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장 말씀묵상]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17-18절)
사람들은 무엇인가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를 좋아합니다. 산에 오르면 산에 자기 이름을 새깁니다. 어떤 명승지에 가도 “몇 월 며칠 누구 왔다 가다”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외국에 가서도 한국 사람들이 왔다간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흔적 말고 몸에 흔적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몸에 흔적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해서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남겨진 흔적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폭들을 보면 문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한 조직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몸에 문신을 새깁니다.
저는 왼쪽 팔에 좀 크게 데인 흔적이 있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제가 아주 어렸을 때 기억나지 않는데 뜨거운 물을 엎질러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사춘기 시절에는 철이 없어서 어머니한테 이 흉터 때문에 싫은 소리도 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때로는 타의에 의해서 흔적이 남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면서 갈라디아성도들에게 이제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속에서 이제 갈라디아 교회성도들이 거짓교사들에게 미혹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바울의 마음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너희도 나와 같이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흔적이라는 것은 주인이 종에게나 짐승들에게 자신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해 낙인찍는 것을 말합니다. 곧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파하면서 당한 수많은 고난의 흔적들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고난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을 말합니다. 첫 번째는 수많은 육체적 고난으로 인하여 실제로 몸에 남겨진 박해의 상처들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전하다가 많이 맞고 고난을 당하였기에 아마 상처 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 상처는 예수님 때문에 당한 예수의 흔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려고 했던 믿음의 흔적을 말합니다. 바울은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푯대 되신 예수그리스도만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요. 바울이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예수의 흔적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흔적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드리기 위한 흔적입니다. 바울이 죽어서 예수님앞에 갔을 때 이 땅 가운데서 예수님 때문에 당한 고난의 흔적들을 보여드리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고난의 흔적을 보시면서 바울을 칭찬해 주셨을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뿐만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의 흔적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대한민국에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매를 맞는 경우는 많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남겨야 할 흔적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믿음의 흔적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늘 예배하고 기도하는 믿음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믿음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믿음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땅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부정적인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이 땅가운데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을 보기가 드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 드릴 믿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보여드릴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살았던 믿음의 흔적을 주님께 보여드리면 됩니다.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믿음의 흔적은 가만히 있는다고 남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주의 일에 그냥 힘쓰는 자가 아니라 항상,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최선을 다해야 함을 말합니다. 대충 대충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안타깝게도 힘을 다해서 믿음의 흔적을 남기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기 편한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하나의 악세사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의 종교생활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삶의 모습은 온전히 주님을 구주로 모신 삶이 아닙니다.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들이 주인의 자리에서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여전히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모든 삶이 주님을 위주의 삶이 아니라 자신 위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흔적을 남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고난의 흔적입니다. 고난의 흔적이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흔적입니다.
이생진가 쓴 ‘벌레 먹은 나뭇잎’이라는 시를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이 잘못인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벌레 먹은 나뭇잎이 아름답습니까?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벌레 먹지 않는 나뭇잎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벌레 먹은 나뭇잎이 아름다운 것은 그 구멍이 누군가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런 상처도 아픔도 없는 인생이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몸에도 마음에도 우리의 삶가운데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삶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전 축구 국가 대표였던 박지성 선수의 발이나 발레리나 강수진씨의 발은 보면 이것은 사람의 발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너무나 징그럽습니다. 하지만 그 발을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발이 그들의 삶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울처럼 남은 생애동안 예수의 흔적을 가지기 위해서 더욱 애쓰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갈라디아서 6장 말씀묵상]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17-18절)|작성자 아름다운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