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주일과의 관계(4)
안식일과 주일과의 관계(4)
모세율법은 휘장 밖에 세워졌던 이스라엘을 다스리셨던 하나님의 통치의 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거하시기 위한
한시적이고 임시적으로 시행하셨던 육체의 예법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없이하지 못하여(히9:4, 11) 휘장을 제거할 수가 없었으며
제사를 드리는 자로 온전케 하지 못하였습니다.(히7:19, 9:9)
아무리 모세가 율법에 순종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휘장 밖에 머물렀으며
아무리 이스라엘이 모세율법의 정신까지 온전히 구현하여 신령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대면하여 교제하는 아들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율법과 제도를 따라 드렸던 예물과 제사는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이스라엘에게 맡겨둔 것이었습니다.(히9:10)
율법에 대한 개혁교회의 이해.
개혁주의의 율법에 대한 이해는 무엇입니까?
십계명과 모세율법은 정확무오하게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바꿀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고불변한 법으로 돌판에 새기셔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의 결과 구약성경은 아직도 신약백성에게 구속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이름만 주일로 바뀌고
그 내용은 그대로 이어받아서 지키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에게 있어서 진정한 성경은 구약성경이고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을 보완하는 해설서 수준에 머무릅니다.
모세의 말(구약성경)이 예수의 가르침(신약성경)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구원론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에 의하면 율법은 아무도 지킬 수가 없으며
참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신 예수만이 지키실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지킬 수가 없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셔서
획득한 의를 믿는 자에게 전가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께서 율법을 지키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키신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하여 정죄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고 말씀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의는 자신들의 기반인 율법에 반하는 이단의 괴수로 치부하여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은 율법의 핵심이며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게시며 사람으로 계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키셔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주지 못하는 것을 주심으로 율법을 온전히 완성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하는
“종이나 어렸을 때”라는 말은 구원역사적인 개념입니다.(갈4:1-3, 8-11)
그가 사용하는 “장성한 자나 어린아이” 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셔서
어린아이처럼 대하시는 가운데 역사를 동행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말에 순종하면 어린아이로서 상을 받을 만하고 의로운 것처럼
이스라엘이 율법에 순종하면 율법에서 약속된 복을 주시고 그들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죽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죽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명하는 짐승의 피흘림으로는 죄를 없이하지 못하고 (히10:4, 11)
율법은 제사를 드리는 자로 온전케 하지 못하였습니다.(히9:9, 10:1)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휘장 밖에 세워져서
모세율법과 제도를 따라 하나님과 동거하였던 어린아이와 같은 종된 백성이었습니다.
율법의 통치를 위하여 제정된 시행세칙들.
레위기 23:22절에서는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랍비에게 나아와서
“하나님께서 추수할 때에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밭모퉁이는 베지 말고
떨어진 이삭은 줍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느 정도가 모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문의하면
율법 선생들은 몇 평 정도라고 구체적으로 정해 주어야 하였습니다.
율법 선생들은 모세율법을 시행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지침과 세칙을 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밭 귀퉁이는 몇 평 정도나 남겨야 하는가?
이삭으로 판명되려면 땅에 닿는 유무가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가?
어떻게 되어야 이삭으로 판명이 될 것인가?”
등을 연구하여 이삭에 대한 규정을 세세하게 마련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언급하는 장로들의 유전입니다.(마15:1-2)
그러므로 장로들의 유전은 율법의 판례와 같아서 이스라엘에게 구속력을 갖습니다.
율법을 시행하기 위한 시행세칙이 정해지면
아무리 욕심이 많은 사람도 그 정도를 남겨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이 가능하도록 해야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많은 율법의 시행세칙을 만들어서
율법의 통치가 백성들의 삶의 구석구석에 미치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율법과 하위법인 시행세칙을 따라 행하면
판단관(재판관)들은 그를 율법을 지킨 의로운 자로 인정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율법을 따라 가난한 자를 배려한 백성으로 경건하고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였는가는 상관이 없이
밖으로 드러난 행함을 따라 언약의 법인 율법을 따라 평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한 한 사람이 생각하기를
“내가 인부들에게 말하여 밭 전체의 곡식을 다 베어서 탈곡을 한 후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겠다”
라고 생각하여 밭모퉁이까지 다 베었다면
그 모습을 본 이웃들은 재판관들(당국)에게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였다고 신고할 것입니다.
판단관들은 신고자 외에 증인 2명을 세우고 밭주인을 호출한 후에 어떻게 판결하겠습니까?
그는 모세율법을 어긴 불의한 자로 재판하여 정죄할 것입니다.
그것이 모세율법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외식이 가능하였으며
전형적인 유대인에 대한 별칭이 ‘외식하는 자’ 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모세율법을 폐하신 모세의 하나님이시다.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주일을 지켜야 합니까?
사도들은 안식일처럼 주일을 지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은 만고불변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성경이 일점일획도 변개함이 없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교회는 제4계명인 안식일을 주일로 이름만 바꾸고
내용은 그대로 답습하여 신약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 전체, 율법의 정신까지라도 온전히 폐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핵심이며 총화이었던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사람의 손으로 땅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과는 다른 성전을 일으키셨습니다.(요2:19)
이처럼 예루살렘 성전이 폐하였으면
성전제사를 위한 제사장제도와 그에 따른 십일조제도, 그리고 예배의 방식도 폐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으며 이방인의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지만
이방인과 죄인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구약에서의 경륜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인과 죄인과의 교제를 금하였습니다.
이처럼 율법에서는 죄인들과의 교제를 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과 식사하셔서
죄인의 친구라는 평을 들으셨습니다.(눅7:34, 19:1-7)
구약시대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듣으시고
세리와 같은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셨지만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고
세리와 같은 죄인의 기도는 들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눅18:9-14)
이러한 예수의 율법에 대한 도전적인 가르침은
율법의 토대 위에 서있는 산헤드린공회의원들과 유대인들이 들었을 때는
청천벽력과 같은 도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윤리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들의 윤리는 모세율법에 의거한 윤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당대와 그 이후의 삶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언약을 따라 언약백성과 온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었던 다윗에게는 아내가 여러 명이었고 솔로몬의 아내는 천 명이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남의 아내를 빼앗지만 않으면 간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다윗과 솔로몬을 간음을 행한 자로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약의 법인 율법 이상의 윤리를 요구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휘장 밖에 세워진 어린아이와 같은 종된 백성이었습니다.
율법은 종의 법이고(갈4:4-5) 어린아이의 법이고 세상의 초등학문이었습니다.(갈4:3, 9-11)
구약과 신약의 불연속성.
개혁주의 가르침은
예수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셔서 얻으신 의를 믿는 자에게 전가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지키셔서 의롭다함을 받으셨다면
우리가 덧입은 의는 율법의 의이며 모세의 의이고 종의 의일뿐 아니라 어린아이의 의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모세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행한 모세의 수제자일 뿐이십니다.
또한 율법에 반하는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행하신 일들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율법의 의를 힘입어서는 휘장 안,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교제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없이하지 못하고(히4:4, 11)
율법에 의지하여 제사를 드리는 자로 온전케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히9:9, 10:1)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따라 십자가에 죽으셔서 율법을 끝내심으로 온전케 하셨습니다.
율법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로 들어온 죄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파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휘장으로 가리우심으로
이스라엘과 온 세상이 죄 아래에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통치를 종결하시고 아들을 통한 새로운 통치시대를 여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고 말씀하심으로
율법의 통치 시대가 종결되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의 “이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율법 전체에 대하여 도전입니다.
율법 위에 서있는 산헤드린 공회의와 유대인들은
예수를 “이단의 괴수”로 정죄하여 십자가형으로 처단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개혁주의 주장처럼 율법을 온전히 지키신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하여 정죄를 받으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는 모세율법에 의거하여
사형에 합당하다고 정죄하였고 십자가에서 처형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구약 성경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모세를 통하여 증거된 옛 경륜의 기록인 구약성경과
예수를 통한 새 경륜의 기록인 신약성경이 전혀 다릅니다.
이러한 구약과 신약과의 차이가 율법과 복음의 불연속성입니다.
성경은 구원역사를 따라 기독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구원역사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옛 언약백성이 아니라 새 언약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율법)을 만고불변한 신앙의 기준으로 알고 하나님을 섬기면 안됩니다.
구약성경대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종의 도리에 의거하여 종의 윤리를 드러내는 모세교회(유대교)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님의 아들(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자녀)로서의 윤리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윤리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구약성경 자체를 영해(알레고리)하면 우리를 미신화시킵니다.
구약성경(율법)은 구원역사에 의거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재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역사에 의거하여 기독론적으로 해석한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모세에게 속하여 여호와의 백성으로 세례된 모세교회가 아니라(고전10:1-2)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하나님의 아들(자녀)로 세례된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모세가 철들어서 똑똑해지고 지혜로워진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구약성경(모세율법)이 발전하고 개선된다고 할지라도
구약성경(모세율법)에 의거해서는 여전히 휘장을 제거할 수가 없고 죄 아래에 있게 할 뿐입니다.
옛 언약의 법인 모세율법과 제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폐하였으며 하늘의 질서로 완성되었습니다.
옛 제도는 어떤 흔적이든지 그 자체의 권위를 가지고 신약교회에 들어오면 안됩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산다고 가정한다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짐승을 잡아서 제사해라.
나는 짐승이 예표하는 예수를 믿는 믿음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
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이스라엘백성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율법과 제도를 능멸하여 그들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를 대적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신약시대에 아브라함과 다윗을 본받아서 아내를 너덧 명씩 거느리고 산다면
그는 당장 교회 밖으로 출교를 당할 것입니다.
어릴 때에는 어린아이로 살아야 합니다.
쉬운 말로 하자면 날 넘으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동생과 싸우다가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싸우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형제가 싸웠음을 알게 되어서 형을 불러다가
“너는 동생이 잘못하면 싸우지 말고 다 내게 이르라.
매를 때려도 내가 때릴 것이고 용서를 하여도 내가 할 것이다”
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었는데
동생의 잘잘못을 부모에게 고자질하면 부모로부터
“너는 아직도 고자질하냐?
가정을 이루었는데도 아직도 사람이 덜 되었구나”
라고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이처럼 동일한 행동이지만
부모가 자녀들을 대하는 방식은 어렸을 때와 장성하였을 때가 다른 법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내용이 다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약신학에서는 율법과 복음의 불연속성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