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신앙글)

여호와 앞에서 춤추라(삼하6:12-23절)

J_카타리나 2020. 8. 18.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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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쓰촨(四川) 지방에는 변검(變脸)이라는 전통극이 있습니다. 변검공연을 직접본적은 없지만 텔레비전을 통해서 본적이 있습니다. 변검은 배우가 얼굴에 붙어 있는 가면을 계속해서 바꾸는 가면극을 말합니다. 몸과 고개를 돌릴 때마다 순간순간 각양각색의 가면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을 보면 정말 절로 감탄이 나옵니다. 원래 변검은 예로부터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며 후계자에게만 전수되어온 중국 무형문화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변검은 우리의 일상생활가운데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한 두 개의 가면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변검처럼 수시로 바뀌기도 합니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원래의 얼굴을 가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 때문에 가면을 쓴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많은 사람들이 가집니다. 하지만 때로 살아가다보면 가면을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절대 가면을 쓰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 가면을 쓰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면 너머의 진짜 나를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포장을 해도 하나님은 내용물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도 가면을 쓰고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면을 쓰고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있는 모습그대로 발가벗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다윗은 여러 가지 어려움 끝에 통일 이스라엘의 2대왕으로 등극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음에 제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산골짜기동네인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 곧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다시 돌아온 법궤는 찬밥신세가 되어 아비나답의 집에서 약 70-80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법궤는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성막의 지성소에 있어야 합니다.

그 당시 성막이 실로 있었는데 아무도 법궤를 옮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늘 이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반드시 내가 왕이 되면 그 법궤를 내가 옮겨오리라고 다짐을 한 것 같습니다. 드디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여호와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가지고 올 수 있다는 흥분된 마음으로 3만명을 데리고 온갖 악기를 다 동원해서 아비나답의 집을 향해 갔습니다.

법궤는 그동안 법궤를 관리 해왔던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에 다 싣고 옮겼습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백성들은 악기를 연주하며 기쁨으로 다윗성을 향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 이르렀을 때 법궤를 실은 소들이 날 뛰어서 법궤가 떨어지려고 했습니다. 그 때 법궤가 떨어져서 깨어질까봐 웃사가 법궤를 잡았는데 그만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법궤는 원래 제사장들이 메고 옮겨야 하는데 잘 한다고 새수레로 법궤를 옮기다가 이런 일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으로 하지 않음으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윗은 이 일로 하나님이 두려워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지 않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게 합니다. 그런데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동안 머무르는 동안 그 집과 모든 소유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셨다는 소식을 다윗은 듣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은 다시 용기를 내어 이번에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법궤를 메게 하고 다윗성으로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혹시 무엇일이 벌어질 까 싶어서 법궤를 멘 제사장들은 에벧에돔의 집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뗐습니다. 여섯 걸음을 뗄 때까지 다윗과 백성들은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섯 걸음을 떼어도 아무렇지 않자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싸인 인줄 알고 제사를 드리고 그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는 표현을 보면서 저는 다윗이 춤을 잘 추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춤을 잘 추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리듬을 잘 타는 사람입니다. 물론 비보이들이 추는 춤들은 리듬도 타고 힘도 있어야 하지만 보통은 리듬을 타면 힘을 안 드리고 춤을 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춤을 잘 못 추는 사람들은 리듬을 잘 못타니까 막춤을 춥니다. 막춤은 굉장히 힘이 많이 들어갑니다. 힘이 많이 들어가니까 막춤을 추는 사람들은 오래 춤을 추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편안 복장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베 에봇을 입었다고 말씀하는데요. 베 에봇은 특별한 종교적 의식에 참여할 때 입는 옷을 말합니다. 베 에봇은 춤을 추기에 불편한 옷일 텐데 다윗은 그 옷을 입고 힘을 다하여 막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은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성에 법궤가 들어왔을 때는 바지가 흘러 내려가 자기의 몸이 드러나는 줄도 모르고 뛰놀며 기쁨으로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은 왜 왕의 체통도 내려놓은 채 이렇게 기뻐 뛰며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요? 이 부분을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온 것이 너무나 기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후반부말씀입니다.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새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다윗은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법궤가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형편에서는 법궤를 옮겨올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왕이 되어 그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오고 있습니다. 다윗이 법궤 자체가 좋아서 법궤가 거룩한 하나님의 성물이기 때문에 그토록 법궤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법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면서 성막 안에 6평의 지성소를 만들어 그 곳에 법궤를 두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만나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곧 초월적인 하나님이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상징적으로 성막을 짓게 하셨고 법궤를 지성소에 두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하나님께서 다윗성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함께 하시 하겠다는 하나님의 싸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과 함께 하시고 이스라엘백성과 함께 하실 하나님을 생각하니 기뻐 뛰놀며 춤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을 요셉에게 말씀하실 때 이사야714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가장 큰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곧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환경과 상황만을 바라보면 하나님 앞에 항상 춤출 수가 없습니다. 환경과 상황은 때로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 가운데 코로나 19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홍수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가운데 놓이게 되면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 좋아하고 나쁜 일이 있을 때 똑같이 원망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18).”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알거지가 되어도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하나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으신데 그것을 믿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은 이 대기 중에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까? 공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기가 눈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공기를 어떻게 믿으십니까? 과학자들이 대기 중에 공기가 있다고 하니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도 있다고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다면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을 때 우리는 외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춤출 수 있습니다.

둘째, 다윗은 하나님 앞이기에 춤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또한 16절 말씀도 보십시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그리고 21절 말씀에 보면 다윗이 바지가 흘러내려 가도록 춤춘 것을 보고 비아냥거리는 미갈에게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왕이기 때문에 백성들 앞에서 체통을 지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금 백성들 앞에서 뛰놀며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같이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뛰놀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윗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지만 다윗은 백성들 앞이 아닌 하나님앞에서 뛰놀며 춤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서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백성을 의식하였다면 왕의 체통을 지키려고 했다면 이렇게 뛰놀며 춤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심지어 22절 말씀에서 내가 이 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춤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68: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의인은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시편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피로 의인인 된 사람들입니다. 의인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기뻐 뛰며 춤추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전하다가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가서 공회 앞에 서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더 이상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 앞에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예수 이름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일이 없다고 담대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이들에 담대한 모습을 본 종교지도자들을 제자들을 놓아주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면서 엄하게 경고를 합니다. 이 경고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4:19)”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당신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 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 지 판단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땅의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하나님앞에서를 라틴어로 코람데오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칼빈은 코람데오를 자신의 인생의 모토로 삼고 살았다고 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인간인지라 보이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이는 사람을 때로 의식해야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저도 목사로서 사람들을 많이 의식 합니다. 성도들을 의식합니다. 혹 목사로서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이런 행동을 해도 되나 고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의식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예전에 중고등부 연합캠프 강사로 이틀 동안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고 아이들이 찬양팀에 인도를 따라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내심 함께 뛰고 싶은 데 고민이 됐습니다. 목사가 넥타이 메고 아이들과 같이 뛰어도 되나? 혹시 목사가 체통 없이 뛰고 있다고 성도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좀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다윗처럼 춤을 추면서라는 찬양이 흘러나오는데 다윗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 다윗은 왕이 였지만 왕의 체통도 내려놓고 바지가 흘러내리도록 하나님 앞에 뛰놀며 찬양을 했지.” 하면서 저도 아이들과 하나님 앞에서 뛰며 함께 찬양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아이들과 같이 뛰었더니 다리는 아프기는 아프더라구요. 하지만 정말 기쁜 마음으로 뛰면서 목소리 높여 찬양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체면과 가면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정말 뛰놀며 춤추며 찬양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드림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삶의 현장가운데서도 사람의 눈치 보며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일해야 합니다. 아무도 없는 나 혼자 있는 공간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거룩해야 합니다.

셋째, 다윗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1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다윗은 미갈에게 베들레헴 시골 목동에 불과한 나를 선택하셔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춤출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지금 왕의 자리에 있는 것이 자기가 잘나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춤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저께는 우리나라가 광복이 된지 75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광복이 되는 날 대한민국 국민들은 기뻐하며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나라가 광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고전15:9-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과 교회를 박해하는 핍박자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이후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생명을 내어놓고 복음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이 바울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어떤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바울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 바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믿는 정도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눈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자신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님의 종이 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감히 여러분 보다 뭐가 잘 났다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더럽다고 버리시면 아무말없이 버림을 당해야 하는 것이 저의 존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허물과 부족함을 여러분 앞에 다 들추어내시면 저를 목사로 인정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목사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자리에 세워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저는 이 자리에 설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비단 저 뿐이겠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격 없는 우리에게 직분을 주셔서 교회를 섬기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건강 주셔서 이 땅 가운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강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되지 않아 우리를 겸손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춤출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기뻐하며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라고 하는 것은 꼭 몸으로 춤을 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몸으로 춤을 출 수 있을 때는 몸으로 춤을 추어야 하지만 우리는 마음의 춤을 추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기쁨의 춤을 추어야 합니다. 감사함의 춤을 추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나를 구원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하나님 앞에 언제나 다윗처럼 뛰놀며 춤추며 기뻐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여호와 앞에서 춤추라(삼하6:12-23절)|작성자 아름다운 설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