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신앙글)

★ 모든 자리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

J_카타리나 2006. 8. 26.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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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자리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마가복음 2장 16~17절)

 

 

2.16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Q.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직접 말하지 않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을까요?(16절)

 

A. 우리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바리새파 사람들이 직접 예수께 질문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은 2장 1-12절에서 이미 서기관들의 비평을 압도하는 예수님의 권위가 밝히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두려움이 직접적으로 예수의 권위의 경외감을 증폭시킬 것이기 때문이다(R.H.Gundry,Mark,126).

 

둘째, 제자들에게 그들의 스승인 예수께서 율법의 규례를 무시하는 것을 일깨워 줌으로써 스승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과 존경심이 손상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박익수, <마가복음I>,105-6).

 

“식탁 친교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낸다. 바리새인들은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 그들이 정해 놓은 특별한 규칙을 특히 세심하게 따랐으며, 그것에 대해 덜 세심한 사람들, 특히 세리와 죄인들 같은 사람들과 같이 먹는 것을 싫어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이 지혜로운 교사이므로, 그들과 같은 종교적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당시에 흔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대답하신다”(C.S.Keener,BBC NT, 162).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에게 특별히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스웨트(H.B.Swete,St.Mark,397)는 이 말에 대해 “복음서에서 아콜루테인, Akolouthein은 대개 도덕적 감화력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Q. 바리새파의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들으신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17절)

 

17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의 들으심은 서기관들의 보는 것과 일치한다(16절). 예수께서 주도권을 취하신다. 그는 제자들이 그 질문에 대답하도록 기다리지 않으신다. 그는 직접적으로 무리들에게 하지 않고 서기관들에게 진술하고,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신다(“I did not come to call righteous people, but [I came to call] sinners.”)[Gundry, 126].

Q. 당신은 자신을 의인이요, 건강한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 아니오(  )

Q. 당신은 자신을 죄인이요, 병든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 아니오(  )

Q. 왜 예수님은 의인을 배제하고 죄인만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가?

 

A.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고, 결국은 구원의 대열에 끼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박익수,106-7).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나는 너희보다 더 거룩하다”는 태도를 가지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자들은 죄인들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야 한다”(R.Earle,St.Matthew<마태복음>,88).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간파하시고 그들의 표현을 빌어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용어인 ‘의인’과 ‘죄인’은 그 대상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의인이라고 간주하는 사람은 여기서 말하는 의인의 자리에 놓이게 되고, 자신을 스스로 죄인이라고 간주하는 사람은 죄인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그 자신이 율법적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기 보다는 자신과 주님의 관계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있느냐의 유무에 달려 있다.

 

“예수께서는 잘 알려진 격언(그의 반대자들에 의해서도 타당한 것으로 인정된)과 그의 행위를 옹호한 그의 선교에 대한 진술을 가지고 그들의 비판에 대답하였다. 의인이라는 말은 이상하게도 자신들을 의롭다고 본 사람들 즉 바리새인들을 언급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눅 16.14-15 참조). 그들은 회개하고 믿을 필요가 없었다(막 1.15 참조). 그러나 예수께서는 의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죄인들 즉 겸손하게 그들의 곤경을 인정하고 그의 은혜스러운 용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부르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신 이유였다(2.5-11,19-20 참조)”[J.D.Grassmick,Mark<마가복음>,61].

 

의인과 죄인의 구별은 풍자적인 의미를 지닌 게 아니라 적대자들의 사고방식에 부합된 것이다. 이것과 아주 유사한 문구가 누가복음 15장 7절과 18장 9절에 나온다. 의인들이나 혹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배제된다는 말은 없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초대에의 부름이 이제 죄인과 배척된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초대는 구원의 때의 식사에 관련되는데, 세리들과의 식사는 구원의 때의 식사를 선취적으로 보여준다. 만찬의 주인은 예수이며 레위는 부름받은 “죄인”(hamarto-los)을 구체적으로 나타낸다(J.Gnilka, Markus <마르코복음>,138).


 

여러분, 우리가 만찬에 초대받을 때, 그곳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일상적으로 초대를 한 주인을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초대를 받아 가셨어도 그 만찬의 자리의 주인이 되셨다. 그것은 주님이 특별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가? 단지 그것만이 아니다. 주님은 언제나 의인, 죄인으로 구별짓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포용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느 자리에 서든지 간에 우리가 그들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만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우리 교우분들은 모두 그러한 넓은 포용력, 깊은 배려를 갖추고 인생을 멋지게 살아갈 수 있으시길 바란다.   


 

Q.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식탁친교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힐난할 때 그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가 누군가를 힐난할 때, 평가할 때 우리 자신은 의인의 자리에 올려 놓고 상대방을 죄인으로 간주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늘 이 것을 경계해야 한다. 성숙한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른 점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할 수 있는 넓은 아량과 깊은 배려가 요구된다.

 

 

- 이승문

    천상의비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