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장 말씀묵상]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1-19절)
방송작가인 송정림씨가 사랑에 대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마음에 차고 넘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에 담아두기만 하는 것 또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발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에 혼자서는 절대 가서 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속으로만 꼭꼭 간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는 이의 마음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내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글이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표현해야 믿는 바보다. 여자는 달콤한 말 한마디에 현혹되는 바보다. 남자는 사랑하는 바보가 무얼 원하는지도 모르고 묵묵히 비싼 가방을 사기 위해 말을 아끼고 돈을 모으는 더 바보다” 우리는 사랑을 마음에만 담아 둘 때가 있습니다. 감사함과 고마움을 마음에만 담아 둘 때가 있습니다. 미안함을 마음에만 담아 둘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것이든 사람에게 대한 것이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로도 표현해야 하고 행동으로도 삶으로도 표현해야 합니다.
특히 가까운 가족들에게 표현을 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소중함을 모르고, 너무 사랑해서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소홀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있기에 소중하기에 더 표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님에게 자녀들에게 표현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선에 있는 한 마을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보고 멀리서서 큰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외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나병을 하나님께 저주받은 병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5:1-3절에서 보면 나병 환자는 이스라엘의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서 진영을 더럽히지 말라고 나와 있습니다. 진영 밖으로 쫓겨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술을 가리고 옷을 찢는 행위를 했는데 이것은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한다는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나병환자들은 살아 있지만 실상은 죽은 자처럼 대우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고 가족과도 함께 살수가 없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의 삶은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나병환자들이 용기를 내어 멀리서서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보시고 그 자리에서 고치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병환자는 병이 낫게 되면 제사장에 가서 그것을 확인 받아야지만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나병이 낫지도 않는 나병환자들에게 나병이 낫고 난 다음에 확인받아야 하는 제사장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도 우리가 믿음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았는데요. 예수님은 지금 나병환자들에게 이미 나은 줄로 믿고 제사장에게 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일종의 모험입니다. 만일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나병이 낫지 않는 다면 그들은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모험을 하게 되었고 제사장에게로 가던 도중에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는 도중에 각자가 무엇인가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서로 서로를 보면서 나병이 고침 받은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나병이 다 나은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그런데 열명의 나병환자 중 한명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 앞에 와서 자신을 고쳐주신 것에 감사하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더욱이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돌아와서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눅17:17-18)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에 대한 섭섭함이 묻어 있습니다.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도 와서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나머지 아홉 명이 예수님께 오지 않는 것이 안타까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안타까워 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사람은 육신의 나병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홉 명의 나병환자와 한명의 사마리아 사람의 공통점과 다른 점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공통점은 이들에게 동일하게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이들이 먼저 예수님께 도움을 구했다는 자체가 믿음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못 먹는 감 한 번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예수님께서 도움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가면 나병을 치유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아직 낫지 않는 몸으로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 예수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저는 아홉 명의 나병환자도 당연히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병을 낫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나병이 나았는데 어떻게 그 마음가운데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만일 감사하는 마음조차 없었다면 사람도 아니지요. 이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예수님께 가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감사하는 마음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나병이 치유된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함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아홉 명의 나병환자와 사마리아 사람의 차이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열명의 나병환자가 어느 정도 갔을 때 나병이 고침을 받았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아서 고침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한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돌아오지 않는 아홉명의 나병환자에게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들이 멀리까지 가서 고침을 받았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둘째,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들에게 “제사장들에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 이라고 말씀하시고는 가던 길을 가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멀리에서 고침을 받았다면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나병을 고침 받았기에 가던 길로 가서 제사장들에게 자신들이 나은 것을 보이고 가족들에게도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인들 빨리 제사장에게 가서 나병이 나은 것을 보이고 가족들을 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쳐주신 예수님께 와서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 아홉 명과 감사를 표현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 결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납니다.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그 육신은 고침을 받았을지 몰라도 그 영혼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뿐만 아니라 그 영혼까지 구원받은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표현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부부는 눈빛만 봐도 다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론 보이지 않아도 알 거라 여기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표현해야 알 수 있습니다. 표현을 해야, 확신이 생기고 확신이 생겨야 믿음이 생깁니다.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는 ‘내게 관심이 없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구나’하고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표정하나 행동하나 말하나 자기방식대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많은 오해를 낳게 됩니다. 나는 그런 의도로 말하거나 행동한 것이 아닌데 상대는 그것을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표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마음이 넓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봐도 그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특히 여자들에게는 남자들이 표현을 많이 해주어야 합니다. 여자들은 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끊임없이 사랑한다, 고맙다고 표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경상도 남자들은 어떻게 이야기 합니까? 꼭 그것을 표현해야 하느냐고. 낯 간지럽게 왜 자꾸 묻느냐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잘 안 되더라도 훈련해야 합니다. 그럴 때 좋은 관계를 유지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에게 표현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러 나오셨을 때, 변화산위에 올라가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만 사랑을 표현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표현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믿음의 선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은 그들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표현해 주셨다면 우리도 하나님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도 표현해야 하고 삶으로도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말로도 물질로도 삶으로도 표현해야 합니다.
옛날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 고등학교를 고학하며 다닌 중년의 신사가 모교를 찾아갔습니다. 운동장에 들어서는데 옛날 생각이 나서 걸어가던 발걸음을 더 떼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성적이 늘 상위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생활이 어려워 공사장에서 무리하게 일하는 바람에 며칠을 몸살감기로 앓아누웠고, 그 때문에 시험공부를 많이 하지를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늘 걱정해주고 학비도 대주시던 담임선생님에게 실망을 안겨드릴 일이 제일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발적으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커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시험 감독을 했던 선생님에게 들키게 되었고, 교무실에까지 끌려갔습니다. 커닝을 해서 교무실에 끌려왔다는 것을 들은 담임선생님은 그를 향해 가더니 매를 들고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달려와 담임선생님을 말리고 나서야 선생님의 매가 겨우 그쳤습니다. 그 일로 그는 섭섭한 마음에 학교를 그만두고 그 지역을 떠나버렸습니다. 물론 선생님과의 연락도 끊어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중년의 신사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머리가 희끗해지는 동안 그는 선생님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원망도, 증오도 있었지만 다 사라져 버렸고, 이제는 그저 선생님께 죄송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옛 생각에 멈춰 선 발걸음을 어렵게 다시 옮겨 교무실로 갔습니다. 그동안 연락이 끊어진 담임선생님이 어디에 계신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계신 곳은 너무 멀었습니다. 벌써 오래전에 선생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남긴 색 바랜 편지봉투 하나가 수십 년 세월을 지나 그에게 전달됐습니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학교 뒷동산을 올라 그 편지를 펼쳤습니다. “길수야, 그날 때린 거 미안하데이. 커닝하면 퇴학당하는 교칙이 있어서 학생부에 너 안 넘기려고 일부런 때린 것이다” 선생님의 편지는 계속이어 졌지만 눈앞이 흐려져서 더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후회스러운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더 일찍 찾아뵈었더라면, 더 일찍 오해를 풀었을 것인데, 덜 아파했을 것이고, 덜 방황했을 것이고, 덜 죄송했을 것인데...“
우리가 삶을 살아오면서 후회하는 일들이 어떤 일이 있을 까요? “그때 내가 왜 그랬을 까? 그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 까?” 이렇게 내가 했던 일과 말에 대한 후회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후회는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그 때 그 말을 해야 했는데, 그 때 그 일을 해야 했는데” 지금 표현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그 사람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일은 그 사람이, 그 순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표현하는 인생이 되셔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