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새로워져야 합니다
본 문 : 계 21 : 1 - 8 2008/10/26주일 낮

만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순간들을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내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것이고, 과거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무언가 새로운 일들을 꿈꾸고, 과거에는 하려고 하지 않았던 무언가 새로운 일들을 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변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내게 주어진 지금의 삶이 크게 변하지 않으리라’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자세는 매우 이중적인 태도입니다. 새로운 것을 꿈꾸면서도 막상 변화는 두려워합니다.

인간이 도대체 얼마나 변화하기를 싫어하고 불평만 하는지를 실감나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건설노동자 두 명이 건설현장에서 집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노동자가 이렇게 불평을 합니다. “정말 도시락에 이 소시지는 먹기 싫어. 이번 주 들어서 벌써 다섯 번째 계속 먹고 있어야 하다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당신 아내에게 다른 것을 만들어 달라고 해.” 그랬더니 이 투덜대던 노동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내가 없어. 음식은 내가 직접 만들지.”

우리는 이 어리석은 사람처럼 자기가 바꾸면 바꿀 수 있는 것조차도 바꾸지 않으면서 자신이 하는 것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 마음속으로는 바꾸기도 원하고 새 것을 얻고 싶어 하고, 무엇인가 달라진 환경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옛 습관과 자기 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열매만 새 것을 따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옛 사고방식과 옛 품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삶과 환경이 변화되지 않았다고 투덜거리며 불평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때로는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에게까지 책임을 돌립니다.
우리 자신은 전혀 바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이런 모습으로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게으름도 한 몫을 하고, 잘못된 고정관념도 우리를 더욱 나태하게 만듭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영적인 게으름에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아. 이런 사람이 도대체 만족스럽지도 않아. 진짜 기쁘거나 평안하지도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길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내 인생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지.”

이것은 인생에 대한 체념 상태이고,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로 막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런 사람들에게 정직과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고, 자기 얼굴에 써 놓은 가면들을 과감하게 벗어 버릴 정직성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기만하고 있는 놀음을 용기 있게 지적하고 직시하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직과 용기가 있으면 결코 절망에 빠지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깨달을 수 있다고 지적해 줍니다.

우리들은 때로 체념상태에서 일종의 정신적인 장애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등 뒤에 꼬리표를 달고 이마에 낙인을 찍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 저항할 생각도 안하고 변화를 포기하고 자기연민에 빠져들고 맙니다. ‘나는 안 되는 사람이야. 나는 비난 받을 사람이야. 나는 게으른 사람이야. 나는 해봤자 어차피 못하는 사람이야. 나는 상처 받은 사람이야. 나는 무능력자야.’ 자기 자신에게 이런 낙인을 찍어 놓고 변화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도 불평하고 투덜대기만 하는 모습이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진솔한 모습들입니다.

때때로 인간이 얼마만큼 보이지 않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자신의 악을 변화시키지 않는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셜록 홈즈’ 탐정물의 저자인 아더 코난도일(Arthur Conan Doyle)이 자기와 친한 친구 12명에게 짓궂은 장난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12명의 친구들에게 간단한 전보를 보냈는데 그 전보의 내용은 단 두 마디였습니다. ‘즉시 도망 쳐라. 모든 것이 발각됐다.’ 그러자 전보를 받은 12명의 친구들 모두가 24시간 안에 국외로 탈출했습니다.

그는 인간은 누구나 악을 행하고 있고, 인간에게는 이처럼 버리지 못하는 죄책감이 있다고 말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양심을 억누르는 죄를 짓고 있으며 그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자포자기적인 인간, 자기 연민 속에 빠져 있는 인간, 자기 속에 있는 상처를 그대로 두면서 ‘스스로 나는 이런 인간이야.’라고 되뇌이며 전혀 바꾸려고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바뀌어 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인물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작품인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모든 일을 넉넉히 이기는 사람으로 변화할 수가 있을까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고치려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야, 좀 변화되어라. 너를 바꿔봐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봐라.”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셔도 잘 바뀌지 않은 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떤 심리학자가 10명의 지원자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를 실험해 보았습니다. 10명의 사람들 각각의 얼굴을 분장하면서 하나씩 얼굴의 흉터를 그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원자가 각자 자기의 흉터를 보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보기에도 정말 보기 싫은 흉터 있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분장사가 분장한 흉터가 지워지지 않도록 파우더를 발라주는 척 하면서 지원자가 전혀 모르게 흉터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나가는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관찰하게 했습니다.
드디어 지원자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본 반응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원자들 모두가 한 결 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아주 무례하게 쳐다보면서 지나갔고, 내 얼굴을 피하면서 지나갔으며 내 얼굴의 흉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미 흉터가 지워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원자들은 흉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흉터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남이 그냥 쳐다보는 것도 자신을 의심하면서 보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지원자들처럼 아무 것도 아닌 말을 나의 잘못된 상처를 지적하는 것으로 알고 분노하며 견디지 못했던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나의 모든 것을 다 용서하셨는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님은 내 상처를 이미 다 싸매주셨는데, 자신의 상처는 결코 싸맬 수 없다고 확정지으면서 세상을 원망하고 분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이 다 용서하셨어도 내 마음 속에 스스로를 아직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새롭게 해주셨는데 불구하고 아직도 마음속의 상처 때문에 끙끙 앓는다면 그곳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본문 말씀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의 섭리와 계획을 눈으로 목격하고 귀로 듣습니다. 몸의 모든 감각을 통해서 생생하게 역사의 마지막인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과 심판의 현장을 목격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저 하늘로부터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해 준비한 아름다운 예쁜 모습처럼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을 두 눈으로 볼 때 들리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이 말씀은 영어성경에 보면 현재진행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I'm making everything new(나는 모든 만물을 지금 새롭게 하노라).’ 우리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마지막 종말 때에 이루어질 것이지만 우리에게 지금 앞당겨서 그것을 경험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새 창조의 역사를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 역사를 지금 경험하고, 지금 감사하고, 지금 새롭게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의 새로움이란 옛것이 다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옛것이 다 지나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리의 눈물을 모두 닦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눈물은 인간 고통의 절정이요, 슬픔의 압축입니다. 고난의 여정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인간의 눈물입니다. 우리에게 쌓인 옛 것의 모든 상처, 열등감, 우리가 당했던 모욕과 치욕, 우리의 허무와 탄식, 우리를 아프게 했던 질병과 죄책감의 이 모든 슬픔과 눈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닦아주시고,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과 새로움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자녀인 것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나를 찾아오셔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구속함을 받는 것이 믿는자들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용서 받지 못한 사람이야.’라고 주장하고 싶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기에 못 박아서 보혈의 피를 흘리심으로 내 상처를 깨끗하게 치유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있는 한 맺힌 분노를 계속해서 쌓아 두고 터트리는 것은 새로운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와 함께 동행하겠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보면, 491주년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지금부터 491년 전,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제하며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죄악으로부터의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10월의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개혁의 선두주자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회심 체험을 하면서 제일 크게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서 ‘여기에 누가 사나요?’하고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마틴 루터가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사십니다.”
이처럼 누군가가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서 ‘여기 누가 사나요?’하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당시 로마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대항해서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루터에게는 삶을 위협하는 매우 힘든 과정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내 안에 계신다는 놀라운 확신 속에서 종교개혁을 하며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되는 역사를 지속한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새로워지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것들을 다 숨기시고, 우리의 고통의 절정, 슬픔의 절정, 낙심의 절정인 눈물을 친히 닦아주시고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내가 네 마음 안에 함께 살겠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신 것에서부터 모든 새로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나를 억누르고 억압했던 옛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내가 지녔던 교만, 나를 뽐내고 과시하는 옛 것에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새롭게 시작해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절대로 좌절과 실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거나 과거의 성공과 번영의 신화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날을 앞당겨서 오늘 지금 이 순간 경험해야 합니다. 그때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동행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변화를 추구하시고 새로워지는 역사를 이루어 가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하나님의존재와 속성을 아십니까?   글쓴이 : 첫사랑


 

천상의비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출처 : 천상의 비밀
글쓴이 : J_카타리나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