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신앙글)
십일조란 무엇인가
J_카타리나
2005. 8. 3.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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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신약교회에 있어서 십일조에 대한 논란은 일찍이 초대교회 시대로부터 있어 왔던
문제중의 하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논란은 교회 안에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모두가 십일조를 하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이 해야한다는
긍전론과 십일조는 율법이기 때문에 신약교회가 규범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부정론과
십일조가 교회발전에 크게 공헌해 왔다는 사실을 들어 실리론까지 내세우는가하면,
십일조를 해야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미신적인 기복주의 까지 등장해서
신앙생활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논란이 오랫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원인은 십일조에 관한 성경내용상의
주석상 견해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십일조에 대한 역사, 용도와 목적, 그리고 의미와 신학은 무엇인가?
2, 십일조의 역사
1), 십일조의 기원
소득중의 알부를 징수하는 일은 일반 종교나 문화에서도 고대 관습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창47:24]
그러나 십일조에 대한 성경에서의 최초 기록은 창세기 14장 17절 이하에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연합군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이다.
아브라함이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팔인을 거느리고 가서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쳐서 멸했다.
아브라함이 빼앗긴 모든 제물과 조카 롯과 부녀와 인민을 다찾아 가지고 돌아오는
도중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 축복을 받고 전쟁에서 얻은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드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성경 기록에 나타나는 십일조의 기원이다
2), 십일조의 제도화 과정
야곱이 형인 에서를 피하여 하란으로 가다가 루스(벧엘) 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때,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을 했다.[창28:22]
그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약속하신대로[창28:13-15] 자손을 애굽에서 번창시키시고
약속의 땅을 주시려고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해방시켜서 홍해를 건너 광야 시내산에
머무르게 하셨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계명을
가르치실 때에 땅의 소산이나 가축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거룩한 성물이라고
명하셨다[레27:30-33]
그리고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는 레위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어서 그들이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회막에 가까이 못하게 하여 대대로 영원한 규례로
삼게된 것이다[민18:21-24]
얼마후, 모세는 백성들이 요단 동편 땅에 이르렀을 때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려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먹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뿐만 아니라
[신14:22-23]
매 삼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일조를 다 내어 성읍에 저축하여 백성중에 분깃이나 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로 먹어 배부르게 하라고 가르쳤다[신14:28-29]
3), 십일조 실현의 실례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왕국을 세운 후 히스기아가 왕위에 올랐을 때,
종교적인 대 개혁을 단행하므로 백성들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쌓았다는
실례가 있다 [역하31:5-21]
그리고 포로시대인 파사왕 아닥사스다 왕때에 느헤미야가 유다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전에 레위인들을 세웠을 때에 백성들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드리게 했다[느13:11-12]
그러나 그후, 말라기 선지자가 나타나 과거에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 제사장들이 임무를 소흘이 하고 규례를 어겼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
멸앙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드려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했던 것이다 [말3:7-12]
3, 십일조의 용도와 목적
1), 십일조의 용도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는 레위지파의 분깃으로도 주어졌고 [민18:21-24],
객이나 고아와 과부들을 배부르게 하는데도 사용이 되었다 [신14:28-29]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모두 유업을 받았으나 그중 레위지파만은 유업을 받지 못했고
하나님이 그들의 유업이 되어 주셨다.
그리고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레위지파의 유업으로 주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나
또는 성전 수리비와 레위지파들의 생활비로 사용하게 하신 것이다.
객이나 고아와 과부들도 모두 유업이 없는 자들이다.
객은 정착지 즉, 유업이 없이 떠돌아 다니는 자들을 말하며,
고아 역시 유업을 물려줄 부모가 없는 자들이고,
과부들 역시 유업을 이을 남편이 없는 자들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로서 이들을 배부르게 먹이는데 사용하도록
한것이다 [신14:28-29]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는 유업이 없는 레위지파를 비롯해서
객과 고아와 과부들의 유업으로 사용되게 된 것을 알수있다.
2), 십일조의 목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게 하여 유업이 없는
레위지파와 객과 고아와 과부들의 유업으로 사용하신 목적은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결과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14:22-23]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를 레위지파의 기업으로 주어질 때 레위지파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 할수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레위지파들은 기업으로 받은 십일조로서 하나님께 제사도 드리고 성전도
수리하고 생활비로도 사용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전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사장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모든 백성들을 대신하여 거룩히 구별받아 수행하는
임무인 것이다 [민18:21-24]
즉,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 행위는 곧 백성들의 행위나 같은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로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배부르게 하는 목적 역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결과가 되게 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가르쳐 주셨다.
즉, 그것이 율법이었다.
이 모든 율법의 기본법이 곧 십계명이요. 이것의 대강령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 두가지를 다 요구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잘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을 때에는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중단이 되고 백성 중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굶주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4, 십일조의 의미와 신학
1), 십일조의 의미
구약의 십일조는 부정한 것으로부터 성별한다는 의미와 장차 구속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십일조는 성별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땅에서 난 모든 소득중 십분의 일을 거룩히 구별하게
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나 거룩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양식이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일단 십일조로 구별된 것은 거룩해졌으므로 바꾸거나 취소할수 없게 되어 있다. [레27:30-33]
만일 바꾸는 경우에는 둘 다 거룩하게 됨으로 속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땅에서 난 것은 모두 부정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십분의 일을 성별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물론, 모든 제물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모든 짐승이 다 부정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
열에 하나를 구별함으로 정결한 것이 되어 흠없고 점없는 것으로 성별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제물로 받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것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때문이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는 거룩히 성별된 것이라는 의미와 통하는 것이다
둘째로, 메시야 예언적 의미가 있다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는 나머지 아홉을 대표한다.
즉, 열개중 하나가 거룩히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짐으로 나머지 아홉도 거룩한 것이
되어 거룩한 백성의 양식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우리 모두가 땅에 속한 부정한 인간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거룩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심으로 우리 택한 백성이 모두가 다
거룩한 백성이 되어지는 진리를 나타내 주고 있다. [롬5:15-19]
따라서, 구약의 십일조는 우리의 대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요5:39]
구약에서 여호와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메시야에 대한 예표의
진리이다.
예을 들면, 첫새끼,첫열매,장자(맏아들) 등이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표적 계시인 것같이
십일조 역시 여호와의 것이라는 데서 그 의미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2), 십일조의 신학
구약에서 가르치고 있는 십일조에 대하여 신약성경은 침묵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도 언급하셨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도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 예수님의 십일조에 대한 신학이다
마태복음 23장 23절 (눅11:42) 에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이고 불완전한
십일조 행위를 책망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장차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실 일에 대한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이 한 구절의 성경을 바르게 풀이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말라기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구약의 율법적인 십일조를 번역함 없이 그대로 주장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잡다한 논란마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도 율법에서 가르치는대로 물질의 십일조와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라는 명령을 하셨으니, 성도들은 율법대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는
말씀은 그렇게 행하라는 명령형 문장이 아니라 직설형 미완료 동사를 사용하고 있어서,
그렇게 행했어야 했다는 당위성만을 말하는 문장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율법을 지킨다고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참으로 율법을
지키려면 물질의 십일조만 드릴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더욱 중요한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고 다 지켜 행했어야 했다는 당위성을 말씀하신 것 뿐이지 그렇게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예수께서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낮아지지 아니하고 도리어
율법을 다 지키는 의인처럼 군림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과 외식을 책망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눅18:12]
율법의 십일조나 의와 인과 신은 예수님만이 완전하게 이루실 수 있으신 것인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겨우 박하와 유황과 채소와 같은 물질의 십일조만을 드리고서 율법을 다
지키는 의인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율법 아래서 의인이 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율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것으로 이루실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요19:28-30]
둘째로, 히브리서에 나타난 십일조 신학이다
히브리서 7 장 1 절로 25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준 십일조 사건을 들어
그리스도의 제사직이 레위계통의 제사직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7 장 1절로 3절에서는 멜기세덱의 신분을 밝혀주고 7 장 4절로 10절에서는 멜기세덱이
레위보다 높으심을 증거하고 7장 11절로 25절에서는 레위 계통의 제사직을 폐하고
멜기세덱 계통의 영원한 그리스도의 제사직을 구약의 예언대로 세워 주셨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통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수 있는것은 구약시대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나 또는
여러가지 제물로서 레위지파 제사장이 손으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린 제사는
절대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이다[히7:11]
그렇기 때문에
제사직분도 번역하고 율법도 번역이되어 [히7:22]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이 되시고 [히7:21]
참 성전이 되시며 [요2:19-22]
영원한 제물이 되어 [요1:29]
영원한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히9:11-12]
그리스도 자신이 거룩하게 구별된 십일조 예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리신바
되신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그들의 모든것, 즉, 생명이나 재산, 건강, 명예, 실력 등이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가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십일조란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이며 메시야 예언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모든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자신의 정욕대로 사용하거나
허비한다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율법에 얽매어 억지로 하지 아니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고후9:5] 소득중에
십분의 일이든지 십분의 구든지 얼마든지 연보해서 복음을 위해 일하는 것도 있을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모두도 거룩한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서 [롬12:2]
그 일을 위해서 거룩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사나 죽으나 먹으나 굶으나...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은 신약교회 성도들의 당연한 신앙생활의 태도라 하겠다.
출처: http://blog.daum.net/khb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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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는 돈이 아니다
십일조!
한국교회는 십일조 때문에 흥하고 십일조 때문에 망한다.
십일조를 통해 교회는 부를 챙긴 대신 십일조의 본래성을 잃었다.
물질은 흥하고 정신은 기근에 시달린다.
일찍이 지금과 같이 교회가 정신적으로 타락한 적이 있더란 말이냐.
돈 십일조를 얻은 대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잃어버렸다.
그 외모는 비록 흥하였으나 내실은 썩은 생선의 냄새가 진동하고
장사꾼들만 판을 치고 있다.
돈 십일조는 있으나 하나님은 없다. 돈 십일조는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부재한다.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괴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에서 왕 노릇하고 있지만
정작 발언해야 할 신은 굳게 침묵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복술 가들과 점술가들 그리고 성공신화만
횡행하고 있고 '하나님의 것'은 없다.
헌금 십일조는 마치 신성불가침 영역과 같이 교회재정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
십일조를 모르는 크리스천은 없다.
교회 한 번 다녀 본적 없는 사람조차 십일조는 안다.
수입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 헌금으로 바치는 교회의 헌금 제도라는 것쯤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랴.
즉, 십일조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 안팎에서 십일조는 '돈'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굳힌 셈이다.
따라서 십일조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이는 시대착오적인 질문이 되어버린다.
한 번쯤 십일조란 무엇일까 물어봄직도 하지만 콱 박힌 대못처럼
단단히 각인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결코 그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온통 현재 십일조를 잘 하는 성도냐 아니냐.
얼마큼의 십일조를 하고 있느냐 에만 관심이 있다.
십일조란 무엇인가하고 묻는 행위야 말로 믿음 없는 소치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십일조 제일 많이 하는 성도가 교회의 큰 관심거리요
성도들 개개인은 거기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헌금 십일조는 신앙의 척도요 축복받은 증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가르친다.
이와 같은 종교 망국적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같은 것이 오늘날 타락한 교회의 성경읽기수준이요 눈멀고 귀먹은 교회의 양상이다.
오늘날의 십일조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우상의 제물이 되어 버렸다.
우상과의 돈거래가 되어버렸고 십일조 교인과 축복이라는 허깨비 귀신만 난무하고 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돈을 좋아하는 신이 어느 신이냐고 묻는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일 게다. 누가 이렇게 하나님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 곧 돈이나 좋아하고
받은 돈에 비례하여 축복이나 주는 천박한 신으로 바꾸어 버렸는가.
잃어버린 십일조를 다시 찾자.
성경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돈 십일조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라면 얼마나 쉽고 좋으랴.
허나 하나님은 돈을 당신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깡패 두목이고 우리 인간들은 앵벌이란 말인가.
그는 코 묻은 돈이나 갈취하는 약탈자가 아니다.
월급의 십일조를 내 것이니 가져오라고 협박하는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돈에 관심이 없다.
돈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돈은 오로지 육체와의 연관일 따름이다.
자기가 좋아하니 하나님도 좋아하리라고 착각하지 마라.
그것은 단지 육체의 필요요, 삶의 목적이 아니다.
물론 돈을 인생의 목적이라고 내놓고 말하는 종교인은 그리 많지 않다.
허나 돈을 좋아하는 종교인들은 온통 신앙생활의 대부분을 돈 축복에 집중한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다.
마음을 받기 위해 돈을 받는 것이지 결코 돈이 필요해서 헌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하시라.
헌금은 마음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언제까지 속이려는가.
마음을 돈으로 계량화하려는 어처구니없는 작태로 작금의 교회는 잘도 번성한다.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에만 관심이 있다.
하나님의 것에만 관심이 있다.
'하나님의 것'을 받으시기를 원하실 따름이다.
그러므로 월 소득의 십분의 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 알 방법이 그대에게는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십일조든 십이 조든 당신 것이니 받으시고 내게 더 많은 십일조를 낼 수 있도록
축복이나 듬뿍 내려 주시라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온통 돈독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따름이다.
아무리 돈이 세상에서 맹위를 떨친다한들 우리의 영혼과 돈이 무슨 상관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느냐.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을 뿐인데 그대는 성경을 폐하려는 자인가,
지금 무슨 망발이냐고 항의하실 분들이 많을 게다.
그렇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쓴다.
교회는 돈 십일조가 있는 대신 십일조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십일조를 찾아 나서자.
타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십일조다.
하나님은 호소하고 계신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 3:7-9)
말라기의 말씀에서 보는바 대로 십일조는 분명 하나님께 돌아가는 원리이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원리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십일조를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십일조는 화해의 원리다.
십일조는 사랑의 원리다.
십일조는 만물과 소통하는 원리다.
십일조는 너와 내가 만나고 함께 숨을 쉬는 원리이다.
십일조는 제사장의 원리이기도하고 새언약의 성취 원리이기도하다.
십일조는 속전을 드리는 제사의 원리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유일한 통로가 십일조다.
신과의 단절의 벽을 허무는 것이 십일조다.
그 같은 것이 단순히 돈으로 환원되었으니
진리가 땅에 곤두박질쳐도 이렇게 쳐질 수 있는가.
그러나 돈을 좋아하는 인생들이 기독교를 맘모니즘으로 만들어 놓고
저렇게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돈이 힘인 세상이니,
모름지기 돈이 위계질서인 세상이니,
모름지기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니
하나님이 돈하고 결탁하지 않고서야 어찌 하나님 자리인들 온전히 보전할까.
하나님 만세, 기독교 만만세, 돈신 만만세 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자. 그대의 하나님을 처단하자.
그것은 이제 그대 자신을 처단하는 것이다.
그대의 신이 정정하게 있는 한 그대는 여전히 처단되지 않는다.
이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십일조를 찾자.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자.
이 글이 그대의 신앙에 독이 되길 바란다.
그대에게 혼란이 되기를 바란다.
그대의 하나님에 균열이 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는 심술장이요 시비꾼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바위에 계란을 내려치면 계란이 부서진다는 것.
천하에 둘도 없는 미련한 짓임을 어찌 모르랴.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란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마저 깰 수밖에.
십일조는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원리란 말인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짝사랑의 열병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오기를 원하는 구애의 편지들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 곧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것, 곧 십일조에 해당하는 가이며
십일조는 과연 어떻게 드리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이 받는다.
이것이 십일조의 기원이다.
그러나 좀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하와는 뱀의 말을 받는다. 아담은 하와를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것을 받지 않고 뱀의 것을 받은 인생들의 타락이다.
'하나님의 것'은 이때 잃어버렸다.
그리고 뱀의 것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뱀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져다가 바치려 한다.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선)을 하나님이 받으시리라 여겨 하나님께 바치고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악)은 버린다.
이것이 하나님께 잘 포장한 인간의 정성스러운 예물이다.
이때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불화가 시작된다.
인생들은 자기 것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려 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 외에는 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시니
거기 인간의 소외가 시작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소외가 시작되었다.
영원한 사이 띄기, 영원한 틈새, 영원한 평행선이 시작되면서
어두움의 그림자가 인생 가운데 짙게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브람은 이렇게 짙은 어두움이 서려있는 갈대아 우르를 박차고 나와
자신의 여행을 시작한다.
물론 갈대아 우르에서는 그의 아버지 데라가 데리고 떠나지만
하란에서 그의 본격적인 순례의 여행은 시작된다.
우상의 신을 내던지고 순례의 걸음을 내딛는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의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것은 무엇인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일생동안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려는 온갖 시도를 행한다.
그 시절이 아브라함 이전의 아브람 때이다.
아브람의 일생은
어떻게 인생과 하나님의 평행선이 계속되는 가를 가르쳐준다.
마침내 하나님이 평행선을 깨고
하나님의 것을 취하는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어진 때이다.
아브람과 아브라함,
곧 두 이름을 통해 엿볼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방식.
평행선이 깨진다함은
하나님이 항복을 하던지 아브람이 항복하던지 둘 중 하나가 두 손을 들어야 한다.
아브람은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상징이요,
아브라함은 자신의 것을 내어던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상징이다.
모름지기 위대한 삶의 족적을 남긴 현인들의 생애는
항상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으로 나누인다.
아브람이 전기의 삶이라면 아브라함은 참된 삶의 의미를 깨달은 후기의 삶이다.
전기는 후기로 나아가는 사닥다리요 징검다리이다.
전기는 이스마엘로 후사를 삼아 하나님의 유업을 삼고자하는 때이니
자신의 지혜가 충천하고 열심이 특출하여 자신의 믿음(자기의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때이며,
후기는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어 쫓고 사람의 열심이 사그라지니
곧 하나님의 믿음인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 이삭(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때이다.
사울은 큰 자요,
바울은 작은 자이다.
사울의 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에 올라가 하늘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는 때며,
음부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열심이 있는 때이다.
하나님의 것은 없고 온통 자신의 것만이 기승을 부리는 때라는 말이다.
십일조도 자신의 것으로 드리고 봉사도 자신의 것으로 하고 무엇을 하던지
자신의 것으로 하는 때이다.
자신의 의로움이 넘치는 때요 하나님의 의는 입술에만 있고
자신의 것이 온통 크게 보이는 삶을 사는 때이다.
베드로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를 좇으며 따라 다닐 때의 베드로는
예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었다.
목숨을 바치는 것쯤 무에 그리 두려웠겠는가.
'내가 당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하며 충성의 맹약을 서슴지 않는 것이
베드로의 신앙이다.
예수는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서 덥석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는 그 같은 베드로를 결코 받을 수 없다.
그것은 다만 베드로의 관심사요 베드로의 것이지 하나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 몸을 주께 드리오니 받아주시옵소서' 한다고 해서
그 몸을 하나님은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왜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모른다는 말인가.
그 같은 신앙고백은 모두가 인생들의 일이요, 인생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에만 관심이 있다.
인생들의 그것에 눈독을 들이지 않는다.
십일조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되 질문 해보자.
하나님의 것은 무엇이며
도대체 하나님의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말인가.
온 세계 가운데 충만히 거하는 만물 중에
엄격히 말해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것을 구분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
그런데 사람만이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을 구분하여 도적질하고 탈취한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체를 내 것으로 삼아 탈취한다.
내가 나의 것으로, 사람만이 하나님의 것을 제 것 만들어 마음대로 탈취한다.
그러다 보니 만물과 관계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역시 제 것으로 삼는 소유방식으로 만물을 바라보고 관계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다보니 모든 관계방식
역시 자기 성을 구축하고 자신의 영역표시를 하기 시작한다.
거기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막히고 자기의 영역은 더 높이 구축된다.
담은 더욱 높아간다.
그것을 가지고 신에게 충성하고 봉사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자기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거래를 시도한다.
자기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을 인생과 같이 여겨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만물 가운데 계신다.
이처럼 막연한 말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계신 것이 아니라 성전에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계신다.
이것을 우리가 짓밟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내 마음대로 짓밟고 살았던 우리들의 삶.
하나님의 정신과 하나님의 얼을 담아내고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들의 마음을 복마전으로 바꾸어 잃어버린 성전.
이것을 밝혀 당신의 것을 되찾아 하나님은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빼앗긴 들에 과연 봄을 올 것인가.
우리 안에 있는 하늘의 신성은 과연 꽃 피울 것인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과연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드릴 수 있는가.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반면 네 안에 계신다.
그 영성의 자리가 떨쳐 일어나야한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
곧 네 안에 있는 하나님을 내 안에 있는 신성이 알아차리느냐 하는 것이
십일조와 깊은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받는 원리가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이다.
십일조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것'을 내가 취하는 것을 일컫는다.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나님의 것'을 이기적인 나는 결코 취할 수 없다.
이기적인 나는 그 속성대로 너에게 있는 더러운 것들만 취한다.
즉, 탐심은 하나님의 것을 취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그 탐심의 속성대로
너를 소유하려하고 나의 탐심을 채우는 데에만 너의 존재가 소용된다.
거기에는 십일조가 없다.
그러므로 죄인은 네 안에 있는 신성을 취할 수 없다.
나의 마음을 찢어내어 네게 다가갈 때만 네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받을 수 있다.
무조건 내 마음을 받으소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뒤에서 좀더 말하겠지만 '받음은 드림'이다.
예수는 어떻게 베드로를 받으시는가.
이 같은 물음이 화두가 되어 풀릴 때 비로소 십일조의 비밀은 풀릴 수 있다.
십일조는 돈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을 일컫는다거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한다는 것 따위는 십일조가 아니다.
그것은 십일조에 대한 또 하나의 이론이며 종교이데올로기일 따름이다.
십일조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 이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오니 십일조로 받아주시옵소서'라는
종교적인 고백이나 행위로 십일조가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는 베드로의 삶을 통해
어떻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받으시는가하는 점을 통해서
십일조를 알아보자.
예수께서 받을 수 없는 베드로와 받을 수 있는 베드로는 무엇인가.
그렇다.
예수는 피체 베드로를 십일조로 받아서 그의 양식으로 삼을 수가 없었다.
예수는 베드로를 십일조로 받고 싶어 하신다.
베드로를 하나님의 것으로 빚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대로 예수 자신이 베드로의 죄를 속하기 위한 속전이 되셨다.
사람의 일로 가득한 베드로의 육신에 속한 모든 소욕과 죄를 처리하기 위해
그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십자가 사건 이후 베드로와 예수의 대화를 살펴보라.
요한복음 21:15-19에 나타난 베드로는 결코 이전의 베드로가 아니었다.
스스로 하는 사랑은 모두가 에로스였고 에로스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예수와의 사랑에 대한 세 번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이었다.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다니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인도받는 삶이 전개될 것이니
거기에 새로운 삶의 비밀이 있고,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창조가 있는 것이다.
즉, 예수는 비로소 베드로를 하나님의 것, 곧 십일조로 받으실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베드로를 하나님의 것 곧 십일조로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것이 창조되어야 하고 그것은 곧 예수 자신이 속전으로 드려지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는 베드로를 십일조로 받으셨다.
그것은 동시에 그 자신이 하나님께 버리움이요, 드려짐이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제물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속전이 되어서 단번의 제사를 드리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짐이 된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의 십일조를 받는다.
레위 제사장이 백성들의 십일조를 받는다.
거기서도 받는 것은 바치는 것이 된다.
히브리서 7장의 본문에 나오는 십일조와 관련된 동사는 매우 독특한 동사요
성경에서 유일한 형태를 띠고 있다.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십일조를 받는다는 말과 동의어가 된다.
아니, 그것은 동의어가 아니라 같은 말이다.
십일조를 바친다는 말이나 십일조를 취한다는 말이나
헬라어는 하나의 단어를 쓰고 있다(δεκαόω 데카토오).
그러므로 우리말 표현은 뉘앙스가 다른 듯 보이지만 받는 것이 바치는 것이다.
받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속전 제물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속전(λύτρον 뤼트론)이란 얽매인 자를 자유롭게 풀어주거나
저당 잡혔던 재산을 되찾기 위해 지불되는 대금을 일컫는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의 대속불로 오셨다(막 10:45).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다(출 30:11-16).
우리가 받쳐야 할 돈은 가이사의 형상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 그려져 있고
하나님의 글이 적혀 있는 돈을 속전으로 바치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십일조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고
바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다. 우선 돈이 없기 때문이다.
가이사의 형상은 있으나
하나님의 형상과 글이 박혀 있는 하나님의 지폐가 없다는 말이다.
말로는 만인제사장論을 외치고 있는 기독교이지만
누가 '너'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 '나'를 바칠 수 있는가.
누가 '너'를 위해 산 제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온통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서로를 갈취하려는 눈만 번쩍이는 저 종교인들의 군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지폐가 유통될 수 있다는 말인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을 때,
자신이 제물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너'를 받을 수 있다.
이 때 '너'란 아무 것이나 '너'가 아니다.
육신의 것으로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너'는 그대 안의 '하나님'을 말한다.
예수가 베드로를 영접하고 그를 받고자 하는 것은
열심이 특출하다거나 충성심과 봉사심이 넘치는 그 베드로가 아니다.
그러한 인생의 진실 따위나 받으시려고 예수가 베드로에게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예수의 열심은
베드로의 속에 좌정하고 계신, 미처 베드로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있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취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를 얻고자 자신이 속전으로 드려지는 드려짐.
빼앗긴 것을 되찾아 다시 하나님의 것으로 빚어 취하시려는 것이 십일조의 비밀이다.
예수의 공생애란 베드로를 취하고자 떡과 포도주를 들고 나가서
그를 축복하고 있는 장면인 셈이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피 흘리기까지.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 14:18-19)
이것이 제사장의 원리요 복 빎의 원리다.
우리의 복은 하나님의 것을 나누는 것 밖에는 없다.
내가 피 흘리지 않으면, 산 떡이 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우리의 먹거리, 우리의 양식, 우리가 추수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같은 것이다.
이 같은 말씀이 주어질 때 사람들은 모두 도망간다.
너와 내가 만나는, 내가 없어져야 하는 문제가 도래하기 때문에 다 도망간다.
살을 찢어야 하기 때문에, 피를 흘려야 하기 때문에 다 도망하는 것이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이들이 도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양식을 뉘라서 주고받을 수 있겠는가. 십일조를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는 것은 이 보화를 짓밟는다는 것이다.
탈취하고 도적질하기 때문에 십일조가 없다.
하나님의 것을 갈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인데, 어떻게 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안에 계신 하나님과 더불어 이제는 '너 속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숨쉬고 계시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말씀에 도색된 죽은 하나님이 아니다.
네 속에 살아계신 신성이다.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하나님이다.
인생들은 성경의 많은 구절들로 금칠해져 있는 도색된 하나님과 화려한 수사들,
현란한 언어로 덧칠된 거짓된 하나님을 좋아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하나님만 알지
십일조로 드려져야 할 하나님은 온 데 간 데가 없다.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십일조는 땀이고 고난이고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피 흘림이고
우리가 울어야 통곡의 눈물이다.
너를 만나지 못하는 문제는 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인생들은 서로가 주려고만 하거나 받으려고만 한다.
'자기 것'을 주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악을 주는 것이고 죄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다.
내게 있는 것을 주어봐야 받는 사람은 곧 그 같은 것은 내게도 있다고 말한다.
내 것 가지고 하나님의 것인 양 주려고 호들갑을 떨지 말자.
호기심을 갖고 취하려고 달려들지는 몰라도 잠시 지나면 그 정도는 내게도 있다고 한다.
물론 겉으로야 짐짓 딴청을 피우겠지만 속으로는 결코 받지 않는다.
십일조의 삶은 그런 양태가 아니다.
그의 것을 공유하는 것만이 복 있는 것이다.
큰 자가 어린 자에게 나누어주는 원리. 물이 흘러가듯 흐르는 원리가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복을 비는 원리이다.
여기서 큰 자란 계급적인 의미가 아니라 생명의 질서를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는 십일조를 바치기 위해서 십일조를 받아야 한다.
십일조를 받는 것이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일조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사장만이 받는다.
이것만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유일한 통로요 길이다.
하나님은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다.
네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네 안의 하나님은 결코 나의 육신의 눈에는 계시되지 않는다.
나의 눈에 안약을 바르고 눈 먼 눈을 빼어버리고
새로운 눈이 뜨일 때만 네 안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경배할 수 있다.
그럴 때 너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은 너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드려짐이다.
이것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멜기세덱에게 바치는 십일조의 원리다.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평강의 왕이신 멜기세덱에게 바치는 십일조의 원리다.
거기 사람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가 왕같이, 바다처럼 깃들어 있다.
너와 나, 하나님과 인간, 만물과 사람의 충만한 화해가 거기 있지 아니한가.
살렘 왕, 평강의 왕, 화해의 왕권이 거기 그렇게 있다.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진행되는 십일조의 원리이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이란 말인가.
그것은 내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내게서 마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너를 십일조로 취해서 나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또 너를 십일조로 드림이 되나,
'너'는 또 다른 '그'를 십일조로 받아서 취하고 동시에 드려져야 하는 원리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멜기세덱에게 바치는 십일조의 원리인 것이다.
화해의 연쇄 고리가 거기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것은 피 흘림의 연쇄 고리이다.
사랑의 연쇄 고리이며 온전한 대동제(大同際)가 드려지는 비밀이다.
십일조는 따라서 율법을 완성하는 원리이며 제사의 원리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이 곳 하나님의 성전인 지성소의 속죄소에서 만난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축복이라는 것, 찬양이라는 것은 이 같은 화해의 노래를 일컫는 것이다.
허나 사람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허명(虛名)과 미명(美名)만 난무한다.
십일조는 하늘의 문이 비로소 열리는 열쇠다.
아니 하늘의 문이 열리는 곳에서 십일조는 드려진다.
십일조는 하늘 문을 여는 조건이 아니다.
십일조가 드려지는 곳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문이 열리는 곳에서 십일조가 드려진다.
말라기서의 표현은 답답한 이스라엘, 곧 선민의식은 갖고 있으나
하나님께는 멀어져 있는 인생들을 향해 외치는 간곡한 외침이
마치 십일조가 하늘 문을 열기 위한 조건인 양 그렇게 표현된 것일 따름이다.
선민의식(選民意識)은 천민의식(賤民意識)이다.
선민의식을 갖고는 결코 십일조를 드릴 수 없다.
십일조는 천둥이며 번개다.
뇌성벽력인 십일조가 돈으로 바뀌어 버렸으니 참으로 이 시대의 기독교는 딱하게 되었다.
이제라도 돌이키자.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가.
그렇다. 십일조를 드려보라.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그대 복 있는 자.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가 될 터이다.
- 받은 메일 중에서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신약교회에 있어서 십일조에 대한 논란은 일찍이 초대교회 시대로부터 있어 왔던
문제중의 하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논란은 교회 안에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모두가 십일조를 하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이 해야한다는
긍전론과 십일조는 율법이기 때문에 신약교회가 규범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부정론과
십일조가 교회발전에 크게 공헌해 왔다는 사실을 들어 실리론까지 내세우는가하면,
십일조를 해야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미신적인 기복주의 까지 등장해서
신앙생활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논란이 오랫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원인은 십일조에 관한 성경내용상의
주석상 견해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십일조에 대한 역사, 용도와 목적, 그리고 의미와 신학은 무엇인가?
2, 십일조의 역사
1), 십일조의 기원
소득중의 알부를 징수하는 일은 일반 종교나 문화에서도 고대 관습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창47:24]
그러나 십일조에 대한 성경에서의 최초 기록은 창세기 14장 17절 이하에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연합군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이다.
아브라함이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팔인을 거느리고 가서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쳐서 멸했다.
아브라함이 빼앗긴 모든 제물과 조카 롯과 부녀와 인민을 다찾아 가지고 돌아오는
도중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 축복을 받고 전쟁에서 얻은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드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성경 기록에 나타나는 십일조의 기원이다
2), 십일조의 제도화 과정
야곱이 형인 에서를 피하여 하란으로 가다가 루스(벧엘) 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때,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을 했다.[창28:22]
그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약속하신대로[창28:13-15] 자손을 애굽에서 번창시키시고
약속의 땅을 주시려고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해방시켜서 홍해를 건너 광야 시내산에
머무르게 하셨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계명을
가르치실 때에 땅의 소산이나 가축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거룩한 성물이라고
명하셨다[레27:30-33]
그리고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는 레위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어서 그들이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회막에 가까이 못하게 하여 대대로 영원한 규례로
삼게된 것이다[민18:21-24]
얼마후, 모세는 백성들이 요단 동편 땅에 이르렀을 때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려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먹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뿐만 아니라
[신14:22-23]
매 삼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일조를 다 내어 성읍에 저축하여 백성중에 분깃이나 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로 먹어 배부르게 하라고 가르쳤다[신14:28-29]
3), 십일조 실현의 실례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왕국을 세운 후 히스기아가 왕위에 올랐을 때,
종교적인 대 개혁을 단행하므로 백성들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쌓았다는
실례가 있다 [역하31:5-21]
그리고 포로시대인 파사왕 아닥사스다 왕때에 느헤미야가 유다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전에 레위인들을 세웠을 때에 백성들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드리게 했다[느13:11-12]
그러나 그후, 말라기 선지자가 나타나 과거에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 제사장들이 임무를 소흘이 하고 규례를 어겼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
멸앙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드려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했던 것이다 [말3:7-12]
3, 십일조의 용도와 목적
1), 십일조의 용도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는 레위지파의 분깃으로도 주어졌고 [민18:21-24],
객이나 고아와 과부들을 배부르게 하는데도 사용이 되었다 [신14:28-29]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모두 유업을 받았으나 그중 레위지파만은 유업을 받지 못했고
하나님이 그들의 유업이 되어 주셨다.
그리고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를 레위지파의 유업으로 주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나
또는 성전 수리비와 레위지파들의 생활비로 사용하게 하신 것이다.
객이나 고아와 과부들도 모두 유업이 없는 자들이다.
객은 정착지 즉, 유업이 없이 떠돌아 다니는 자들을 말하며,
고아 역시 유업을 물려줄 부모가 없는 자들이고,
과부들 역시 유업을 이을 남편이 없는 자들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로서 이들을 배부르게 먹이는데 사용하도록
한것이다 [신14:28-29]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는 유업이 없는 레위지파를 비롯해서
객과 고아와 과부들의 유업으로 사용되게 된 것을 알수있다.
2), 십일조의 목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게 하여 유업이 없는
레위지파와 객과 고아와 과부들의 유업으로 사용하신 목적은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결과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14:22-23]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를 레위지파의 기업으로 주어질 때 레위지파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 할수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레위지파들은 기업으로 받은 십일조로서 하나님께 제사도 드리고 성전도
수리하고 생활비로도 사용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전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사장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모든 백성들을 대신하여 거룩히 구별받아 수행하는
임무인 것이다 [민18:21-24]
즉,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 행위는 곧 백성들의 행위나 같은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로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배부르게 하는 목적 역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결과가 되게 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가르쳐 주셨다.
즉, 그것이 율법이었다.
이 모든 율법의 기본법이 곧 십계명이요. 이것의 대강령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 두가지를 다 요구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잘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을 때에는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중단이 되고 백성 중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굶주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4, 십일조의 의미와 신학
1), 십일조의 의미
구약의 십일조는 부정한 것으로부터 성별한다는 의미와 장차 구속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십일조는 성별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땅에서 난 모든 소득중 십분의 일을 거룩히 구별하게
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나 거룩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양식이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일단 십일조로 구별된 것은 거룩해졌으므로 바꾸거나 취소할수 없게 되어 있다. [레27:30-33]
만일 바꾸는 경우에는 둘 다 거룩하게 됨으로 속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땅에서 난 것은 모두 부정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십분의 일을 성별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물론, 모든 제물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모든 짐승이 다 부정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
열에 하나를 구별함으로 정결한 것이 되어 흠없고 점없는 것으로 성별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제물로 받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것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때문이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는 거룩히 성별된 것이라는 의미와 통하는 것이다
둘째로, 메시야 예언적 의미가 있다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는 나머지 아홉을 대표한다.
즉, 열개중 하나가 거룩히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짐으로 나머지 아홉도 거룩한 것이
되어 거룩한 백성의 양식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우리 모두가 땅에 속한 부정한 인간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거룩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심으로 우리 택한 백성이 모두가 다
거룩한 백성이 되어지는 진리를 나타내 주고 있다. [롬5:15-19]
따라서, 구약의 십일조는 우리의 대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요5:39]
구약에서 여호와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메시야에 대한 예표의
진리이다.
예을 들면, 첫새끼,첫열매,장자(맏아들) 등이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표적 계시인 것같이
십일조 역시 여호와의 것이라는 데서 그 의미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2), 십일조의 신학
구약에서 가르치고 있는 십일조에 대하여 신약성경은 침묵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도 언급하셨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도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 예수님의 십일조에 대한 신학이다
마태복음 23장 23절 (눅11:42) 에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이고 불완전한
십일조 행위를 책망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장차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실 일에 대한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이 한 구절의 성경을 바르게 풀이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말라기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구약의 율법적인 십일조를 번역함 없이 그대로 주장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잡다한 논란마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도 율법에서 가르치는대로 물질의 십일조와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라는 명령을 하셨으니, 성도들은 율법대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는
말씀은 그렇게 행하라는 명령형 문장이 아니라 직설형 미완료 동사를 사용하고 있어서,
그렇게 행했어야 했다는 당위성만을 말하는 문장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율법을 지킨다고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참으로 율법을
지키려면 물질의 십일조만 드릴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더욱 중요한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고 다 지켜 행했어야 했다는 당위성을 말씀하신 것 뿐이지 그렇게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예수께서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낮아지지 아니하고 도리어
율법을 다 지키는 의인처럼 군림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과 외식을 책망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눅18:12]
율법의 십일조나 의와 인과 신은 예수님만이 완전하게 이루실 수 있으신 것인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겨우 박하와 유황과 채소와 같은 물질의 십일조만을 드리고서 율법을 다
지키는 의인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율법 아래서 의인이 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율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것으로 이루실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요19:28-30]
둘째로, 히브리서에 나타난 십일조 신학이다
히브리서 7 장 1 절로 25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준 십일조 사건을 들어
그리스도의 제사직이 레위계통의 제사직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7 장 1절로 3절에서는 멜기세덱의 신분을 밝혀주고 7 장 4절로 10절에서는 멜기세덱이
레위보다 높으심을 증거하고 7장 11절로 25절에서는 레위 계통의 제사직을 폐하고
멜기세덱 계통의 영원한 그리스도의 제사직을 구약의 예언대로 세워 주셨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통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수 있는것은 구약시대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나 또는
여러가지 제물로서 레위지파 제사장이 손으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린 제사는
절대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이다[히7:11]
그렇기 때문에
제사직분도 번역하고 율법도 번역이되어 [히7:22]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이 되시고 [히7:21]
참 성전이 되시며 [요2:19-22]
영원한 제물이 되어 [요1:29]
영원한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히9:11-12]
그리스도 자신이 거룩하게 구별된 십일조 예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리신바
되신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그들의 모든것, 즉, 생명이나 재산, 건강, 명예, 실력 등이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가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십일조란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이며 메시야 예언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모든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자신의 정욕대로 사용하거나
허비한다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율법에 얽매어 억지로 하지 아니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고후9:5] 소득중에
십분의 일이든지 십분의 구든지 얼마든지 연보해서 복음을 위해 일하는 것도 있을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모두도 거룩한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서 [롬12:2]
그 일을 위해서 거룩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사나 죽으나 먹으나 굶으나...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은 신약교회 성도들의 당연한 신앙생활의 태도라 하겠다.
출처: http://blog.daum.net/khb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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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는 돈이 아니다
십일조!
한국교회는 십일조 때문에 흥하고 십일조 때문에 망한다.
십일조를 통해 교회는 부를 챙긴 대신 십일조의 본래성을 잃었다.
물질은 흥하고 정신은 기근에 시달린다.
일찍이 지금과 같이 교회가 정신적으로 타락한 적이 있더란 말이냐.
돈 십일조를 얻은 대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잃어버렸다.
그 외모는 비록 흥하였으나 내실은 썩은 생선의 냄새가 진동하고
장사꾼들만 판을 치고 있다.
돈 십일조는 있으나 하나님은 없다. 돈 십일조는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부재한다.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괴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에서 왕 노릇하고 있지만
정작 발언해야 할 신은 굳게 침묵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복술 가들과 점술가들 그리고 성공신화만
횡행하고 있고 '하나님의 것'은 없다.
헌금 십일조는 마치 신성불가침 영역과 같이 교회재정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
십일조를 모르는 크리스천은 없다.
교회 한 번 다녀 본적 없는 사람조차 십일조는 안다.
수입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 헌금으로 바치는 교회의 헌금 제도라는 것쯤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랴.
즉, 십일조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 안팎에서 십일조는 '돈'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굳힌 셈이다.
따라서 십일조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이는 시대착오적인 질문이 되어버린다.
한 번쯤 십일조란 무엇일까 물어봄직도 하지만 콱 박힌 대못처럼
단단히 각인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결코 그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온통 현재 십일조를 잘 하는 성도냐 아니냐.
얼마큼의 십일조를 하고 있느냐 에만 관심이 있다.
십일조란 무엇인가하고 묻는 행위야 말로 믿음 없는 소치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십일조 제일 많이 하는 성도가 교회의 큰 관심거리요
성도들 개개인은 거기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헌금 십일조는 신앙의 척도요 축복받은 증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가르친다.
이와 같은 종교 망국적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같은 것이 오늘날 타락한 교회의 성경읽기수준이요 눈멀고 귀먹은 교회의 양상이다.
오늘날의 십일조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우상의 제물이 되어 버렸다.
우상과의 돈거래가 되어버렸고 십일조 교인과 축복이라는 허깨비 귀신만 난무하고 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돈을 좋아하는 신이 어느 신이냐고 묻는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일 게다. 누가 이렇게 하나님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 곧 돈이나 좋아하고
받은 돈에 비례하여 축복이나 주는 천박한 신으로 바꾸어 버렸는가.
잃어버린 십일조를 다시 찾자.
성경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돈 십일조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라면 얼마나 쉽고 좋으랴.
허나 하나님은 돈을 당신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깡패 두목이고 우리 인간들은 앵벌이란 말인가.
그는 코 묻은 돈이나 갈취하는 약탈자가 아니다.
월급의 십일조를 내 것이니 가져오라고 협박하는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돈에 관심이 없다.
돈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돈은 오로지 육체와의 연관일 따름이다.
자기가 좋아하니 하나님도 좋아하리라고 착각하지 마라.
그것은 단지 육체의 필요요, 삶의 목적이 아니다.
물론 돈을 인생의 목적이라고 내놓고 말하는 종교인은 그리 많지 않다.
허나 돈을 좋아하는 종교인들은 온통 신앙생활의 대부분을 돈 축복에 집중한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다.
마음을 받기 위해 돈을 받는 것이지 결코 돈이 필요해서 헌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하시라.
헌금은 마음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언제까지 속이려는가.
마음을 돈으로 계량화하려는 어처구니없는 작태로 작금의 교회는 잘도 번성한다.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에만 관심이 있다.
하나님의 것에만 관심이 있다.
'하나님의 것'을 받으시기를 원하실 따름이다.
그러므로 월 소득의 십분의 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 알 방법이 그대에게는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십일조든 십이 조든 당신 것이니 받으시고 내게 더 많은 십일조를 낼 수 있도록
축복이나 듬뿍 내려 주시라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온통 돈독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따름이다.
아무리 돈이 세상에서 맹위를 떨친다한들 우리의 영혼과 돈이 무슨 상관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를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느냐.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을 뿐인데 그대는 성경을 폐하려는 자인가,
지금 무슨 망발이냐고 항의하실 분들이 많을 게다.
그렇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쓴다.
교회는 돈 십일조가 있는 대신 십일조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십일조를 찾아 나서자.
타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십일조다.
하나님은 호소하고 계신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 3:7-9)
말라기의 말씀에서 보는바 대로 십일조는 분명 하나님께 돌아가는 원리이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원리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십일조를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십일조는 화해의 원리다.
십일조는 사랑의 원리다.
십일조는 만물과 소통하는 원리다.
십일조는 너와 내가 만나고 함께 숨을 쉬는 원리이다.
십일조는 제사장의 원리이기도하고 새언약의 성취 원리이기도하다.
십일조는 속전을 드리는 제사의 원리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유일한 통로가 십일조다.
신과의 단절의 벽을 허무는 것이 십일조다.
그 같은 것이 단순히 돈으로 환원되었으니
진리가 땅에 곤두박질쳐도 이렇게 쳐질 수 있는가.
그러나 돈을 좋아하는 인생들이 기독교를 맘모니즘으로 만들어 놓고
저렇게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돈이 힘인 세상이니,
모름지기 돈이 위계질서인 세상이니,
모름지기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니
하나님이 돈하고 결탁하지 않고서야 어찌 하나님 자리인들 온전히 보전할까.
하나님 만세, 기독교 만만세, 돈신 만만세 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자. 그대의 하나님을 처단하자.
그것은 이제 그대 자신을 처단하는 것이다.
그대의 신이 정정하게 있는 한 그대는 여전히 처단되지 않는다.
이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십일조를 찾자.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자.
이 글이 그대의 신앙에 독이 되길 바란다.
그대에게 혼란이 되기를 바란다.
그대의 하나님에 균열이 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는 심술장이요 시비꾼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바위에 계란을 내려치면 계란이 부서진다는 것.
천하에 둘도 없는 미련한 짓임을 어찌 모르랴.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란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마저 깰 수밖에.
십일조는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원리란 말인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짝사랑의 열병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오기를 원하는 구애의 편지들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 곧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것, 곧 십일조에 해당하는 가이며
십일조는 과연 어떻게 드리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이 받는다.
이것이 십일조의 기원이다.
그러나 좀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하와는 뱀의 말을 받는다. 아담은 하와를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것을 받지 않고 뱀의 것을 받은 인생들의 타락이다.
'하나님의 것'은 이때 잃어버렸다.
그리고 뱀의 것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뱀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져다가 바치려 한다.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선)을 하나님이 받으시리라 여겨 하나님께 바치고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악)은 버린다.
이것이 하나님께 잘 포장한 인간의 정성스러운 예물이다.
이때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불화가 시작된다.
인생들은 자기 것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려 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 외에는 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시니
거기 인간의 소외가 시작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소외가 시작되었다.
영원한 사이 띄기, 영원한 틈새, 영원한 평행선이 시작되면서
어두움의 그림자가 인생 가운데 짙게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브람은 이렇게 짙은 어두움이 서려있는 갈대아 우르를 박차고 나와
자신의 여행을 시작한다.
물론 갈대아 우르에서는 그의 아버지 데라가 데리고 떠나지만
하란에서 그의 본격적인 순례의 여행은 시작된다.
우상의 신을 내던지고 순례의 걸음을 내딛는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의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것은 무엇인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일생동안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려는 온갖 시도를 행한다.
그 시절이 아브라함 이전의 아브람 때이다.
아브람의 일생은
어떻게 인생과 하나님의 평행선이 계속되는 가를 가르쳐준다.
마침내 하나님이 평행선을 깨고
하나님의 것을 취하는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어진 때이다.
아브람과 아브라함,
곧 두 이름을 통해 엿볼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방식.
평행선이 깨진다함은
하나님이 항복을 하던지 아브람이 항복하던지 둘 중 하나가 두 손을 들어야 한다.
아브람은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상징이요,
아브라함은 자신의 것을 내어던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상징이다.
모름지기 위대한 삶의 족적을 남긴 현인들의 생애는
항상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으로 나누인다.
아브람이 전기의 삶이라면 아브라함은 참된 삶의 의미를 깨달은 후기의 삶이다.
전기는 후기로 나아가는 사닥다리요 징검다리이다.
전기는 이스마엘로 후사를 삼아 하나님의 유업을 삼고자하는 때이니
자신의 지혜가 충천하고 열심이 특출하여 자신의 믿음(자기의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때이며,
후기는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어 쫓고 사람의 열심이 사그라지니
곧 하나님의 믿음인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 이삭(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때이다.
사울은 큰 자요,
바울은 작은 자이다.
사울의 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에 올라가 하늘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는 때며,
음부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열심이 있는 때이다.
하나님의 것은 없고 온통 자신의 것만이 기승을 부리는 때라는 말이다.
십일조도 자신의 것으로 드리고 봉사도 자신의 것으로 하고 무엇을 하던지
자신의 것으로 하는 때이다.
자신의 의로움이 넘치는 때요 하나님의 의는 입술에만 있고
자신의 것이 온통 크게 보이는 삶을 사는 때이다.
베드로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를 좇으며 따라 다닐 때의 베드로는
예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었다.
목숨을 바치는 것쯤 무에 그리 두려웠겠는가.
'내가 당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하며 충성의 맹약을 서슴지 않는 것이
베드로의 신앙이다.
예수는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서 덥석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는 그 같은 베드로를 결코 받을 수 없다.
그것은 다만 베드로의 관심사요 베드로의 것이지 하나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 몸을 주께 드리오니 받아주시옵소서' 한다고 해서
그 몸을 하나님은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왜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모른다는 말인가.
그 같은 신앙고백은 모두가 인생들의 일이요, 인생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에만 관심이 있다.
인생들의 그것에 눈독을 들이지 않는다.
십일조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되 질문 해보자.
하나님의 것은 무엇이며
도대체 하나님의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말인가.
온 세계 가운데 충만히 거하는 만물 중에
엄격히 말해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것을 구분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가.
그런데 사람만이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을 구분하여 도적질하고 탈취한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체를 내 것으로 삼아 탈취한다.
내가 나의 것으로, 사람만이 하나님의 것을 제 것 만들어 마음대로 탈취한다.
그러다 보니 만물과 관계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역시 제 것으로 삼는 소유방식으로 만물을 바라보고 관계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다보니 모든 관계방식
역시 자기 성을 구축하고 자신의 영역표시를 하기 시작한다.
거기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막히고 자기의 영역은 더 높이 구축된다.
담은 더욱 높아간다.
그것을 가지고 신에게 충성하고 봉사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자기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거래를 시도한다.
자기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을 인생과 같이 여겨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만물 가운데 계신다.
이처럼 막연한 말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계신 것이 아니라 성전에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계신다.
이것을 우리가 짓밟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내 마음대로 짓밟고 살았던 우리들의 삶.
하나님의 정신과 하나님의 얼을 담아내고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들의 마음을 복마전으로 바꾸어 잃어버린 성전.
이것을 밝혀 당신의 것을 되찾아 하나님은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빼앗긴 들에 과연 봄을 올 것인가.
우리 안에 있는 하늘의 신성은 과연 꽃 피울 것인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과연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드릴 수 있는가.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반면 네 안에 계신다.
그 영성의 자리가 떨쳐 일어나야한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
곧 네 안에 있는 하나님을 내 안에 있는 신성이 알아차리느냐 하는 것이
십일조와 깊은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받는 원리가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이다.
십일조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것'을 내가 취하는 것을 일컫는다.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나님의 것'을 이기적인 나는 결코 취할 수 없다.
이기적인 나는 그 속성대로 너에게 있는 더러운 것들만 취한다.
즉, 탐심은 하나님의 것을 취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그 탐심의 속성대로
너를 소유하려하고 나의 탐심을 채우는 데에만 너의 존재가 소용된다.
거기에는 십일조가 없다.
그러므로 죄인은 네 안에 있는 신성을 취할 수 없다.
나의 마음을 찢어내어 네게 다가갈 때만 네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받을 수 있다.
무조건 내 마음을 받으소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뒤에서 좀더 말하겠지만 '받음은 드림'이다.
예수는 어떻게 베드로를 받으시는가.
이 같은 물음이 화두가 되어 풀릴 때 비로소 십일조의 비밀은 풀릴 수 있다.
십일조는 돈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을 일컫는다거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한다는 것 따위는 십일조가 아니다.
그것은 십일조에 대한 또 하나의 이론이며 종교이데올로기일 따름이다.
십일조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 이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오니 십일조로 받아주시옵소서'라는
종교적인 고백이나 행위로 십일조가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는 베드로의 삶을 통해
어떻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받으시는가하는 점을 통해서
십일조를 알아보자.
예수께서 받을 수 없는 베드로와 받을 수 있는 베드로는 무엇인가.
그렇다.
예수는 피체 베드로를 십일조로 받아서 그의 양식으로 삼을 수가 없었다.
예수는 베드로를 십일조로 받고 싶어 하신다.
베드로를 하나님의 것으로 빚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대로 예수 자신이 베드로의 죄를 속하기 위한 속전이 되셨다.
사람의 일로 가득한 베드로의 육신에 속한 모든 소욕과 죄를 처리하기 위해
그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십자가 사건 이후 베드로와 예수의 대화를 살펴보라.
요한복음 21:15-19에 나타난 베드로는 결코 이전의 베드로가 아니었다.
스스로 하는 사랑은 모두가 에로스였고 에로스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예수와의 사랑에 대한 세 번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이었다.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다니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인도받는 삶이 전개될 것이니
거기에 새로운 삶의 비밀이 있고,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창조가 있는 것이다.
즉, 예수는 비로소 베드로를 하나님의 것, 곧 십일조로 받으실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베드로를 하나님의 것 곧 십일조로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것이 창조되어야 하고 그것은 곧 예수 자신이 속전으로 드려지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는 베드로를 십일조로 받으셨다.
그것은 동시에 그 자신이 하나님께 버리움이요, 드려짐이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제물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속전이 되어서 단번의 제사를 드리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짐이 된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의 십일조를 받는다.
레위 제사장이 백성들의 십일조를 받는다.
거기서도 받는 것은 바치는 것이 된다.
히브리서 7장의 본문에 나오는 십일조와 관련된 동사는 매우 독특한 동사요
성경에서 유일한 형태를 띠고 있다.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십일조를 받는다는 말과 동의어가 된다.
아니, 그것은 동의어가 아니라 같은 말이다.
십일조를 바친다는 말이나 십일조를 취한다는 말이나
헬라어는 하나의 단어를 쓰고 있다(δεκαόω 데카토오).
그러므로 우리말 표현은 뉘앙스가 다른 듯 보이지만 받는 것이 바치는 것이다.
받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속전 제물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속전(λύτρον 뤼트론)이란 얽매인 자를 자유롭게 풀어주거나
저당 잡혔던 재산을 되찾기 위해 지불되는 대금을 일컫는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의 대속불로 오셨다(막 10:45).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다(출 30:11-16).
우리가 받쳐야 할 돈은 가이사의 형상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 그려져 있고
하나님의 글이 적혀 있는 돈을 속전으로 바치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십일조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고
바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다. 우선 돈이 없기 때문이다.
가이사의 형상은 있으나
하나님의 형상과 글이 박혀 있는 하나님의 지폐가 없다는 말이다.
말로는 만인제사장論을 외치고 있는 기독교이지만
누가 '너'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 '나'를 바칠 수 있는가.
누가 '너'를 위해 산 제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온통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서로를 갈취하려는 눈만 번쩍이는 저 종교인들의 군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지폐가 유통될 수 있다는 말인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을 때,
자신이 제물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너'를 받을 수 있다.
이 때 '너'란 아무 것이나 '너'가 아니다.
육신의 것으로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너'는 그대 안의 '하나님'을 말한다.
예수가 베드로를 영접하고 그를 받고자 하는 것은
열심이 특출하다거나 충성심과 봉사심이 넘치는 그 베드로가 아니다.
그러한 인생의 진실 따위나 받으시려고 예수가 베드로에게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예수의 열심은
베드로의 속에 좌정하고 계신, 미처 베드로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있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취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를 얻고자 자신이 속전으로 드려지는 드려짐.
빼앗긴 것을 되찾아 다시 하나님의 것으로 빚어 취하시려는 것이 십일조의 비밀이다.
예수의 공생애란 베드로를 취하고자 떡과 포도주를 들고 나가서
그를 축복하고 있는 장면인 셈이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피 흘리기까지.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 14:18-19)
이것이 제사장의 원리요 복 빎의 원리다.
우리의 복은 하나님의 것을 나누는 것 밖에는 없다.
내가 피 흘리지 않으면, 산 떡이 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우리의 먹거리, 우리의 양식, 우리가 추수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같은 것이다.
이 같은 말씀이 주어질 때 사람들은 모두 도망간다.
너와 내가 만나는, 내가 없어져야 하는 문제가 도래하기 때문에 다 도망간다.
살을 찢어야 하기 때문에, 피를 흘려야 하기 때문에 다 도망하는 것이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이들이 도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양식을 뉘라서 주고받을 수 있겠는가. 십일조를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는 것은 이 보화를 짓밟는다는 것이다.
탈취하고 도적질하기 때문에 십일조가 없다.
하나님의 것을 갈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인데, 어떻게 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안에 계신 하나님과 더불어 이제는 '너 속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숨쉬고 계시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말씀에 도색된 죽은 하나님이 아니다.
네 속에 살아계신 신성이다.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하나님이다.
인생들은 성경의 많은 구절들로 금칠해져 있는 도색된 하나님과 화려한 수사들,
현란한 언어로 덧칠된 거짓된 하나님을 좋아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하나님만 알지
십일조로 드려져야 할 하나님은 온 데 간 데가 없다.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십일조는 땀이고 고난이고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피 흘림이고
우리가 울어야 통곡의 눈물이다.
너를 만나지 못하는 문제는 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인생들은 서로가 주려고만 하거나 받으려고만 한다.
'자기 것'을 주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악을 주는 것이고 죄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다.
내게 있는 것을 주어봐야 받는 사람은 곧 그 같은 것은 내게도 있다고 말한다.
내 것 가지고 하나님의 것인 양 주려고 호들갑을 떨지 말자.
호기심을 갖고 취하려고 달려들지는 몰라도 잠시 지나면 그 정도는 내게도 있다고 한다.
물론 겉으로야 짐짓 딴청을 피우겠지만 속으로는 결코 받지 않는다.
십일조의 삶은 그런 양태가 아니다.
그의 것을 공유하는 것만이 복 있는 것이다.
큰 자가 어린 자에게 나누어주는 원리. 물이 흘러가듯 흐르는 원리가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복을 비는 원리이다.
여기서 큰 자란 계급적인 의미가 아니라 생명의 질서를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는 십일조를 바치기 위해서 십일조를 받아야 한다.
십일조를 받는 것이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일조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사장만이 받는다.
이것만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유일한 통로요 길이다.
하나님은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다.
네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네 안의 하나님은 결코 나의 육신의 눈에는 계시되지 않는다.
나의 눈에 안약을 바르고 눈 먼 눈을 빼어버리고
새로운 눈이 뜨일 때만 네 안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경배할 수 있다.
그럴 때 너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은 너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 드려짐이다.
이것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멜기세덱에게 바치는 십일조의 원리다.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평강의 왕이신 멜기세덱에게 바치는 십일조의 원리다.
거기 사람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가 왕같이, 바다처럼 깃들어 있다.
너와 나, 하나님과 인간, 만물과 사람의 충만한 화해가 거기 있지 아니한가.
살렘 왕, 평강의 왕, 화해의 왕권이 거기 그렇게 있다.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진행되는 십일조의 원리이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이란 말인가.
그것은 내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내게서 마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너를 십일조로 취해서 나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또 너를 십일조로 드림이 되나,
'너'는 또 다른 '그'를 십일조로 받아서 취하고 동시에 드려져야 하는 원리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멜기세덱에게 바치는 십일조의 원리인 것이다.
화해의 연쇄 고리가 거기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것은 피 흘림의 연쇄 고리이다.
사랑의 연쇄 고리이며 온전한 대동제(大同際)가 드려지는 비밀이다.
십일조는 따라서 율법을 완성하는 원리이며 제사의 원리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이 곳 하나님의 성전인 지성소의 속죄소에서 만난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축복이라는 것, 찬양이라는 것은 이 같은 화해의 노래를 일컫는 것이다.
허나 사람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허명(虛名)과 미명(美名)만 난무한다.
십일조는 하늘의 문이 비로소 열리는 열쇠다.
아니 하늘의 문이 열리는 곳에서 십일조는 드려진다.
십일조는 하늘 문을 여는 조건이 아니다.
십일조가 드려지는 곳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문이 열리는 곳에서 십일조가 드려진다.
말라기서의 표현은 답답한 이스라엘, 곧 선민의식은 갖고 있으나
하나님께는 멀어져 있는 인생들을 향해 외치는 간곡한 외침이
마치 십일조가 하늘 문을 열기 위한 조건인 양 그렇게 표현된 것일 따름이다.
선민의식(選民意識)은 천민의식(賤民意識)이다.
선민의식을 갖고는 결코 십일조를 드릴 수 없다.
십일조는 천둥이며 번개다.
뇌성벽력인 십일조가 돈으로 바뀌어 버렸으니 참으로 이 시대의 기독교는 딱하게 되었다.
이제라도 돌이키자.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가.
그렇다. 십일조를 드려보라.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그대 복 있는 자.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가 될 터이다.
- 받은 메일 중에서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