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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일" 로부터 시작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성격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 아는 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잘 모르면 신앙이란 상당히 맹목적인 것으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즉 우리 인간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알 수 있느냐? 그저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신에게 간구하고 믿고 들어가면 되지 않느냐? 하는 식의 맹목성을 오히려 신앙의 본질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알려고 하기보다는 무조건 열심히 믿고 봉사하는 행동이 오히려 좋은 신앙으로 간주하는 풍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무조건 열심히 믿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엄격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객관적인 존재를 믿을 때는 이미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한 번 언약을 하시면 그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능력자요 신실하신 분이심을 알 때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때의 믿음이란 실상 객관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내가 주관적으로 믿고 싶어하는 소원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자신의 소원, 혹은 욕망에 기초한 신념일 뿐입니다.
예컨대 예수를 믿으면 건강하고 부자 될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입니다. 이는 예수를 참으로 믿고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이용하여 욕망을 실현하려는 신념입니다.
이런 욕망에 기초한 맹목적인 신념은 기독교 신앙과 정반대의 성격을 지닙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때의 용감함은 참된 진리의 깨달음에서 나오는 담대함이 아니라 자기자랑과 자기증명을 하기 위한 인간적인 만용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용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바르고 분명하게 아는 일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려움에 처해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자라갈 것”을 당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른바 개신교(protestant church) 는 교황의 절대권위를 주장하는 로만 카톨릭 교회와는 달리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강조해 왔고 성경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신앙의 기본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지도자인 칼빈은 그의 신학적인 대작인 “기독교 강요” 1권 1장에서 하나님 아는 지식과 인간 자신을 아는 지식을 강조하였고,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아는 지식” 으로 부터 가능하다고 올바르게 지적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믿는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명확하고 분명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하는 말은 기독교 신앙의 세계에서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인간들끼리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그의 성품과 하는 일을 알지 못하면 신뢰할 수 없듯이, 더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일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어떤 속성을 가지시고 계신가를 알지 못하면 그야말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염려와 불안은 왜 생겨나는 것입니까? 얼핏보아 우리의 환경과 여건의 어려움 때문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염려와 불안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우리를 절대적으로 주관하심을 믿지 못해서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지식”을 바르게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최고의 모습은 심령에 평안과 감사가 있는 생활입니다. 이는 염려와 불만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억지로 인간이 가지려고 노력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마음의 평강과 감사가 인간적인 노력으로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의 언약에 신실하셔서 자기의 택한 언약 백성들을 그리스도안에서 절대적으로 보호하시고 지켜 나가시는 가를 성령의 감동을 통해 깨달아 질 때라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신앙”을 무조건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생겨날 수 있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알기”를 강조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 하나님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 신앙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밥을 주지 않으면서 배부름을 말하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원래부터 신앙이 돈독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본래 우상 종교의 땅인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가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는 불신앙의 삶을 많이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그는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자기 아내 사라를 여동생으로 속이는 치사한 일을 한 존재일 뿐 아니라 사라와의 관계에서 자손이 생기지 않자 여종이었던 하갈을 취하여 자손을 낳으려고 하는 인위적인 방법까지 불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을 불신앙하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사라의 몸에서 (그때 이미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 불임의 몸이었습니다) 이삭을 낳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언약적 신실성을 발견하고 난 뒤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신앙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성을 보여줌으로써(알게 함으로써) 신앙하게 하시는 섭리이십니다.
제가 이 신앙칼럼를 처음 쓰면서부터 “언약 성취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성경”의 중요성과 귀중함을 그렇게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에서 진정한 열매가 맺힐 수가 없듯이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는 뿌리를 깊이 박지 않고서는 성령의 열매로 표현되는 “신앙의 아름다운 삶”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알기 전 저의 신앙이 얼마나 막연하였고 혼란스러웠던가에 대한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저 막연히 새벽기도 생활을 해보기도 하고 열심히 전도하며 봉사생활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 즉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노력을 하면 할수록 마음의 진정한 평화는 찾지 못했습니다. 근본을 잡지 못하고 지엽적인 방법만을 추구한 결과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아는 지식의 산물입니다.
분명하게 알면 분명한 신앙을 가지게 되고, 막연하게 알면 막연한 신앙을 가지게 되고, 혼란된 지식을 가지게 되면 신앙도 혼란스럽게 됩니다. 아예 하나님 아는 일을 포기해버리고 맹목적인 믿음, 즉 눈 멀어버린 신앙을 가지면 신앙생활은 길을 잃어버린 채 어둠의 유혹에 여지없이 이끌여 다니게 됩니다. 즉 방향이 잘못되어 결국은 절벽에 부닥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기도 할 때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 아는 일에 더욱 자라가기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로부터 우리의 신앙은 출발되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것은 믿음의 절대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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