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3장 말씀묵상] 원수라도 똑같이 대해야 합니다. (4-5절)
직장인들이 이직을 한다거나 일을 그만 두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가 관계문제 때문입니다. 일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관계를 힘들어 합니다. 인생은 한마디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이 관계는 천륜이라 어떻게 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자라면 친구와의 관계를 맺게 되고 직장에 가면 직장동료와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부부의 관계를 맺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성도들과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관계를 하다 보면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도 있지만 별로 관계를 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해준 것도 없는데 미운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원수와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 하고는 인간적인 마음으로 관계를 끊고 안 만나고 싶지만 그럴 수 있습니까? 꼭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서 만납니까? 외나무다리에서 만납니다. 옛 말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한 번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입니까? 너 죽고 나 살자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의 가르침은 그게 아닙니다.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으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서 원수가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양보하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외나무다리에서 원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이웃을 만났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양보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원수도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원수에게도 똑같이 대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정신이요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이 부분을 잘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4절 말씀을 먼저 보시면요 “네게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자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내가 길을 가다가 보니까 길 잃은 소가 보입니다. 주인을 찾아주려고 마음을 먹고 소에게 가까이 가보니까? 나랑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의 표식이 소에 붙어 있습니다. 곧 원수의 소가 길을 잃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아이구 참 그거 잘됐네 고소하다. 한참 헤매고 다니겠구만”하면서 그냥 내버리두고 간다든지 아니면 더 못 찾도록 아예 더 먼 곳에 갖다 놓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하지 말고 길 잃은 그 소를 원수에게 가져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5절 말씀을 보시면요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이 말씀을 표준 새번역성경으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려서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 주어야한다” 이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나귀에 짐을 싣고 어디에 가는데 짐을 너무나 많이 실어서 나귀가 그만 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쓰러져 버렸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만일 그런 모습을 보았다면 “아이구 나를 미워하더니만 잘 됐구먼, 천벌을 받는 거야”라고 하며 지나쳐 버리지 말고 그 사람이 나귀를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반드시 가서 도와주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참 어려운 일을 많이 하라고 하시지요. 결국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과 계속 원수관계를 유지하고 지내면 마음이 좋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특히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관계라면 그 자체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잃은 소를 찾아 원수에게 가져다주면 원수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가서 도와주면 그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생각이 바뀝니다. 물론 단번에 바뀔 수도 있고 시간이 좀 필요할 수도 있지만 내가 먼저 그렇게 도와주면 그 관계를 회복됩니다. 결국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도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원래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아니었습니까? 롬5:1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화목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너와 나 사이만 화목하게 되었으니 됐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고후5:1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비롯한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입니다. 이 직분을 우리는 잘 감당해야 합니다.
원수의 길 잃은 소를 돌려보내 주시는 것,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것 쉽지 않는 일입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 쉽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그것도 마음이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마음은 여전히 밉고 해 주시기 싫은데도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예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가만히 보십시오. 너희가 마음에 그렇게 동하거든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마음이 동해서하기를 원하셨다면 앞에 전제를 부쳤을 것입니다. 너희가 마음이 동하거든 원수의 소를 돌려보내라. 마음이 동하거든 미워하는 사람이 곤경에 처하거든 도와주어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가 누가 네 이웃이냐 물었을 때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의 말씀해주셨습니다. 강도만난 유대인을 도와준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도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원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이방인 취급하고 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동족도 지나쳐버린 강도만난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줍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고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원수도 우리의 이웃인줄 알고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대하므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