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뉴스는 전해져야 합니다. (눅2:8-21)
옛날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을 평생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고 대중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소식을 접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다른 나라의 소식을 듣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글로벌시대가 되었습니다. 안방에 앉아서 아니 스마트폰 하나로 온 세상의 소식을 다 듣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뉴스를 통해서 들려지는 대부분의 소식은 어떤 소식입니까? 반가운 소식이 아닙니다. 사건과 사고 소식이 대부분입니다. 분명히 좋은 소식도 많이 있을 텐데. 좋은 소식을 많이 들려주는 매체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소식을 듣고 싶어 하지 나쁜 소식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2천년전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이 땅 가운데 알려주셨습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은 방이 없어서 말밥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 모습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서글픈 모습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이렇게 누추한 곳에 낳고 싶겠습니까?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고 할지라도 자식을 마구간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구간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이 세상가운데 태어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지만 그 환경 자체는 결코 기뻐할 만한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날 그 시쯤에 천사들을 마구간에 태어난 마리아와 요셉에게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천군 천사를 양을 지키는 목자들에게 보내어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십니다.
사람들은 생각지 못했던 일을 경험하게 되면 그 속에 두려움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목자들은 혹이라도 짐승의 공격으로 인해서 양떼가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밤에도 교대로 양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적막이 흐르는 캄캄한 한 밤중에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하늘위에서 있고 주의 영광이 두루 비추는 것을 목자들은 보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목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9절 후반부에 보면 “크게 무서워하는 지라”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은 무서워 떨었습니다. 그냥 무서워 떨었던 것이 아니라 크게 무서워 떨었습니다. 목자들의 무서움은 곧 두려움이었습니다. 여태껏 수없는 밤을 지새며 양떼를 지켜왔지만 이런 광경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을 본적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하늘에서 비춘 것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그 영광 앞에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천사는 무서워하는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눅2:10-11) 천사들은 지금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땅 가운데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사람들은 바로 밤새 양들을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천대 받는 사람들 가운데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고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먼저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충실감당하는 목자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것을 미가서5:2절 말씀을 통해서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큰 별을 보고 동방박사들이 와서 메시야의 탄생을 알려주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만일 이 땅 가운데 태어난다면 자신들에게 가장 먼저 하나님이 알려주실 것이라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박박사들이 사기를 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침묵하셨고 오히려 이방인 동방박사들을 통해서, 가장 낮은 자들인 목자들에게 메시야의 탄생을 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겉모습을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 중심을 보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면서 이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좋은 소식이 아니라 그 앞에서 수식어가 두 개나 붙어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누구 한 사람에게 혹은 몇 사람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니라 온 백성에게 미칠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곧 세계 모든 민족에게 미칠 굿뉴스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이 이 세상의 모든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굿뉴스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을 구원하실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 가운데 오셨으니 이 보다 더 큰 기쁨의 굿뉴스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가장 좋은 소식은 어떤 소식이십니까? 달리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이 어떤 소식을 들으시면 가장 기뻐하시겠습니까? 이 자리에게 계신 여러분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좋은 소식은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복권 1등에 당첨된 소식이 좋은 소식일 것입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자녀가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거나 대기업에 취업했다는 소식이 좋은 소식일 수 있습니다. 자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좋은 소식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질병가운데 고통당하다가 수술을 통해서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좋은 소식일 수 있습니다. 이 외에 좋은 소식의 종류들은 너무나 다양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이 땅 가운데 누릴 수 있는 잠시의 좋은 소식에 불과합니다. 이런 좋은 소식들은 조금 상황들이 나빠지면 오히려 나쁜 소식으로도 변할 수 있습니다.
대기업에 취업했는데 대기업에 들어가서 오히려 자녀인생이 더 망가져 버렸다면 더 이상 대기업에 다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그 누군가가 어떤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고 해도 온 세계 모든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누군가에는 좋은 소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나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난민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가 무조건적으로 난민을 수용하겠다는 발표했다면 이 소식은 난민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기쁘고 좋은 소식입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모든 국민들에게 좋은 소식은 아닙니다. 국민들 가운데는 난민 수용에 대해서 찬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예만 들어서 그렇지 그 어떤 소식이든 이 세상에 모든 사람에게 다 좋은 소식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목자들에게 알려주신 소식은 정말 온 백성이 기뻐하고 좋아할 수 있는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자를 보내셨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 좋은 소식을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그 사람이 몫입니다. 하지만 이 소식 자체는 모든 세상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굿뉴스임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해주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듣고 직접 천사들이 말한 대로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찾아가서 목격하게 됩니다. 목자들은 얼마나 감격스러웠을 까요?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소름이 짝 끼치지 않았겠습니까? 목자들은 자신들과 같은 미천한 존재에게 이런 복을 누리게 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려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들만 알고 기뻐하고 그치라고 하신 것입니까? 이 굿뉴스를 전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말한 대로 아기 예수 탄생을 확인하고 경배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또 하나 천사들이 자신들에게 이야기한 모든 것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하러 갔습니다. 16-17절 말씀입니다.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놀랍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히 마리아와 요셉은 어떠했겠습니까?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했다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요셉은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요셉은 가장으로서 아내에게도 태어난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목자들이 들려준 굿뉴스를 듣고는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미안한 마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꿨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도 자신의 경험했던 것들 전했을 것입니다. 굿뉴스를 전했을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직접 눈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탄생을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알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굿뉴스,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보다 더 귀한 축복은 없습니다. 이 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날도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요. 구원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다 누리고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구원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이 세상의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못하고 노숙인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구원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구원은 이처럼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소식은 굿뉴스 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가시면서 마지막 유언의 말씀으로 어떤 말씀을 남겨주셨습니까? 너희는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온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곧 굿뉴스를 이 세상사람들에게 전해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까지 굿뉴스를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이 굿뉴스를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롬10:13-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듣지도 못하는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다 예수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굿뉴스를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정말 복음을 전하기 힘든 시대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는 신뢰를 잃어버리고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복음을 전해도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기 때문에 이 사명을 우리는 감당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보다 더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16절 말씀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를 받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사도행전20: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곧 바울은 내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복음전하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처럼은 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들에게 굿뉴스를 전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의 가치를 먼저확신하고 그것을 누리고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서 맡겨주신 복음전파의 사명 잘 감당하시므로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굿뉴스는 전해져야 합니다. (눅2:8-21)|작성자 아름다운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