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독서, 복음 묵상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하루 일찍 주일 강론 올립니다.
무사의 칼과 하느님의 폭풍우
오래 전에 일본에 훌륭한 무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폭풍우에 배는 금방이라도 파선될 위기에 있었습니다. 아내가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갖고 있던 칼을 빼어 들고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 칼이 무섭소?”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그 칼이 사랑하는 당신 손에 있는데 왜 무섭겠소. 그런데 이 상황에 왜 갑자기 칼을 빼어 나에게 보여 주시는 거요?”
무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칼이 무섭지 않듯이 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폭풍우가 무섭지 않소. 이 칼이 내 손에 있듯이 이 폭풍우는 하느님의 손에 있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절대로 우리를 해치지 않으실 거요.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 말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폭풍우는 잠잠해지고 미풍이 불어왔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은 지녀야 하겠지만 두려워 떨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지었기에 하느님이 두렵다고 합니다. 죄를 지어 두려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죄는 피해야 하겠지만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죄를 짓고 하느님을 피해 숨는 그 행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오히려 용기를 갖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 앞에서 잘못했노라고,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도 그렇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은 우리와 다르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작은 머리 안에 하느님을 집어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리의 사고 안에 다 잡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어떻게 했습니까?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하느님 눈에 띄지 않게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 숨었는지 몰라서 부르신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이 스스로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상처가 햇빛을 쏘여야 낫듯이 죄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하느님을 뵈어야 낫을 수 있기에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아담은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답했습니다.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용기를 지녔기에 아담은 죽지 않고 다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담은 바로 사람을 지칭하고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아담과 예수님, 죄와 은총의 비교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가 죽음을 불러들였지만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은 아담이 지은 죄의 경우와 실상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설파합니다.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죄 때문에 절망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탄의 간계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 때문에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그것을 사탄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하느님의 자비하심, 그분의 사랑, 그분의 은총을 믿고 훌훌 떨고 일어나 그분 안에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설령 몇 번이고 죄로 인해 넘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때마다 우리는 오늘 화답송의 시편 말씀처럼 “주님, 주님의 자애가 너그러우시니 저에게 응답하소서. 주님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를 돌아보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는 죄가 있는 곳에 은총이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화답송의 시편을 좀 더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 마음에 드시는 때에, 저의 기도가 주님께 다다르게 하소서. 주 하느님, 주님의 크신 자애로, 주님 구원의 진실로 제게 응답하소서.”
여기서 ‘주님의 마음에 드시는 때’는 공동번역에서는 ‘은혜로운 때’로 옮겼는데 새 [성경]에서 ‘주님의 마음에 드시는 때’로 옮겼습니다. 새 [성경]이 더 의역을 했습니다. ‘주님 마음에 드시는 때’나 ‘은혜로운 때’는 모든 것이 잘 되어나갈 때라기보다 오히려 바로 당신의 은총이 필요한 때, 다시 말해 우리가 죄를 지었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때입니다. 그 때야말로 하느님께 나아가서 용서를 청하며 자비를 빌고 당신 사랑에 의탁하는 때이기에 참으로 은혜로운 때입니다.
복음서 안에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이 수없이 나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두려움은 우리를 작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바로 불안의 전주곡이고 불안은 옛말처럼 마귀의 운동장입니다. 불안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쉽게 유혹에 빠집니다. 하느님께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유혹, 책동입니다. 죄를 짓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잘하는 일로 착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찬란한 착각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착각입니다.
두려움은 어디에서 옵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두려워하는 까닭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이신 지, 하느님이 얼마나 크신 사랑이신 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참으로 사랑이신 분이라는 것, 용서 자체이신 분이시라는 것을 안다면 두려워 숨지 않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서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용서를 청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때마다 용서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벼룩이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같은 죄를 자꾸 짓고 또 고백성사를 보느냐고 말입니다. 실은 자기가 쩨쩨하니까 하느님도 그렇게 쩨쩨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제가 번역한 ‘일상 삶 안에서의 영신수련’이라는 책에 있는 작은 환상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립니다. 제목이 ‘가장 처참한 죄인에 대한 작은 환상’입니다.
너무나 무서운, 누구도 죄목조차 댈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을 상상한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였다. 그는 그러한 죄를 범하고 또 범했다. 그러나 마침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심했다. 그는 하느님께 가서 고한다.
“저는 죄를 뉘우칩니다.”
하느님께서 물으신다.
“무슨 죄인데?”
그는 자신의 죄목을 댄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래, 나는 네가 자신의 죄에 이름을 붙이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다려 왔다. 지금 네가 네 죄를 뉘우치니 기쁘기 그지없다. 이제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 그 사람은 기쁨에 넘쳐 돌아왔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은 그 무서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또다시 죄를 짓고 말았다. 그는 실로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수치심과 절망감으로 그는 비참함을 맛보아야 했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그는 두 번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 겸손하게 고했다.
“주님, 저는 또다시 그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물으셨다.
“무슨 죄인데?”
하느님은 우리가 한번 용서를 청한 죄를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일곱 번 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용서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거꾸로 당신도 용서에 한계를 두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하느님 안에서 늘 기쁘게 살아갑시다.
'하나님나라(신앙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신앙언어의 위기 (0) | 2008.07.11 |
---|---|
[스크랩] ★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0) | 2008.07.08 |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0) | 2008.05.28 |
[스크랩] * 치명적으로 상처를 입히는 것들 * (0) | 2008.05.12 |
[스크랩] ★ 타인의 허물을 감당함에 대하여 (0) | 2008.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