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무시당하시는 하느님 7


adonde no hay amor, ponga amor, y sacaras amor.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두어라.
그러면 너는 사랑을 얻을 것이다."

▲ 십자가 상의 예수 그리스도 / 뷔르츠부르크 노이뮌스트 성당

    구 범어동 수도원의 도서관은 3층 복도의 가장 후미진 곳에 있습니다. 양옆으로 많은 서적들을 진열해 놓았는데, 도서관을 사이에 두고 복도에는 하나의 십자가가 걸려 있었습니다. 피투성이 상태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늦은 밤 갑자기 찾아야 할 책이 생각나 도서관엘 들러야겠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사실 그 십자가가 두려워서 망설이던 적이 많았습니다. 왜 수도원에서는 하필 그 후미지고 어두운 곳에 그렇게 처참한 몰골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걸어 놓았을까? 아마도 어느 누군가로부터 그 십자가를 선물 받았을 것 같습니다. 선물을 한 사람의 성의를 무시할 순 없고 어디에 걸어놓으려 해도 마땅히 둘 곳을 찾기도 어려우니 외부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는 구석진 곳, 그 후미진 3층 도서관 구석에 처박아 놓듯이 걸어 놓은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어느 누군가가 그렇게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아 후미진 곳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우리 자신이 그렇게 어느 구석에 버려진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 십자가가 유난히 기억에 남습니다.
   

 

서두에 소개한 말씀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하신 말씀입니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봅니다. 사랑이 없는 곳이란 어떤 곳일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b)라고 성서는 말씀하십니다. 결국 사랑이 없는 곳이란 하느님이 없는 곳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풀이는 또한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 세상 어디에고 아니 계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이 없는 곳이라는 개념을 옳게 풀이한다면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 즉 하느님이 무시당하시고 있는 곳이라 풀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시당하시는 하느님이라……. "네가 무시당하는 그 곳이 바로 네가 사랑을 둘 공간이다. 그래야 너는 사랑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바꾸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당신을 무시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두십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로부터 사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이 무시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무시당할 때는 참으로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하느님이 무시당하실 때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시당하시는 하느님, 그러면서도 무시하는 그에게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렇게 나는 무시당하면서도 끊임없이 다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얼굴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서 나는 하느님의 참 모습을 읽고 있습니다.


▲ 십자가에서 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 토만 부르크메어. 1511.


   성서에서 예수님이 찾았던 사람들은 무시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파르나움의 하혈병에 걸린 여자, 간음하다 걸려 돌로 쳐죽임을 당할 뻔한 여자,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났던 동네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던 여자, 동쪽으로부터 창녀 취급을 당하며 철저히 무시당하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 등 정말 무시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나 다 아름다움과 빼어남에 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끌림이 진정한 사랑이라 불릴 수 있을까요? 진정한 사랑은 누더기와 넝마처럼 헤어진 인간성을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앞의 말씀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말을 만들고 싶습니다: "아름다움이 없는 곳에 아름다움을 두어라. 그러면 너는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다." 누군가를 돌보고 위해 주는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돌보아 줄 이 없고 위해 주는 이가 없으면 참 보기 싫고 추해집니다. 그래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사랑이 전해지는 곳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얼굴이다" 라고 프란치스코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을 아름답게 보아야 합니다. 언제는 아름답고 언제는 추한 것이 하느님의 얼굴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간에 그의 얼굴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멀어지면 그 사람의 얼굴, 그 사람의 이미지에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좋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하는 말 한마디가, 그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추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이 어떠한 상태에 계시든지 그분 안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보아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초월적인 빛 안에서 전지전능하신 능력 안에서만 볼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내려가고 내려가신 바로 그 심연의 깊은 어두움 안에서도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은 살아있는 생명 뿐 아니라 죽음에서조차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즐거울 때나 기쁠 때만이 아니라 공포 속에서도, 아무런 매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는 추함 속에서도 찾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가 추하다고 부르는 모든 것도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포함시켜야만 합니다. 나는 이러한 아름다움, 즉 무시당하시는 하느님 안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났습니다. 나는 세 번째 독일 여행을 독일의 남쪽지방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여행 중에 내가 만난 일상의 신화는 바로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무시당하시고 처참하게 업신여김을 당하시는 예수님, 그렇게 죽어야만 했던 예수님, 그 예수님을 나는 이번 가을 독일 여행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 갈바리 산의 예수 그리스도 / 폴 고갱. 1889.


   슈반가우
1)에서 자동차로 비가 오는 국도를 달리고 달려 보덴제2) 로 들었습니다. 보덴제는 독일과 스위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국경으로 두고 있는 아름다운 호수입니다. 호수의 둘레가 모두 273km입니다. 독일에 속한 부분이 173 km, 스위스에 속한 부분이 72 km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속한 부분이 28 km입니다. 자동차로 일주하노라면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에 어쩔 줄 몰라 할 것입니다. 슈반가우에서 퓌센을 거쳐 동쪽으로 동쪽으로 산안개가 드리워지고 가랑비가 내리는 산악지대를 따라 차를 몰고 몰아 가면 바다와 같은 큰 호수가 나옵니다. 보덴제입니다. 보덴제에 들어가는 입구에 아름다운 섬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바로 린다우3) 섬입니다. 린다우 섬으로 들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는 섬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갑니다. 에반젤리쉬 교회인 스테판교회4)가 있고 가톨릭 교회인 스티프스교회5)가 있는 광장을 가로질러 맞은 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외관이 매우 화려하게 꾸며진 아름다운 이 건물이 'Haus Zum Cavazzen'입니다. 바로 린다우 시립 미술관입니다. 린다우 시립 미술관의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나 있는 사무실에서 가방을 맡기고 학생증을 제시하고는 2.50 마르크에 입장권을 구입합니다. 1층 전시실에는 여성을 주제로 한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호기심 어린 눈길로 작품 속의 여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둘러본 후 2층 전시실을 둘러보고 3층으로 올라갔습니다. 3층 중앙 홀에 많은 종교적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아주 애처롭게 나무 판넬로 만들어진 그림 작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무 애처로워 민망스럽기까지 한 작품입니다. 그림 내용은 돌아가신 예수님을 막 십자가에서 내려 무덤으로 들여 넣는 장면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머리에서부터 피가 흘러 내리고, 왼손 오른손에는 못에 찔린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립니다.

창에 찔린 오른쪽 옆구리 상처에서는 눈에서 눈물이 흐르듯이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그리고 온몸에는 숱한 자국에서 피가 방울 방울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고 울상입니다. 돌아가신 분의 눈은 닫혀있지 않고 조금 열려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의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그림에 나와 있는 인물들의 모습도 참으로 침통합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천사와 마리아, 그리고 요한이 함께 예수님의 피 흐르는 오른손을 붙잡고 있고, 요한은 왼손을 붙잡고 있습니다. 돌아가셨기에 잡고 있지 않으면 쓰러질 것만 같은 예수님을 부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천사의 손이 어디를 잡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시 비통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림 아래 쓰여진 작품의 연대와 제목을 보았습니다. 1420 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눈물 흘리시는 그리스도>6)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아래로 보이는 글자는 <눈물 흘리시는 린다우의 스승>7)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이, 숨이 끊어진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다니요? 살아있는 사람들의 측은지심이 움직여 결국 돌아가신 예수님을 살아있다고 바라보고 있기에 생긴 착오인지 모릅니다. 우리와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아파하시던 예수님, 그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숨이 끊어지셨지만 여전히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 나와 그렇게 함께 하시던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돌아가신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을 대신하여 마리아와 요한이 그리고 천사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니 그들이 흘리는 눈물이 바로 이 그림의 주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평화롭지 못합니다. 무시당하시고 무시당하신 처참한 몰골, 이 예수님의 얼굴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름다움을 찾아야 합니다.

천상의비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민성기 신부님의 『하느님의 결혼식』중에서

출처 : 천상의 비밀
글쓴이 : 카타리나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