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20일, 혹 누군가 특별한 날로 기억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제겐 잊혀지지 않는 날입니다.
IMF로 인해 회사에 부도가 나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집사님의 법인 대표이사를 맡아주었다가 처참한 몰락을 경험했습니다. 거래처는 물론 은행과 노동사무소 등 정부기관들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았습니다. 모든 재산이 압류되어 경매가 진행되고 마침내 그날 집에서 쫓겨나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동 입구마다 있는 경비실을 지나치는데 경비 아저씨가 한 말 역시 잊혀지지 않습니다. 늘 그토록 머리를 조아리던 머리가 하얗게 센 경비 아저씨가 제게 던진 한 마디는 "잘 사쇼!"였습니다. 힘을 내라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든지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예의없는 투의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기가 막혔지만 쫓겨나는 자로서 할 말이 없었습니다. 차를 타고 떠나는데 흐드러지게 핀 벚꽃잎들이 바람에 날려 눈처럼 쏟아졌습니다. 순간적으로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희망적으로 그 길이 새로운 축복을 향한 여정의 시작이라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어진 삶은 경비 아저씨의 말투처럼 냉정하고 무례하고 거칠기만 한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나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저 나의 소유의 일부가 사라진 것 뿐인데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릴 적 동네 똥개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힘 있는 놈이 힘 없는 놈을 무시하고 제 마음껏 물어댔습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그러했습니다. 그동안 그토록 성원을 보냈던 정부도 정부기관들도, 그토록 중요한 사회기관이라 여겼던 은행이나 기업들이 얼마나 힘센 압력단체요, 불한당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어떤 인정이나 배려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 년 채 못되는 지나간 삶은 몹시 힘이 들었습니다. 만일 주님의 돌보심과 배려가 없었다면 우리는 가족해체와 노숙자로의 전락을 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순간은 도움과 동정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잘 될거야." "크게 쓰시려고 그러시는 거야," "고난이 축복이야." 이런 말들이 사실은 가장 듣기가 싫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는 돈 몇 푼들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불행을 위로해주려는 주위 사람들의 만남 제의 자체를 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과의 단절이 이어졌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괘씸죄'가 하나 더 따라다닌다는 걸 또 배웠습니다.
거친 삶은 연속적으로 상처 입는 삶이었습니다. 상처를 입을 때마다 인생 자체를 포기하라는 압력이 증가했습니다. 꼼짝 못하도록 묶어놓고 전기 충격을 당하는 실험실의 개처럼 그렇게 의지 자체를 말살하는 시련의 시간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슨 충격이 주어져도 일단은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져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나도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서서히 시작외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의 삶 속에 있는 아픔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들의 암울한 마음이 나를 짓누르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무력함이 내 슬픔이 되었고, 그들의 작은 미소가 내 기쁨이 되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런 제 눈에 복음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주님의 긍휼이 보이고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진리가 주는 자유가 무엇인가를 조금씩 맛보아 알게 되었습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 역시 극도로 제한적이지만 하고 싶은 일은 많아졌습니다. 아니 인생 자체가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내 인생은 깨어졌고, 내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는데 그것이 바로 은총임을 희미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힘든 순간은 있었지만, 갈등과 다툼은 있었지만 가족해체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도, 노숙자가 되지 않은 것도, 다른 이들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 것도, 복음을 더 깊이 느끼게 된 것도, 진리가 주는 자유를 즐기기 시작한 것도, 정말 많이도 싸웠지만 아내가 그토록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된 것도, 큰 아이가 대학을 마치고 유학을 다녀와 성황리에 귀국독주회를 마친 것도, 작은 아이가 대학을 마치고 취직을 하게 된 것도, 예배처소가 없어 집에서 몇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교회가 문을 닫지 않은 것도, 월세를 내고 있지만 번듯한 집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플 때도 많았지만 병원엘 가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건강한 것도 ....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주님의 보호하심이고, 인도하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산산조각이 난 거울은 더 이상 거울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난 이후에야 비로소 삶을 이해하고, 복음을 이해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과 주님의 긍휼을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역경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심지어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마음이 산산조각이 난 이후라는 걸 힘든 현실을 통과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하셔서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심으신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산산조각이 난 우리의 마음 사이사이로 주님의 은혜가 흘러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김은진이라는 삼십대 여인이 세월호 사건으로 힘들어 하는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읽으면서 제가 저를 통해 보았던 똑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편지입니다.
저는 2000년 7월 14일 부일외고 수학여행 참사의 생존자 김은진입니다. 방금 오전에 일 끝내고 인터넷에 접속했더니 (안산 단원고) 교감선생님의 비보가 제일 먼저 보이네요. 멀리 타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만무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뉴스를 보면 마음이 저려오는데, 그렇다고 귀 닫고, 눈 감을 수도 없는 일이라서 계속 뉴스만 찾게 됩니다. 아는 게 없고,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어서, 구호품을 보내는 것 말고는 무능한 제가 이러쿵저러쿵 얘기하기도 죄스러워서 아픈 마음만 부여잡고,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이 겪고 있을 참담한 사건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감히 언급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유사한 고통을 아주 오래 전에 그들 나이에 제가 겪었고, 차후 몇 년 몇 십 년 동안, 어쩌면 살아 숨 쉬는 평생이라는 기간 동안 그들이 견뎌야 할 고통의 무게를 제가 약소하나마 공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만 올립니다.
살아 있는 사람도 돌봐 주세요.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생존자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견뎌야 하는 처벌이 죄책감입니다. 내가 보내지 않았다면, 내가 가지 말라고 붙잡았더라면, 이 지긋지긋한 '만약에'라는 가정(假定)이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가슴팍을 짓누르며 숨도 쉴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오래전, 저도 단발을 하고 교복을 입던 그날, 수학여행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던 버스들이 연쇄 추돌사고를 냈고, 화염에 휩싸인 친구들을 구해낼 수 없었습니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의 사망 소식 뒤에 살아남은 부모들이 견뎌야 했던 처벌은 우울증과 이혼이었습니다. 스스로를 탓하고, 배우자를 책망하다, 결국 사망자 부모님 대부분이 이혼 또는 별거를 했고, 조부모님들은 손자, 손녀 사고 후 3년 사이로 많이들 돌아가셨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에게 잊혀지겠지요. 하지만 당사자 가족들이 겪어야 할 후폭풍은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바뀌어도 잠잠해지지 않습니다. 동생과 언니 오빠를 잃은 형과 아우들은 외로울 겁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부모님을 볼 때마다 함께 슬픔에 잠기기도 하고, 감정이 격해지면 "내가 대신 죽었어야 엄마 아빠 마음이 덜 아팠겠지" 하며 어린 나이에 충분히 받지 못한 관심과 사랑이 그리울 겁니다. 모든 당사자에게 이런 참사는 처음이라 서로에게 실수를 할 거예요. 근데 모두가 취약한 상태라 평소라면 아무것도 아닌 말과 행동들이 비수가 되어 뇌리에 박힐 겁니다.
분노의 방향이 아직 외부일 때 전문가의 도움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타인에게 화를 내는 건 그 지속 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정신없는 두어 달의 기간이 지나고, 외부에 분노하고 항의해도 어쩔 수 없음을 인식할 때 화의 방향이 내부로 향하게 됩니다. 분노할 땐 소리라도 치고,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를 합니다만, 스스로 책망하기 시작할 때부터는 입을 열지 않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스스로를 괴롭히다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단원고로 진학하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안산으로 이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살아도 당신의 삶이 아닌 삶을 살게 됩니다.
목숨을 부지한 친구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피해 가족이 받는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주 기나긴 시간이 소요됩니다. 많이 울 거예요. 저처럼 술을 많이 마셔 위 천공이 생길지도, 간헐적으로 생기는 행복감에도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기쁨을 온전히 만끽하지도 못합니다. 죄책감이 가져다주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여정이 친구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를 보고도 공포를 떠올려야 하고, 안내방송이 나오면 건물 밖으로 뛰어나갈지 모릅니다. 제주도 땅은 평생 밟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요. 살아남은 급우들끼리도 서로를 피할 겁니다. 만나면 생각나거든요. 많은 단원고 학생이 자퇴를 할 겁니다. 살아남은 제가 그랬듯 제 친구들이 그랬듯 말입니다. 거대한 자연에 대항할 수 없는 본인의 무능력함을 앞으로 그들이 진출해야 할 사회 모든 전반에 적용할지 모릅니다. 매년 4월 16일이 되면 평소보다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아이들과 가족들이 있을 겁니다. 한국이 만들어낸 인재입니다. 모른 체하지 말아주세요.
사회에 부탁하고 싶습니다. 사건사고가 잊혀졌다고, 당사자도 괜찮을 거라 어림짐작하지 말아주세요. 지금껏 안부를 여쭙는 제 친구 부모님들은 여전히 아파합니다. 세월호 사고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족도 꼭 사회가 알아주세요. 오래 전에 발생한 제 사고가 있던 시절은 사람들이 무지해서 어느 누구도 정신건강의학과 치료가 필요할 거라고 얘기해주지 않았습니다. 피해자 가족들 주위에 계신 분들이 꼭 힘이 되어 주세요. 잠이 오지 않는다 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하면, 머리가 아프다 하면, 2014년이 흐르고 흘러 2024년이 되어도 꼭 손을 잡고 함께 울어주세요. 보듬어 주세요. 그리고 전문가를 찾아 주세요.
저는, 사고를 당했으니 아픈 게 당연하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괜찮아 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절대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피가 나고 아물고 딱지가 되어 떨어져 나갔는데 그 흉터가 그대로 남아, 볼 때마다 열일곱 살 어린 내가, 그리고 이젠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내 친구들이 불쌍해서 눈물이 납니다. 치솟는 불길의 잔상이 망막에 맺히고, 검은 연기가 친구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여전히 어제 일처럼 식은땀이 납니다. 아스팔트 위에 누워 구급차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울기만 하던 나는 내 나이의 앞자리가 두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그 누구 하나 지켜줄 수 없는 지금의 나에게도 화가 납니다.
'이별'의 '원인'을 찾으려고 할 겁니다. 대한민국이 잘못을 했고, 여객선이 잘못을 했고, 선장이 잘못했다 탓할 겁니다. 바뀌는 게 없을 겁니다. 아프기만 할 겁니다. 책망할 원인을 찾다 찾다 결국에는 본인에게 귀인할 겁니다. 바다에 뛰어들지 못한 부모님들은 시간이 지나고, '진짜' 뛰어들지 않았음에 괴로워하고 당신의 몸뚱이를 손바닥으로 주먹으로 칠 겁니다. 그러지 않게 해주세요. 살아남은 아이들은 친구들을 데려 나오지 않았음에 "자신은 평생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확정 지어 버릴 거예요. 내가 무언가를 이루고, 칭찬 받을 일을, 축하 받을 일을 이루어도, 나는 나만 도망친 비겁자라는 전제를 떨쳐버릴 수 없을 겁니다. 그러지 않게 해주세요. 내가 7월이 되면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많은 아이들이 4월이 되면 봄을 즐길 수가 없을 겁니다.
대한민국이 잘못했다, 꼭 고개 숙여 사과해주세요. 외부를 탓할 때, 거기서 멈추게 해주세요. 책임자들이 책임을 피하면, 결국 남은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 잘못뿐입니다. 생존자들과 남은 가족들이 절대 자신을 탓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유튜브를 통해 학부모님들과 생전 제 할머니를 연상시키는 한 할머님의 울음소리를 들었고, 일 하다 말고 화장실로 뛰어가 아주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그 소리치듯 우는 소리의 진동은 제게 있어 가장 잔혹했던 여름날의 악몽을 떠올리게 합니다. 진동은 제 온 피부를 덮고, 가시처럼 파고들어 가슴에 꽂힙니다. 왜 나를 살려주지 않았고, 왜 나를 데려 나가 주지 않았냐고. 왜 너만 살았냐고.
제가 평생 안고 살아가는 죄책감입니다. 세월호 사람들은 짊어지지 않게 해줘요.
"사람이 숨쉬고 사는 게 일상이라서,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그리고 죽는 것도 그 일상 중에 한 부분이라서,
너를 보내는 것도 나에겐, 그리고 네 부모님껜 일상이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 기억은 절대 일상이 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라서
17살이던 내가 27살이 되어도 나는 여전히 눈물이 나고…
나는 네가 보고 싶다." (2010년 7월 14일 일기)
eunjin.kim.0827@gmail.com (제 e메일 주소입니다. 멀리 타국에 있어 손을 잡아줄 순 없지만 남은 가족과 생존한 아이들에게 언제든 힘이 되고 싶어 남깁니다.)
편지를 읽고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이 글이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자신의 이 메일 주소를 적어놓은 대목에서 그녀의 산산조각난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녀가 이처럼 힘과 위로를 줄 수 있는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상호 이해와 진정한 긍휼은 오직 처참한 상황과 시간이 주는 상처와 아픔을 통해서만 생기는 것이라는 확신이 더 깊어집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하는 것이라던 우리네 속담은 삶의 지혜가 담겨 있는 인류의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성공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들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오늘날의 선거방식이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불행을 계속적으로 잉태하게 만드는 제도적 악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하게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하나님 나라는 전혀 복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복으로 드러나는 새로운 사회입니다. 인생의 불행 앞에서 좌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근시안을 가진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그 너머의 새로운 세상이 존재합니다. 유한한 인간에게는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고 확실하게 보기가 어려운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김은진님처럼 깨어진 마음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인생을 박살내버리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은혜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 나라는 인생의 결과에 상관없이 모두가 서로을 위로하고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위로가 넘치는 곳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참람한 시간을 지내고 있는 세월호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다른 김은진님과 같은 분들이 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칠고 냉랭한 사회가 따뜻한 위로가 넘치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힘든 현실을 이겨내고 깨어진 마음을 인생의 축복으로 받는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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