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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성숙을 가로막는 교회

 

같은 교향악단이라도 지휘자가 누구냐에 따라 같은 곡이 다르게 연주됩니다. 훌륭한 지휘자의 연주는 그럴 싸 그러한지 정말 더 멋지게 들리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지휘자의 출신 지역에 따라 특히 음악의 빠르기가 현저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출신의 지휘자는 유럽 출신의 지휘자에 비해 템포가 엄청 빠릅니다. 그래서 미국의 모데라토는 유럽의 알레그로에 해당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미국 사람들이 유럽 사람들에 비해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그 이유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를 그대로 빼닮았기 때문에 교회의 템포가 무척 빠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은 늘 교역자들에게 빠르게 움직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찬송가를 빠르게 불러야 함은 물론, 걸어 다닐 때에도 종종 걸음으로 다녀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하였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여야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이 그분의 한결같은 지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없이 빠른 그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바쁜 삶은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서글픈 단절을 부추깁니다. 교회를 떠나는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조사해 보니, 대다수가 교회 활동으로 바쁘면서도 그중 다수는 하나님과 친밀하지 못해 내면이 곤고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는 면과 행하는 면에서는 제법 잘해 왔지만 그냥 존재하는 면, 내면세계를 가꾸는 면에서는 많이 서툴렀습니다. 그래서 외형적인 신앙행태의 변화는 있었지만 정작 그보다 더 중요한 내면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영국의 작가 겸 시인 에벌린 언더힐은 그것을 이렇게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인생 대부분을 '원하다', '가지다', '행하다',라는 세 가지 동사를 활용하여 보낸다." 하지만 우리는 "존재하다"라는 근원적인 동사가 그 셋을 포괄하고 초월하지 않는 한 그중 어느 동사에도 궁극적인 의미가 없음을 망각하고 있다. 신앙이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더 의지적으로 그리고 더 생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내면으로부터 살아가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언더힐은 또 "기계처럼 돌아가는 끊임없는 활동에 어느 정도 여백을 두고 속도를 줄이는 일이야말로 깊고 풍요로운 삶의 필수 조건이다. 기쁨의 영과 서두름의 영은 한 집에 살 수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정말 중요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예수님을 처음 알고 나서는 마음이 뜨거웠는데 회심한 지 3년이 지나자 그런 열정이 사라졌어요. 어떻게 다시 그 길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여정에 들어선 지 몇 년 된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내가 지나온 지형은 에베레스트 산 겨울 등정만큼이나 힘들었고, 끝없는 사막만큼이나 방향이 묘연했고, 졸졸 흐르는 냇물만큼이나 즐거웠고, 사해만큼이나 생기가 없습니다." 원하고, 가지고, 행하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존재의 변화라는 가장 근원적인 변화에 접근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두고 묶어두려는 교회들의 전략이 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통제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초신자들을 통제하는 일은 그보다 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신자들의 성숙을 가로막는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건 재직 수련회에서는 동일하게 공예배에 모두 참석할 것을 요구합니다. 교회의 모든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그것을 가르친 후에는 끊임없는 행사로 신자들을 교회 안에 가두고 묶어두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으로 고착시키는 일을 교회가 심혈을 기울여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교회는 그 일에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영적 성숙이라는 것이 교회 일에 적극적이고 만사를 제쳐두고 교회에서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말씀 잘 듣고, 장로님께 인사 잘하고, 교회 일에 적극적이고 거기에 더해 헌금이라도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희생적으로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다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으로 알고 추호도 의심 없이 그렇게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게 되자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를 좇고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이들은 예외 없이 이단으로 몰리고,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지극히 작은 자들을 이해하고 그들 편에 서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려고 하는 이들은 모두 종북이요 빨갱이 소리를 듣는 이상한 기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일까요? 어떻게 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일까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 개괄적이라도 알아야 자신을 돌아보고 영적 여정을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어떻게 삶이 바뀌는 지, 거기에서 목표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로운 조명

 

누구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아! 이 사람들이야말로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이다.'라고 감탄이 절로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반대로 '이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듣기에 꼭 알맞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영적 성숙의 길에 들어서지도 않고 내면의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감화되고, 주님의 사랑에 감동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그러나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계속 이어집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고민해야 하고 더 많이 힘든 일들이 이어집니다. 물론 자신의 어려움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아픔까지도 조금씩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내는 시간 어디에선가 한 줄기 빛이 비쳐듭니다.

 

"빛이 있으라."(창1:3) 하신 하나님의 명령으로 광활한 우주가 형성되었습니다. 창조하실 때 어둠에서 빛을 불러내신 하나님은 어둠에 빠진 영혼에도 조명을 밝혀 영적 방향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이사야가 회개와 방향 회복의 열매에 대해 한 말을 들어보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른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다."(사 60:1)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을 흩으시고 영혼의 그늘에 새 빛을 비추십니다. 다윗은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18:28)라며 기뻐했습니다. 은혜로 새로운 조명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이 되살아나고 영적 실체가 더욱 분명히 지각되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영혼의 방향이 회복됨을 역설적으로 어두운 조명이라 표현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서서히 어둠을 몰아내시고 동이 트듯 자신의 사랑을 새롭게 계시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성령께서 방향이 회복된 영혼 안에 빛을 비추시는 사역을 불꽃이 타오를수록 바짝 마르는 장작에 비유했습니다. 절묘한 비유입니다. 그는 또 영혼을 하나님의 빛이 더없이 환하게 비쳐 들게 하는 창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빛을 비춰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청교도 목사들과 신학자들도 새로운 조명의 은혜를 증언했습니다. 한 청교도는 "주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안개와 구름이 걷히고 하나님의 얼굴이 다시 나타나면서 내 영혼은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얻는다. 아, 하나님의 은총은 전보다 더 밝게 빛나고, 위로의 강물은 더 맑게 유유히 흐른다."라고 썼습니다. 먹구름이 걷히며 우리의 영혼이 소생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빛 가운데 행하며 천국의 복된 영광을 미리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아내 조이와 사별한 슬픔 때문에 어두운 수렁에 빠져 하나님의 선하심을 심각하게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아침에 깨어 보니 어둠이 걷히고 하나님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오늘 새벽의 일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내 마음이 지난 여러 주보다 가벼웠다. 열흘 동안 하늘이 잔뜩 찌푸린 채로 무덥고 습하게 정지되어 있더니 갑자기 햇빛이 나면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은혜로 하나님은 이 근심에 빠진 변증자를 다시 자신의 임재의 빛 안으로 들여놓으신 것입니다. 루이스는 당시를 "더 이상 문이 굳게 잠겨 있지 않음이 서서히 느껴졌다. 괜히 내가 성질을 못 이겨 스스로 문을 꽝 닫아버렸던 것일까?"라고 회상했습니다. 괴로운 위기를 통해 루이스는 겸손해졌고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치유

 

영혼의 방향이 회복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지 못하게 된 우리를 방해하던 정서적 상처와 그밖의 이슈들이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인간이란 영혼과 몸이 연합된 전인적 존재이므로 영적인 문제와 심리적인 문제를 따로 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정서적 관계적 결함들이 영적 성장을 방해합니다. 하지만 방향이 회복되는 은혜를 통해 그간의 뿌리 깊은 원한, 열등감이나 우월감, 불신과 괴로운 기억의 영역 등에 새로운 치유가 임하게 됩니다. 파멸을 부르는 육신의 행위들이 밀려나고 그 자리에 생명을 주는 성령의 열매가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간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불안을 버리고 평안을, 두려움을 버리고 경외를,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자신이 못났다는 느낌을 버리고 자신이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라는 확신을 기쁨으로 취하게 됩니다. 남자들은 그간 개발되지 않았던 여성적 특성이 보강되면서, 특히 직관과 공감 능력이 자라고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내보일 줄 알며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반면에 여자들은 힘, 용기, 자기를 주장하는 능력 등 그간 개발되지 않았던 남성적 특성이 보강됩니다. 남녀 모두 예수님의 본을 따라 남성성과 여성성이 더 원만하게 통합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정서적 결함들이 해결되면서 점점 더 온전한 존재가 되어 갑니다. 그렇게 되면 머리로만 사는 게 아니라 풍성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강박적인 행동 습성, 노예처럼 속박하는 중독,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기 쉬운 약점 등에서 해방시켜 주시므로 이제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더 잘 공경하고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 그 누구도 다시 여러분에게 종의 멍에를 씌우지 못하게 하십시오."(갈5:1, 메시지)

 

아직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심리학에 의존하고 인간의 입을 통해 위로를 구하는지 모릅니다. 귀를 간지러 주는 소리를 듣기 원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생의 어려움을 통해,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해 우리는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우리에게 빛이 비치고 주님의 보혈이 흘러들어오면서 우리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가 지기 어렵던 많은 인생의 문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정립되고, 우리는 용기 있는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유의 삶입니다.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삶입니다.

 

샬롬

 

방향이 회복된 신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샬롬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복음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축복이요 동시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샬롬은 예수님이 자신을 신실하게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신 평안의 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고 당당히 외쳤습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가 아닙니다.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다.'도 아닙니다. 상황은 그대로일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부여해준다는 말입니다.

 

청교도 목사인 조셉 시먼즈는 "우리에게는 평안과 위로를 누릴 권리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위해 죽으셨고 자신의 사람들에게 그것을 유산으로 남기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말을 한 그는 엄청난 인생의 어려움을 겪었거나 겪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시몬 베드로를 내면의 깊은 치유와 통합으로 이끌어 영적 방향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전에 고집 세고 완고하던 베드로가 이제 내적 자아에 있어 더 온전함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충동적이던 그가 이제 자신을 절제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불안정하던 그가 이제 강하고 견고해졌습니다. 이전에 종교적 현상에 사로잡혔던 그가 이제 강력한 영적 체험에 감사하되 그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던 그가 이제 확실한 힘을 얻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방향이 회복된 베드로는 더 이상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고 용감하게 주님을 중언했으며, 그분을 믿음의 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샬롬이 그를 이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그렇습니다. 방향이 회복되면 내면이 치유되면서 낡은 습성이 새로운 실체에 밀려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치유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우리의 참자아가 활짝 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분명 자신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나'가 아닙니다. 같으면서도 너무나 달라 사도 바울은 그 새로운 '나'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이처럼 영적 정서적 신체적 치유를 통해 우리는 역동적인 제자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고상한 목적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인정을 받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도 않았는데 곧 바로 교회의 중책을 맡게 됩니다. 기독교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하고 지도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교회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정체성을 허물고 세상의 방식으로 교회를 잠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을 보고 순진한 신자들의 마음이 둘로 나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이 바로 교회의 치명적인 바이러스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교회들은 그런 사람들을 환영하고 특별 대접을 하고 그런 사람들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치장해 주었습니다. 더구나 아직도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부자들의 교회가 되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교회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산산히 부서진 인간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로 회복이 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이 평범한 진리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반드시 내면이 치유되고 방향이 회복되는 은혜의 시간을 거쳐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유영모 선생이 말하는 '몸나'에서 '제나' 혹은 '얼나'로 거듭나는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과정에서 세상에서의 성공과 업적은 자아를 '몸나'에 집착하도록 묶어 두는 엄청난 방해물일 뿐입니다.

 

히브리 예언자는 인간의 전적인 회복을 이렇게 간절히 고대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제 눈에는 송아지라는 말이 주님이 말씀하신 어린아이처럼 보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인간은 샬롬 가운데 기쁨으로 뛰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뜀은 뜀 자체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될 것입니다.

 

바깥으로 향하는 여정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자녀들이 자아에 함몰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고난의 경험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들이 능력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혜는 나누지 않고 그냥 두면 말라비틀어집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내면의 여정에서 변화를 경험한 제자들을 바깥으로 떠밀어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섬기게 하십니다. 우리가 제대로 훈련되어 있고 제대로 반응하면, 영혼이 소생되는 내면의 여정 뒤에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외면의 여정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8b)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자 로버트 쉐버는 "하나님의 신비로 들어가는 내면의 여정과 다른 사람들의 신비로 들어가는 외면의 여정"에 대해 썼습니다. 영적으로 방향이 회복된 성도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외면의 여정에 올라 사심 없이 사람들을 섬기게 됩니다. 치유 받고 다시 빚어진 새로운 피조물들은 다른 사람들도 이 복의 반경에 들어오게 하려는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섬기게 됩니다. 우리 존재의 응어리까지 은혜에 깊이 적셨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이 있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인생 여정에 꼭 필요한 부분인 이 타인 중심적인 삶에서 우리의 모본은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주님은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줄 정도로 섬기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도 당신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나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섬김과 희생으로의 부르심이지 그분이 이루어 놓으신 섬김과 희생의 결과를 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반드시 바깥으로 향하는 여정에 올라 다른 이들을 돌보고 섬기고 마침내 우리의 생명까지도 내어줄 수 있을 정도의 영적 성숙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어둠의 시절에 뒤이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외면의 여정에 오른 인물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요나는 괴로운 불순종의 시절을 지낸 뒤에 마침내 하나님께 순종하여 니느웨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다가 나중에 회복된 뒤로 다시 바깥으로 나와 초대 유대 기독교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삶에서도 내면을 거쳐 외면으로 나아간 비슷한 틀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극적으로 회심한 뒤에 오래도록 광야에 칩거하며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깊어지자, 성령께서 그를 바깥으로, 이방인의 세계로 떠밀어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되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바깥으로 향하는 여정에 오르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 창조의 목적

 

바깥으로 향하는 여정에 들어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사랑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방향이 회복된 신자들을 다른 사람들 중심의 삶, 사랑하는 삶으로 한결같이 떠미시기 때문입니다. 신앙 여정의 초반부에만 해도 우리는 자신에게 집중할 때가 많았으나 이제 방향이 회복되고 변화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하나님의 훈련으로 자기중심성이 뿌리 뽑히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이 그만큼 자란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주로 의지의 결단을 말합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이기심을 버리는 선택입니다. 의사이자 관상가인 제럴드 메이는 "모든 전통의 관상가들이 똑같이 말하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는데, 바로 영적 삶의 관건은 사랑이라는 것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혼의 어두운 밤은 오직 사랑을 키운다는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당연히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조셉 스토웰은 아가페 사랑의 요소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꼽았습니다. "첫째 아가페는 주로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선택, 의지적 결단, 헌신이다. 둘째, 아가페는 분명히 그 초점이 상대방에게 있다 사랑하는 쪽에서 사랑의 대상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다. 셋째, 아가페는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느껴진다.", 즉 아가페에는 분명히 감정과 애정도 개입된다. 끝으로 아가페는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세워준다."  그의 말을 통해 보듯이 아가페는 분명 신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벧후1:4)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인간을 변화시켜 당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당신의 성품을 닮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근원적인 존재의 변화입니다. 인간인 우리가 인간인 그대로 하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일을 위해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그 목적을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영적 성숙의 과정과 목표를 개략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방향을 상실한 배는 아무리 열심히 항해를 해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자신의 영달과 안위를 위해 고의적으로 성도들의 방향감각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를 방주라고 하고 하나님 나라를 죽은 후에 가는 나라로 바꾸어 성도들을 교회 안에 가두고 묶어 놓았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아니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속성이기도 하고 선교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너무도 자연스런 복음이라는 선순환의 과정을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막아 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섬김과 희생을 실천함으로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존재의 변화를 이루어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어지니♡
글쓴이 : 늘 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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