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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룸부스는 아메리카를 침범하였다


 

하와이(Hawaii)를 들를 때면 꼭 빼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하와이 대학교 앞의 사회과학서점, 「Revolution」이 그곳입니다. 서점 중앙으로 마오쩌뚱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관련 서적을 판매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곳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제3세계에 관한 아픔을 대변하고 있는 책, 잡지, 녹음 테이프, 티-셔츠, 팜플릿 등을 전시하고 판매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희귀서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학을 공부하던 학창 시절에 읽고 싶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쉽게 구할 수 없었던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Imperialism)과 프레드릭 엥겔스의 「사회주의」(Socialism : utopian and scientific)를 비롯한 사회사상의 뿌리가 되었던 책들을 구입합니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의 의식화를 다룬 몇 권의 소설책을 구입합니다. 그리고는 한쪽 끝으로 진열해 놓은 티-셔츠를 바라봅니다. 인디안들의 삶을 그려 놓은 티-셔츠에 새겨진 글귀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읽어봅니다 :


콜룸부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는 아메리카를 침범하였다.

(Columbus didn't discover America.

He invaded it.)


   

그저께 구유를 치우는 데 저도 조금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장식들을 거두어 내고 이끼를 벗겨내고 하면서 벽돌을 나르게 되었습니다. 「벽돌 나르기」라? 불현 듯 솔제니친의 소설 「수용소 군도」가 떠올랐습니다. 솔제니친은 자신이 체험한 상황을 소설 「수용소 군도」를 통하여 당시의 소련의 현실을 서방세계에 고발하였습니다. 수용소 생활 중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벽돌 나르기」였습니다. 노역하는 시간이 되면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벽돌을 다른쪽 구석으로 옮겨 쌓아야 합니다. 다른 쪽 구석에 다 쌓아 놓으면 다시 원래 자리인 처음 자리에로 다시 옮겨 쌓아야 합니다. 옮겨 쌓고는 다시 또 제자리로 옮겨 쌓습니다. 그렇게 쉼없이 하루 온종일 옮겨가며 쌓습니다. 아무런 의미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정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미쳐 버릴 것입니다. 전혀 창조적이지 않은 일을 계속해서 해야 하는 무미건조함, 무의미한 짓거리를 아무런 의식도 없이 행해야 하는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피를 말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요, 무엇인가를 창조적으로 완성하는데 보람을 느끼는 동물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솔제니친은 이 「벽돌 나르기」를 고문 중의 가장 큰 고문이라 하였습니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중 일본군에 포로가 된 영국군들은 일본군의 명에 의해 군사요충지인 콰이강에 다리를 놓아야 했습니다. 비록 적군의 명에 의해 다리를 놓아야 했지만 영국군들은 열심히 다리를 놓습니다. 온 힘을 다해 다리를 완성하고 다리 위로 차량과 전차가 지나갈 때 그들은 환호성을 올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하나의 다리를 건설한 것입니다. 창조적인 일을 통해 그 힘든 작품을 완성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적이니 아군이니 하는 어휘는 소용이 없습니다. 단지 창조적인 일의 완성, 그것만이 영화 전편을 흐르고 있는 주된 정신입니다. 「벽돌 나르기」와 「콰이강의 다리」, 같은 벽돌이 모티브로 등장하지만 서로 다른 이미지로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대단합니다.

   


해남 고당공소를 떠나 완도로 들었습니다. 보길도(甫吉島)로 가기 위해서. 1월 8일 정오, 낮 열 두시에 완도항을 떠난 완도 카페리 3호(No.3 Wan do CarFerry)는 1시간 50분을 달려 보길도에 닿았습니다. 다시 전남 78바 4201 보길 공영버스를 전세내어 천연 기념물 제 40호인 아름드리 소나무로 숲을 이루고 바둑돌 크기의 갯돌로 해변을 이룬 예송리 바닷가를 거쳐 고산 윤선도 선생이 머물렀던 부용동에 들었습니다. 고산 선생은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작품들을 통하여 국문학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용동을 다녀 온 이후로 너무도 큰 아픔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고산 선생은 보길도 주변의 많은 곳에 이름을 지어 놓았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노화도(盧花島)입니다. 보길도에서 바로 보이는, 배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노화도의 원 이름은 노아도(奴兒島)입니다. 고산 선생이 붙인 이름입니다. 고산 선생은 세상이 싫어 탐라로 가는 길에 스쳐 지나가는 섬이 너무 아름다워 배를 돌려 보길도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변으로 인하여 영덕, 기장 등으로 유배생활을 한 후 세상을 떠나 지낼 수 있는 휴식처로 보길도를 생각하였고 결국 보길도에 들러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연을 벗삼아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가 사랑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사회제도상으로 양반이었고, 그가 보길도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를 부양하고, 그에게 시중을 드는 노예들로 여겼습니다. 부용동에서의 그의 삶은 주색잡기를 일삼으며 그의 외로움을 해소시켜 줄 노리개로 그곳 사람들을 다루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그가 붙인 노아도(奴兒島)인 것입니다. 노아도는 노비(奴婢) 할 때의 노(奴)자에 아이 할 때의 아(兒)를 이름하는 즉 노예들이 사는 마을, 노예들이 사는 섬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세월이 흘러 고산 선생은 떠나가고 노아도 사람들은 그 더러운 이름을 버리고는 노화도(盧花島)라고 불렀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갈대 노(盧) 자에 꽃 화(花) 자를 써서 노화도로 바꾼 것입니다. 노예들이 사는 섬에서 갈대꽃이 피는 섬으로 된 것입니다. 결국 저는 처음으로 보길도를 찾았으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걸맞지 않는 보길도와 노화도에 관한 옛이야기를 통하여 역사의 진실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보길도를 찾으면서 왠지 고산 윤선도 선생을 콜룸부스에 비기고 있는 제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결국 저는 보길도를 찾아 돌아 오는 길에 다시금 하와이에서 구입하여 의미를 부여하며 고민하고 있는 티-셔츠에 새겨진 글귀를 읊조려 봅니다 : 콜룸부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는 아메리카를 침범하였다.

   

완도로 돌아 오는 배편으로 보길도를 찾은 허탈감과 함께 밀려 오는 피로감으로 1시간 30분 내내 뒤척이며 잠을 자야 했습니다.

   

1월 9일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위치한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艸堂)을 찾았습니다. 정자인 천일각에 서서 다산의 마음이 되어 봅니다. 갈대로 우거진 강진만을 바라보며 흑산도로 유배간 작은 형을 그리워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다산 초당을 축으로 하여 동암, 서암을 마련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다산 선생이었습니다. 목민심서를 비롯한 숱한 저술을 남긴 다산 선생은 유배지에서의 아픔을 후학을 가르치며 달랬습니다.

   


고산 선생은 유배지로서가 아니라 휴식처로 보길도를 찾았지만, 다산 선생은 휴식처로서가 아니라 유배지로 강진을 찾았습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보길도의 부용동을 찾고 있고 또한 강진의 다산초당을 찾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각도에서 부용동과 다산초당을 바라봅니다. 부용동을 찾으면서 왠지 모를 허탈감이 드는가 하면, 다산초당을 찾으면서는 그와 정반대의 뿌듯함을 지닙니다. 그러면서 역사의 흐름 안에서 저의 오늘의 모습을 비춰보고, 내일의 후배들이 바라볼 제 모습을 미리 앞당겨 바라봅니다. 역사는 흐르고 있음을 강하게 느낍니다.

   


이제 대연동입니다. 저는 이곳 대연동 390번지에 앉아 콜룸부스를 생각해 보고 고산 윤선도 선생을 떠올리며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보길도, 노화도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곤 하와이, 서점 「Revolution」에서 구한 티-셔츠의 글귀, "콜룸부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는 아메리카를 침범하였다"를 "고산은 보길도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는 보길도를 침범하였다"로 바꾸어 확인합니다.

   

여전히 보길도에는 그리고 노화도에는 고산이 머물기 훨씬 이전부터 그곳 사람들이,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콜룸부스를 영웅으로 보던 예전의 시각은 퇴색해 버렸고 새로운 각도에서 콜룸부스를 조명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봅니다. 무조건적으로 고산 선생의 유적이 담겨져 있는 신비의 섬으로만 보던 보길도가 아닙니다. 제 관념 속으로 보길도의 신화는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다시 보길도를 찾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찾는다 하더라도 부용동에로는 다시 가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허나 다산초당은 없는 틈을 내서라도 다시 가게 될 것입니다. 다산은 베들레헴이나 나자렛과 같은 이름없던 초라한 강진 마을을 문화유산의 유적지로 좋은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대연동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연동에 오기 훨씬 전부터 대연동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바로 지금 우리는 어쨌거나 대연동에 살고 있으며, 대연성당을 어머니이신 교회로 여기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콜룸부스가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산 선생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우리 이후에 대연동에, 대연성당에 살 게 될 사람들이 우리를 대연동 사람으로, 대연성당 사람으로 올바르게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면 분별력있게 오늘을 잘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주의 세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해야 할 말을 하고 있습니다. :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이러한 요한에게 예수께서는 당신 스스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께서 요한을 찾아 오셨습니다.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어휘로 풀면 '광야'는 '도시의 광야'를 일컫습니다. 어느 누구도 새끼손가락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모두가 최고가 되려고 합니다. 싫증주의와 물질주의로 가득찬 이 세상, 광야에서 외치는 것이 참으로 무의미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외치고, 외친 바대로 살아야 합니다. 「벽돌 나르기」를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콰이강의 다리」를 세워야 합니다. 무의미한 일에 우리의 아까운 세월을 맡겨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세월이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콜룸부스의 아메리카나 윤선도의 보길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故 민성기 신부님의 육화의 신비 중에서-

    천상의비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출처 : 천상의 비밀
    글쓴이 : 카타리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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