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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완전한 의의 삶 (주석1)


1-12절, 팔복


[1, 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예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소위 '산상보훈'(山上寶訓)은 믿지 않는 일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3절부터 나오는 소위 팔복(八福)은 둘로 나눌 수 있어 보인다. 처음 네 가지 복은 특히 구원을 위한 준비, 혹은 구원 받는 자의 상태라고 생각되고, 나머지 네 가지 복은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볼 수 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신[영]이 내게 임하셨으니[내 위에 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66:2, ". . .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돌보려니와]."


여기 가난은 물질적 가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가난, 심령의 가난을 가리킨다. 대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 중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많고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들 중에 심령이 부요한 자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반드시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니고, 물질적으로 부요하다고 반드시 심령이 부요한 것이 아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든지 부요하든지 간에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이요, 심령이 부요한 것이 화이다.


마음의 부요와 가난이란 지식과 깨달음의 면을 말한다. 마음이 부요한 자는 자신의 가난하고 가련한 실상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무지와, 부도덕, 불의, 종교적, 도덕적 무능력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평가하며, 주의 은혜와 주의 의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항상 교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불신앙과 불순종은 결국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높이고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라는 것이, 그리고 자기가 의뢰하는 자기의 돈이나 세상의 것들이라는 것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 그것들이 환란날에 자기를 구원할 것인가? 그것들이 지옥심판의 불에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가? 그것들이 영원한 행복을 약속할 것인가? 아니, 아니, 아니다!


믿음은 가난한 심령에서 시작된다. 겸비한 자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심령이 가난한 자는 구원의 길에 들어선 모든 성도의 모습이다. 누구든지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의 은혜요,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이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니라"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의 소유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복되다는 말씀이다. 심령이 가난치 않고는 천국의 소유자가 될 수 없다. 마태복음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회개하여)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이 겸손한 행위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가는 자, 곧 구원 받는 자는 누구나 심령이 교만치 않고 겸손하다는 것 뿐이다. 이렇게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그의 복음을 믿게 된다. 교만한 자는 믿을 수 없고 오직 겸손한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다.


물론, 구원받은 자의 심령은 계속 겸비해야 한다. 자신의 부족과 무능을 계속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계속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여러분은 참으로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한가, 혹 자신의 부족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 자신을 바르게 판단하고 평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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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완전한 의의 삶 (주석2)


심령이 가난한 자 -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이 구절은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시 37:14;40:17;69:29; 잠 16:19). 이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들과 연관되어 있다(사57:15;66:2). 더욱이 사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눅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파탄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시 69:29;70:5;74:21; 사61:1; 습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37:14;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이다(시 34:6,18;51:17; 사66:2).


복이 있나니 -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아쉬레'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으나 여기서는 주.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한다. 이 단어의 배후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들면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핍박받음'등)의 원천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할수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으로 나타낸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준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이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이다. 한편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17;8:29;12:28).


5장: 완전한 의의 삶 (주석3)


Ⅰ. "심령이 가난자 자"는 복이 있다(3절). 겁 많은 심령(poorspiritedness, 역주:심령이 가난한 - poor in spirit와 비슷한 단어로 구성되어 있음)은 사람들을 축복 받는 것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므로 죄와 덫 ─ 비겁과 천박한 두려움, 정욕에 대한 자발적인 굴복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심령의 가난은 영혼의 은혜스로운 성벽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게 되는 것이다.


1. "심령이 가난한"이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면 기꺼이 세상적인 부귀를 비울 수 있는 완전히 가난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낮은 조건일 때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조건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세상에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교만하고 불평하며 운명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빈곤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며, "비천에 처할 줄도"(빌 4:12) 알아야만 한다. 우리에게 가난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만족해야 하며 그 불편은 계속적으로 참아야 하며,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하며, 그것을 최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세상적인 부귀에 무관심하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그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번영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닥쳐올 손실들과 실망을 즐겁게 참는 것이다. 그것은 특별히 가난을 서약하지만 국가들의 부귀를 독점하는 로마 교회에 있는 자들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제공한 것을 팽개쳐 버림으로써 교만과 위선으로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서는 부요하다고 할지라도 "심령은 가난"해야만 하며, 즉 가난한자의 위치에까지 낮아져서 그들의 연약함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그들을 동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가난을 기대하고 준비해야만 한다. 과도하게 두려워하거나 그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난이 특별히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을 환영해야만 한다(히 10:34). 욥은 "심령이 가난한 자"였으므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취해갔을 때"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2. "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겸손하고 비천한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무엇을 가지든지, 하든지 자신을 비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약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자나 교만한 자와는 반대되는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견으로 어린아이와 같으며 연약하고 어리석고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이다(18:4; 19:14).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자신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였다(계 3:17). 즉 그들은 "정신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심령은 부요"하였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은사와 은혜면에서 있어서 매우 탁월하여 "정신적으로는" 부요하였지만 "심령은 가난하였으며," 자신을 "사도들 중 가장 작은 자"나 모든 성도들 중 제일 못난 자, 그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지극히 멸시하는 자로 보며, 남을 가치 있게 여기며, 자신을 그들보다 낮은 자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선을 행하기에는 값싸고 비열하고 보잘 것 없는 자로 기꺼이 자처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위대하시며 우리는 비천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그는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스러우며 그는 모든 것이고 우리는 하등의 보잘 것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그 앞에서, 그의 능력있는 손 아래에서 겸손히 낮추는 것이다.


3. "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의로움과 능력은 결코 신뢰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창의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할 수 있으며, 우리의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를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세리가 가난한 죄인에게 긍휼을 부르짖었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곧 이 "심령의 가난"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난하다고 불러야만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부족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문에서 구걸하며, 언제나 그의 집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1) 이 심령의 가난은 기독자의 은혜들 중에서 맨 처음에 두어졌다. 철학자들은 겸손(비천)을 그들 중의 덕 중의 하나로 취급하지도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그것을 맨 처음에 두고 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학교에서 처음으로 배우는 과목이며, 심령의 가난은 첫째 복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그 밖의 모든 축복들의 기초는 겸손(비천)에 놓여져 있다. 높이 세우려는 자는 낮게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복음적 은혜를 위한 맨 처음의 두드러진 준비이다. 그것은 씨를 받아드리는 데 알맞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복이 있다." 그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은혜 스럽게 여기신다. 그들은 그의 작은 자이며 그들의 천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더욱 더 은혜를 주시며, 그들은 최고의 안전한 생을 영위하며 편안함을 가지며,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잘못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교만한 영혼은 언제나 불안하다.


(3)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라." "은혜"의 왕국은 이와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만이 "가난한 자의 모임"(시 74:19)이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되기에 적합하다. "영광"의 왕국은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들 자신에 겸손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낮추실 때 그에게 응하는 자는 이와 같이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크고 높은 심령들은 "세상의 왕국"의 영광을 취하지만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종하는 영혼들은 "하늘의 왕국"을 얻는다. 비록 부자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부귀를 가지고 선을 베푸는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차 올 때를 위하여" 좋은 담보물을 이와 같이 쌓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행을 할 수 있는 자금을 가지지 않는 가난한 자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물론 동일한 행복이 유용하게 부요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가난한 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만일 내가 만족하게 그를 위하여 돈을 쓸 수 없으며 부족하다면 그것도 보상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에 우리는 좋은 주인을 섬기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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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완전한 의의 삶 (주석4)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여기 "심령"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프뉴마 라고 하는데 영혼의

근본적 부분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인격의 골수와 같은 극히 내부적인 영혼 부분에서

영적 궁핍을 느끼는 자들이다. 데오도레 즈안은 여기 "가난한 자"란 말 프토코이는 단순히 어떠한

빈핍 상태에 있는 자가 아니고, 그런 가난한 상태에서 견디어 가는 자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면 이 영적 수난자는 누구냐? 이는 구약에서 말한 "가난한 자"와 같은 자들이니

 

(1) 자기의 할 수 없는 처지와 하나님 밖에 도와 줄 자가 없음을 아는 자들(사61:1)

(2)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 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의 박해를 받는

자들(사66:2)

(3) 죄를 인하여 상심하며 회개하는 자들이다.(사66:2). 그러면 이들은 자기의 의가 없는 줄 알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고 사죄를 구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는 사상이 다른

자들이다.

 

복이 있나니. - 이 말씀은 헬라원어로 마카리오이라고 하는데 행복의 최고급을 이름이다. 특히 이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인간이 지은 것이 아니다. "천국"은 헬라 원어로 헤바실테이아톤 우라논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영적 통치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에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천국이 하나님의 영적

통치를 욧점으로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 이다. 이 영적 통치를 천국의 첫째 요소로 잡은 것은

유명한 성경 신학자 겔할더스 보 스 박사도 힘있게 말한 바이다. 천국이 현세에서는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참 교회로도 나타났고, 내세에서는 구속이 완성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같이 있을 곳이다.


    천상의비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출처 : 천상의 비밀
    글쓴이 : 카타리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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