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말씀 나눔

[스크랩] 마태복음(18)

J_카타리나 2005. 8. 1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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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삶의 규범(3) (성경:마5:21-26)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모세제도 안에서 
가나안땅에 살고있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을때에 
"살인하지 말라"의 언약의 법은 
돌판에 새기셨지만 
그것의 시행은 
그들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시행령들인 
규례를 통해서 집행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하여 
주신 율법과 
세우신 모세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판단관들에 의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 
상벌을 주는 방식으로 집행했던 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사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는 
생명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 
돌판에 새기신 법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계까지라도 
이스라엘의 완악함, 
곧 이스라엘이 
죄가 지배하는 질서에 매여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규칙(시행령)을 따라서 
집행되도록 하신 것이 규례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돌판에 새기신 법을 
이스라엘의 완악과 죄로 인하여 조절하셔서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속에서 
집행되도록 하시는 방법이 
그들에게 주신 각종 규례들이었다. 
1.제6계명이 옛 경륜에서 집행된 방식.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지만 
하나님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 때문에 
이스라엘을 휘장밖에 두셨고 
따라서 
그들의 완악함에 조절된 방식으로 
모세에게 말씀하신 법을 집행하셨기 때문에 
온전한 윤리적인 실천을 나타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출21:12-21절에 보면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하신 계명이 
어떻게 
이스라엘백성에게 
조절된 방식으로 집행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을 쳐죽였을 때에는 
의도적인 경우가 아닐 경우 
도피성이나 손해배상 
그리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 아니하면 
형벌에 면하는 방식으로 적용되어 
집행되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1장 8절의 경우에서도 
모세는 이혼하려고 할 때에 
이혼증서를 써주어 아내를 버리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과연 합당한지를 물었을 때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모세가 그렇게 허락한 것이나 
본래는 그렇지가 않다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한 국가에서 
범법자가 재판할 때에는 
법적인 기준을 정해놓고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을 체벌하는 것이 아니라 
이 범법자가 
사회공동체에 합당한지의 여부에 의해 
체벌을 결정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가 지배하는 
죄의 질서 아래에 살고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지만 
아직 그리스도의 속죄가 
이루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원수된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생명의 법은 
그들의 완악함 때문에 
여러 가지 규칙에 의해 
제한되고 조절된 방식으로 
그들 가운데 집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집행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소유된 거룩한 공동체로 
자신 앞에 서도록 하셨던 것이다. 
2.주님께서 명하신 방법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옛사람에게 말한 것은 모세가 권위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대면해 말씀하셔서 
성소를 짓게 하셨고 
모세제도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모세제자들이 율법을 해석한다 할지라도 
최후의 권위는 모세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모세와 대비되는 방식으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신다. 
옛적에 
시내산에서 친히 불꽃 가운데 강림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친히 아들로 말미암아 말씀하신다(히1:1) 
그런데 
이 아들은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으며 
아버지의 행동을 하시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라 
계시와 세상에 자기를 나타내는 
생명의 질서에 있어서 
아들은 
아버지를 나타내는 분이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주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시는 방법이며 
모세의 제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선포하는 방식이다. 
주님이 
모세율법을 정확히 해석해서 
말씀을 증거하는 참된 해석가로서가 아니라 
이전에는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셨지만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권위로 
친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말씀하심으로 
이제는 
휘장으로 가리우고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시대를 끝내시고 
친히 얼굴을 대면하시고 말씀하시는 
새로운 관계로 자기 백성들을 대면하셔서 
옛 율법을 온전케하시고 완성하셨으며 
그렇게함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따라 사는 
하나님나라를 세우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모세의 하나님으로서 
율법의 완성자로 말씀하심에 있어서 
그 말씀하시는 방법은 
항상 모세제도의 틀을 가지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모세의 하나님이요 권세자이지만 
주님은 
하나님께서 옛 제도로 일하신 방식으로, 
구약의 완성자로 오셨기 때문에 
항상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옛 제도의 틀을 가지고 말씀하셔서 
모세제도의 기본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도록 하셨으며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거기에서 
옛 모세율법과 제도의 완성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되고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며 
미련한 놈이라 하면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주님은 
여기에서 
옛 제도(모세제도)의 형벌의 질서 
즉 "심판을 받게되며 공회에 잡히게 된다"는 
옛 제도 아래에서의 
형벌의 방식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지를 강조하고 계신다. 
주님은 
이스라엘백성이 가지고 있던 
사법적인 질서의 틀에 대한 언어를 가지고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마음의 분노까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판결을 받게되는지를 말씀하신다. 
그러면 주님이 요구하시는 문제는 무엇인가? 
주님은 
구약의 틀인 
이스라엘의 재판제도 틀을 가지고 
말씀하시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관계는 
마음의 완악함을 제거하시는 것이다. 
마음의 분노 
즉 마음으로 형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살인하고자하는 정신들을 
제거하시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난다면 
율법에 규정된대로 보상하면 되었다. 
도적질을 하였다면 
4배로 갚거나 
본전의 5분의1을 더해서 갚으면 되었다. 
상대가 마음으로 
원망하는지의 여부와 상관이 없었다. 
그는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면 
그는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고 
용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형제에게 갚음을 통해서 
형제의 마음을 풀었다. 
또한 조금이라도 갚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재판이 가능하였고 
만일 갚지 못한다면 
그는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이것이 구약에서 화목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렇게 
주님이 구약의 틀, 
재판제도의 틀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은 
마음의 완악함을 제거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형제에 대하여 
이런 저런 살인하고자하는 정신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한 내용이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나서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주님은 
똑같은 언어개념을 사용하면서도 
상황을 바꾸어서 말씀하고 있다. 
만일에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제사를 멈추고 
형제에게 가서 사화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형제와의 화평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친히 화목하셔서 아들을 우리 중에 보내셨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와 화목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중에 거하러 오셨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화목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화목을 
형제에게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나타내야 할 의이었던 것처럼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하나님과의 간격이 없게 하셨으니 
형제 사이에서도 
어떤 원망들을 만한 일이 없도록 
그러한 것들을 제거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가인처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하나님 앞에서 대답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도는 
삶 가운데서 
형제사이에 마음의 완악함을 제거해야 한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식의 
간격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생명의 관계를 형제에게 나타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 관계가 
우리의 삶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말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관계로 
우리의 형제를 대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영광의 빛 가운데에 
나아갈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신약교회의 영광스러움은 
법 위에 법을 더하여서 
그렇게 영광스러운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생명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나타냄으로 
구약의 어떤 사람도 나타낼 수 없는 
생명의 의를 누리라고 권면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성도의 평화이며 자유인 것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대면하여 
하나님과 함께하는 관계가 
형제화목에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더 나은 의인 것이다 
이 생명의 관계를 나타내서 
권세있게 
주님의 교회를 봉사하는 
신실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늘에 속한 교회* 

출처 : 하늘에 속한 교회
글쓴이 : 천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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