앙에 재앙을 당하는 날이며, 결국은 생명을 다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악의 없는 방관자

 

오늘날 교회가 직접적으로 압제자의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지만 너무나 자주 악의 없는 방관자가 되는 것을 보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강도질이나 약탈 행위에 직접 가담하는 교회는 없지만, 약자들의 삶에서 약간 비켜서서 방관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을 보고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비겁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는 이도 없습니다. 오히려 힘 있는 강자에 빌붙거나 눈치를 살피며 자기보존이나 확장의 길을 택하느라 급급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비극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이조차 드물기만 합니다.

 

약한 자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하는 오늘날의 교회를 향해 오바댜는 말합니다. "네가 멀리 섰던 날, 즉 악의 없는 방관자의 자리에 안주했던 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비겁하고 나약한 현대판 에돔에게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이 세상 어디에도 악의 없는 방관자는 없다. 아무리 악의가 없다 하더라도 악의 없는 방관은 그 자체가 악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경쟁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양산되는 패배자들과 낙오자들을 우리는 나 몰라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다가가 보살펴야 하는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버릴 수 있어도, 모른 체 할 수 있어도,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악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머리로 돌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복음은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며, 복음 자체가 사회적이며 우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들이 개인구원과 영혼구원을 말하지만 그것은 복음을 진리의 조각으로 만드는 것이며 복음이 지니고 있는 역동성을 무력화시키는 사단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악의 없는 방관자가 된다는 것이 곧 악임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대하여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에게 한 걸음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인간이란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서 이웃으로 옮기는 순간 관심이 시들해지는 존재입니다. 자기가 복을 받고, 자기가 구원을 받고, 자기가 형통해진다면 열을 내는 존재들이지만 거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열정이 사라지고 무덤덤해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오바댜의 경고가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악의가 없었고,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냐고 반문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소용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악의 없는 방관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환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손을 잡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그들과 함께 나눌 때, 그들과 연대하여 압제자들에게 항거할 때, 거처를 잃은 이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줄 때, 복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축복이 될 것이며 온 세상의 희망으로 전파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는 성령의 은혜가 이 자리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어지니♡
글쓴이 : 늘 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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