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히브리서 11 : 1~4)
제목: 믿음의 사람
본문: 히브리서 11:1-4
2020. 2. 23. 11:00 한양대학교회 주일예배
<본문 사역><예배에서는 개역개정판 본문을 읽는다.>
1 믿음은 소망된 것들의 실체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2 그러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선조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사람이라는 증언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 우리는 압니다.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인하여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좋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의인이라는 증언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에 대하여 증언하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 믿음을 통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언제나 어려운 질문이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이냐?”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런 물음입니다.
“나는 과연 믿음의 사람인가?”
이렇게 나 자신에게 되묻곤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성경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근거로 오늘 저는 믿음에 대해서, 믿음의 사람에 대해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히브리서 11:1은 믿음을 두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합니다.
둘째, 믿음은 “보이지 않은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먼저 “실상”이라는 단어를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말 개역성서는 “실상”으로 번역하지만,
표준새번역성서는 “확신”으로 번역합니다.
이 두 번역의 의미는 크게 다릅니다.
개역성서처럼 “실상”으로 번역하면 객관적인 실체를 말하지만,
표준새번역성서처럼 “확신”으로 번역하면 주관적인 신념이 됩니다.
두 번째 믿음의 정의에 나오는 “증거”를 함께 고려하면,
개역성서의 객관적인 “실상”이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주관적인 증거는 증거가 될 수 없고, 증거는 항상 객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1:1이 정의하는 믿음은 개인의 주관적인 신념이 아니라,
객관적인 실체에 의해서 설득된 확신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객관적인 실체, 실상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이것을 “바라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그것을 바라는 것입니까?
우리입니까?
만약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시 주관적인 신념이 되어버립니다.
“바라는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수동태(ἐλπιζομένων)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면,
본문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우리가 바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른 누군가 나와 우리를 향해서 바라는 것,
그것이 객관적인 실체로 있으며,
그 실체에 의해서 나의 생각과 소원이 결정되어, 확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바라시는 것,
그 객관적인 실체에 의해서 우리가 설득되고 확신되어지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출발점이 나의 소원이나 신념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국교회는 본문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하여 믿음을 가르쳐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바라는 것 대신에,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내가 바라고, 그것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실현해주실 것이라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라 여겼습니다.
물론 믿음에는 그러한 의미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믿음은 내 욕망의 실현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소원하고 바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어주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일부는 믿음을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혼동해서 가르쳐왔습니다.
믿음은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한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뜻이 객관적으로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만사를 해결한다는 과장된 말이 한국교회에서 유행합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나를 죽이고 순종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나의 소원을 기도라는 형식으로 하나님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만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고는 인간적인 처세술이나 성공학에서는 좋은 것일 수 있지만,
이것이 믿음이 되면,
그 믿음은 기복신앙, 성공주의 신화, 더 나아가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 변질 될 수 있고, 그 실태를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어려운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객관적인 실상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객관적인 실체라면, 우리 눈에 확실하게 보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간은 자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유물론적인 실증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놓으신 그 “실상”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이 모순 사이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을지라도, 손으로 만질 수 없을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객관적인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는 11:1에서 이렇게 믿음을 정의한 후,
11:2부터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믿음의 영웅들을 실례로 들고 있습니다.
18개의 믿음의 예들 중에서
오늘은 3절에 나오는 세상 창조 이야기와 4절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만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3절의 창조 이야기는 이어지는 믿음이 영웅들 이야기를 출발하는 원리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은 자연과학에 의해서 눈에 보이게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믿음으로만 고백할 수 있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모든 세계”로 번역될 헬라어는 “세계들”이라는 복수형입니다. 하나님은 두 개의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는 “보이는 것” 혹은 “나타난 것”으로서의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 나타나지 않은 세상입니다.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
이 땅에 나타난 세상과 아직 나타나지 않은 하늘의 세상,
현재의 세상과 오고 있는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보고 있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도 있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세상도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것이 믿어지면, 그게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다라고 여기는 사람은 “보이지 않은 것들의 증거”인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다라고 믿는 사람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도 있다고 믿는 사람의 극명한 차이는 4절이 말하는 가인과 아벨에게서 나타납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렸고,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받으시고, 아벨을 “의로운 자”라고 증언해주셨습니다.
이때 아벨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본문은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드렸다고 했습니다.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더 나은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에는 설명이 없지만,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벨과 같은 믿음이 없었던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성서의 아람어 번역인 타르굼(Targum)은 가인과 아벨의 믿음을 다음과 같은 대화로 설명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들에 나가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가인이 말합니다.
“나는 이 세상이 사랑으로써 창조되지 않았다고 여긴다. 또 이 세상은 선행의 열매에 합당하게 통치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편파적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너의 제물은 받아들여지고, 내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느냐?” ...
아벨이 대답합니다.
“나는 세상이 사랑으로써 창조되었고, 선행의 열매에 합당하게 통치되고 있으며, 하나님은 심판에서 결코 편파적이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의 제물은 은혜로써 받아들여졌고, 너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가인이 말합니다.
“심판은 없다. 심판자도 없다. 다른 세상도 없고, 보응도 없다.”
다시 아벨이 말합니다.
“심판은 있고, 심판자도 있고, 다른 세상도 있고, 보응도 있다.”
타르굼은 그들이 들판에서 이러한 논쟁을 벌이는 중, 가인이 분노해서 자기 형제를 죽이고 말았다고 합니다.
타르굼의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가인은 눈에 보이는 세상만이 전부라고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체험만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현실체험이 힘들고 마음대로 안 될 때, 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부정하며,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도 부정합니다.
결국 가인은 자기의 현실체험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반해서 아벨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비록 현실경험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게 다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세상을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고,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가인은 자기체험에만 매몰되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의로움을 부정했고,
아벨은 현실체험을 넘어서 하나님의 의의 최후 승리를 믿고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아벨은 히브리서 11:1이 말한 믿음의 본질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증언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믿음을 생각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가인처럼 자신의 현실체험에만 매몰되어 세상을 판단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벨처럼 현실체험 너머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가인처럼 세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경험적인 세상만을 보면서 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벨처럼 자기의 생각과 체험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세상의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경험할 수 있는 것에만 시선이 꽂히면,
신앙생활이 성공신화를 좇는 기복신앙이나 이데올로기로 변질됩니다.
요즘 어떤 원로목사가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반기독교적인 것이라 비난했다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자본주의적인 정책은 기독교적인 것입니까?
민주주의는 기독교적입니까?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그 둘 모두 장단점이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예수님,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가 기독교 정신에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자기 눈에 보이는 것, 자기 손에 잡히는 것, 자신이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것에만 매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없더라도 그 존재가 분명한 또 다른 세상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여 버렸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테러를 자행하는 일은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모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라고 합니다.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인 것입니다.
왜 그런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믿음을 이데올로기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정치적인 전쟁,
사상적인 전쟁을 믿음이라 여기는 잘못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도 그러한 전쟁을 믿음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넉넉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 믿음의 사람은 넉넉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고,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이런 넉넉한 생각과 삶이 나올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1절이 가르치는 믿음의 의미를 잘 헤아려서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출처] 2. 한양대학교회 설교문(2020.02.23)|작성자 조경철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