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 맺는 땅이 되어야 합니다. (눅8:4-15)
육상경기에서 가장 치열한 경기가 100M 달리기 일 것입니다. 100M달리기에서 1등과 꼴찌의 차이가 1초도 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1등과 2등 차이가 0.01초 밖에 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간발의 차이입니다. 일상에서 1초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입니다. 하지만 100M달리기 선수에게는 1초는 엄청난 시간입니다. 간발의 차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차이로 메달의 색깔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메달을 따는 사람과 따지 못하는 사람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선수는 그 간발의 차이를 앞당기기 위해서 피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교실에서 같은 선생님에게 수업을 듣고 시험을 쳐도 성적은 다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각 학생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다른 삶을 살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과 차이 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차이가 결국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 일상적으로 농부가 씨뿌리는 모습을 보고 그것에 영적인 진리를 담아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묻자 그 비유의 뜻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씨뿌리는 비유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이 부분을 종합적으로 해서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에서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의 마음을 가리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씨앗이 뿌리진 네 가지 밭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어떤 마음의 밭을 의미하는 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그 밭을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길가와 같은 마음 밭입니다. 길가는 어떻습니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밟아서 땅이 굳어져 버렸습니다. 길가는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지 씨앗을 자랄 수 있는 땅이 못됩니다. 그래서 길가는 씨앗 자체가 뿌리를 내릴 수가 없는 땅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은 자신의 능력과 경험과 선입관과 고집으로 굳어진 완고한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 밭이 자기만의 것들도 굳어진 사람은 말씀이 뿌리를 내릴 틈이 없습니다. 어떤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탄이 새처럼 와서 그 말씀 자체를 빼앗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는 자리에 있어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말씀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위와 같은 마음 밭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바위라고 나와 있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돌밭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보면 바위위에 씨앗이 떨어진 것처럼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실제로 바위위라고 하는 것은 바위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위에 흙이 조금 덮혀 있는 바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돌밭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위위에 떨어진 씨앗은 햇빛도 잘 받고 온기가 있어서 다른 곳보다 더 빨리 싹을 틔우게 됩니다. 하지만 그 밑은 단단한 바위이기 때문에 뿌리를 더 이상 내리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땅에 습기도 없기 때문에 싹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말라 버립니다. 이런 바위와 같은 마음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받을 때 기쁨으로 받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좋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오면 그 좋았던 말씀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의 뿌리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서 그런 것인데요. 그런데 말씀의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에게 말씀의 뿌리가 내리지 못하게 하는 바위가 무엇일까요? 바로 편리주의입니다. 바위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을 말씀을 들을 때는 너무나 좋아서 아멘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삶 가운데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까 힘든 것입니다. 힘드니까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포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배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위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이스라엘백성 가운데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30년동안 애굽땅에 노예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을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애굽땅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서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뒤쫓아 옵니다. 이런 상황가운데 이스라엘백성들이 어떻게 합니까?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이곳까지 인도해서 죽게 한다고 원망합니다. 이런 상황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길이 없을 것 같은 홍해가운데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백성들로 하여금 건너가게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홍해를 건넜지만 그 뒤를 따라오던 애굽의 군대는 홍해의 물이 합쳐지면서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 노래를 부릅니다. 여인들은 미리암과 함께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홍해가 갈라진 이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백성들이 사흘 길을 갔는데 물을 얻지 못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또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고 시련이 오면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 주셨던 기적과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온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려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이스라엘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곧 로마가운데서 이스라엘 해방시켜줄 메시야를 이들은 기대했습니다. 이들은 정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행하신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 의하여 잡혀서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 호산나를 외치던 백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이런 이스라엘백성들의 모습은 바위 위에 씨가 떨어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았을 때는 너무나 좋았는데 시련이 오자 가차없이 배반해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오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런 모습을 종종 봅니다.
셋째는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도 어느 정도 내리고 싹도 어느 정도 자랍니다. 하지만 더 자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가시들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뿌리가 내린 상태를 말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에 대해 인정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려고 애쓰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만 가시의 방해로 성장이 멈추어지고 결국은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가시가 무엇인지 14절에서 주님께서 자세히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첫 번째 가시는 이생의 염려라고 말씀합니다. 이생의 염려란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우리의 육체를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를 염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의식주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의식주에 대한 염려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이라 구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염려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염려로 인해서 더 이상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가시는 ‘재물’이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에는 그냥 재물이라고 나와 있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재물의 유혹’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재물의 유혹 때문에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결국 신앙이 돈 앞에서 무너진다는 말입니다.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을 보십시오. 그는 영생을 얻는 길을 알고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재물을 다 팔고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에 영생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딤전6:9-10절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 말씀을 보면 재물의 유혹을 받는 사람들은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가시는 ‘향락에 기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향락에 기운은 우리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육체적인 향락이나 믿음의 생활을 방해하는 지나친 취미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향락의 달콤함이 얼마나 큽니까? 그 향락의 달콤함을 끊어버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믿음이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친 취미생활은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바둑에 빠진 한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어떨 때 강대상을 올라가면 성도들의 머리가 바둑알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목사로 지나치게 취미생활에 빠지면 제대로 사역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의 밭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가시들로 인해 성장하지 못하며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100배의 열매를 맺는 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실을 맺기만 하면 대박인 것입니다. 결실만 맺으면 기본이 30배입니다. 많이 맺는 사람은 100배입니다. 결실을 맺는 자와 맺지 않는 자는 천지 차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 밭에 특징을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의 밭을 가진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수하게 듣는 다는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계산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말씀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인내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했다고 해서 그 말씀의 결과가 당장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렸다고 해서 곧바로 열매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가을이 돼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기위에는 봄에서부터 가을까지 농부의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면 좋은 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듣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받아들여 인내하며 순종하며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옥토가 되었다고 해서 영원한 옥토로 남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를 짓던 좋은 땅에 공장을 짓는다고 버려둔 땅을 보십시오. 삽시간에 잡초가 나고 풀이 나고 황폐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마음 밭이 옥토가 되도록 잘 관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4가지 마음의 밭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이 네 밭 중에서 결실을 맺는 밭은 유일하게 옥토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조건 우리의 마음 밭이 옥토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들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결실이 맺히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 사람의 마음의 밭에 옥토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길가 보다는 바위위가 조금더 낫고 바위위 보다는 가시떨기와 같은 밭이 조금 더 낫게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세 밭은 결국 말씀의 결실은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나의 마음 밭은 어떤 밭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나의 마음 밭이 옥토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 밭을 기경해야 합니다. 갈아 엎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밭으로 만든다는 것은 결국 앞에서 말씀 드린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인내하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밭이 늘 옥토가 되어서 말씀의 결실을 30배, 60배, 100배로 맺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결실 맺는 땅이 되어야 합니다. (눅8:4-15)|작성자 아름다운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