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하라 (엡5:18절)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 강림주일은 주님의 승천 이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이 임재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바로 이 기록이 오늘날의 성령 강림주일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복음전도자의 삶을 살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초대교회가 형성되고 전 세계적으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들은 성령 강림주일을 교회의 절기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무기력한 교회, 무능력한 성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맡겨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헬라어로 ‘두나미스’라고 합니다. ‘두마니스’는 다이나마이트라는 의미입니다. 다이나마이트의 폭발력과 힘은 엄청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시다가 지금은 은퇴를 하신 박영돈 교수님의 라는 책에 보면 ‘성령의 후폭풍’ 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박교수님이 군에서 경험했던 106m무반동총을 떠올리며 생각한 것이라고 합니다. 106m무반동총은 지프차에 싣고 다니는 기다란 포를 말하는데요. 이 총의 특징은 이름처럼 발사될 때 반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동이 없는 대신 포 뒷면으로 불이 뿜어져 나와 후폭풍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포를 쏘면 포 뒤쪽에 있던 꽃이나 풀 같은 것들이 그 후폭풍에 다 시들어버린다고 합니다. 박교수님은 여기서 힌트를 얻어 ‘성령의 후폭풍’이란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성령의 후폭풍’은 글자 그대로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순방향으로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나지만, 반대로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은 시들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잡혀가셨을 때 죽음이 두려워서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충만을 받았을 때 그들은 목숨을 내어놓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요14: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신 후에 자신을 대신할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혜사’란‘돕는 자, 중재자, 대변자,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가만히 보면‘보혜사’란 의미가 성령님께서 오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그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곁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중재자로서, 대변자로서, 때로는 위로자로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일생도 성령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도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신 이후에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요 3:3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여기서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시는 동안 언제나 성령의 충만함으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이후에도 요20:22절에서 보면 제자들을 향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으로 충만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오늘 읽은 말씀에서 성령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런데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은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거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신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충만은 아닙니다.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흘러 넘는 것을 말합니다. 가득한 것을 충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차서 흘러넘치는 것을 충만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우리의 속에서 성령님이 가득차고 넘친다는 말씀입니다. 곧 성령님이 우리를 온전히 지배하고 다스리는 상태가 성령충만한 상태입니다.
바울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술취하지 말라는 말씀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성령충만과 술취함을 대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나타나는 증상이 서로 비슷한 부분도 있고 확연히 대조되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비슷한 것은 이 둘은 모두 인격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을 보면 그는 이성을 잃고 술이 원하는 대로 이끌려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술의 주인이었지만 나중에는 술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술을 먹는 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그 다음은 술이 술을 먹는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이 사람가운데 충만하면 주인이 성령님으로 바뀌기 때문에 성령님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이끌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둘은 영향력에서 확연하게 다릅니다. 먼저는 행동에 있어서 다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어둠 가운데서 방탕함과 온갖 더러운 것들을 취하고 행동합니다. 이에 반해 성령 충만한 사람은 빛 가운데 걸으며 성실함과 열린 마음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또한 하는 말에서 차이를 드러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불분명합니다. 횡설수설합니다. 또한 그들은 온갖 더러운 말을 하며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에 반해 성령충만한 사람은 사랑의 말을 하고, 사람을 세워주는 말을 하고 진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냄새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어쩔 수 없이 무엇을 먹었느냐에 따라 냄새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은 그 입에서 술 냄새가 납니다. 이것은 악취입니다. 하지만 성령에 취한 사람은 그에게서 향기가 나옵니다. 그 향기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기에 바울은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성결대학교 교수이자 성령의 삶 코스 대표인 배본철 교수님은 성령충만에 대한 정의를 세 가지로 내리고 있습니다. 첫째, 성령충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케 된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 정의는 제가 앞에서 말씀을 드린 정의가 동일한 부분입니다. 둘째, 성령충만이란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배교수님은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이 관념상으로는 성령님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생활 속에서 성령님께 인격적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지 않고 나의 고집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충만한 상태가 아닙니다.
셋째, 성령충만이란 성령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과 친밀한 교제를 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피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멀리 했던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온 것은 죄악과 수치와 두려움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한 인간의 영혼은 유전으로 부패한 죄성을 온 인류에게 이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끊어진 교제의 다리를 다시 잇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로 죄인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신앙의 경륜이 오랜 분들만이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초신자라 할지라도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 나누기를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성령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요?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행2:38절 말씀입니다. “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충만을 받은 베드로사도는 유대인들 앞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는 마음의 찔림을 받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베드로사도에게 물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사도가 한 말씀이 사도행전2:38절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죄가 가득한 심령속에 임하실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깨끗한 심령가운데 임하시기에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1907년도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07년 1월 13일 주일밤에 장대현교회에서 마지막 연합부흥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길함 목사님은 당시 집회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집회는 전혀 영적인 생기가 없었으며 하나님의 성령이 회중 가운데서 떠나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사람들은 매우 답답해 했다.” 장대현교회 모인 사람들은 그러한 분위기를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길함 목사님은 무엇 때문에 집회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는지에 대해 성도들을 향해 물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한 사람이 일어나 눈물로 죄를 뉘우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집회에 은혜를 내리시지 않는 이유는 바로 저 때문입니다. 저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약 1년 전,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하기 전에 내게 부탁하였습니다. ‘길 장로,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내 유산을 돌아보아주시오. 내 아내가 세상을 너무 모르니 당신만을 믿겠소’저는 염려 말라고 약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뒤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해주면서 미화 100불 상당을 사취하였습니다.” 길선주 장로님은 회개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악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날이 밝는 대로 사취한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길선주장로님의 고백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했고, 바로 그 순간 여러 날 동안 무겁게 짓누르던 장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애끊는 회개가 예배당을 휩쓸었고 저녁에 시작한 합심기도가 새벽2시가 돼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막혔던 하늘이 열리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그 곳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회개하는 심령들 속에 임하십니다. 죄를 회개해야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더러운 곳에 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둘째 성령충만 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행4:31절 말씀입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여기에서 ‘빌기를 다했다’는 말은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였을 때 모인 곳이 진동하기 시작했고 모든 사람이 성령이 충만해서 담대히 말씀을 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행1:14절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이 말씀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여명의 사람들은 그냥 모여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함께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오히려 기도에 힘썼다는 것은 함께 모여서 다른 것 안하고 기도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했을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의 충만의 역사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였습니다.
성령님과 만나는 채널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성령님과의 만남의 통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도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개인기도, 통성기도, 합심기도, 금식기도 등 기도를 통해서 성령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성령충만함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셋째, 말씀을 들을 때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행10:44-45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한 번은 환상가운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대로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넬료는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놓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곳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임하였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합니다.
여기서 듣는 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발 앞에 엎드려 절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 만큼 고넬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였다는 것입니다. 고넬료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사모함으로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닌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랬을 때 성령충만함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겸손하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을 때 성령충만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님이 중심이 되어 사역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성부하나님, 성자예수님, 성령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세분 하나님께서는 함께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도 함께 계셨고 지금도 함께 계십니다. 하지만 구약시대는 세분 하나님 중에서 성부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이 땅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사역이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재림하실 때까지는 성령님이 중심이 되는 시대입니다. 곧 우리는 성령님이 중심적으로 사역하는 마지막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합니다. 성령충만해야 우리는 이 마지막시대에 예수님의 증인으로 복음을 전하며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회개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음으로 성령충만하여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성령충만하라 (엡5:18절)|작성자 아름다운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