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짐이 아니라 힘입니다. (고전1:18)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도 있었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의 겉옷을 땅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큰 소리로 환호하였습니다. 무리들이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흔드는 것도 왕을 영접하는 의식 중에 하나였습니다. 무리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꿈꾸던 왕, 메시야는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믿고 있었기에 이제 예수가 로마의 압제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 속에 사로잡힌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흥분하여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목적은 이들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유를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8:31-33절까지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눅18:31-33)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압제하에 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올라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무리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예수님을 환영하며 호산나를 외쳤겠습니까? 나중에 호산나를 외쳤던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무리들의 요구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물입니다. 교회마다 종탑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강대상에도 십자가를 걸어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닙니다. 십자가를 찬양하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노라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십자가가는 짐입니까? 힘입니까? 대부분 십자가는 힘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는 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삶을 보면 십자가를 힘이 아니라 짐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
사람들은 힘은 가지고 싶어 하지만 짐은 버리고 싶어 합니다. 왜 그럴까요? 짐은 포기하게 만들지만 힘은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하기 때문입니다. 짐은 나를 낙심하게 만들지만 힘은 나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짐은 나를 무능한 존재로 만들지만 힘은 나를 유능한 존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짐은 나에게 부담을 주지만 힘은 감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짐을 주시는 것은 결국 힘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곧 우리가 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보면 걸림돌을 만날 때가 있고 디딤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걸림돌과 디딤돌은 다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걸림돌이나 디딤돌은 같은 돌입니다. 내가 걸림돌로 바라보면 걸림돌이 되고 디딤돌로 바라보면 디딤돌이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걸림돌로 여겼던 것이 디딤돌이 되는 경우를 경험했지 않습니까? 디딤돌로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나의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한 것도 경험했지 않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걸림돌도 디딤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짐이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새는 다른 짐승과 자신을 비교 해보니 모든 것이 부족하게 보였습니다. 발톱도 많지 않고 이빨도 작고 네발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새는 하나님한테 나를 왜 이 모양으로 만들었냐고 따졌습니다. 따지는 새를 향해 하나님은 아무런 용도로 말해주시지 않고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새는 날개로 이것저것 시도해보지만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가 않았습니다. 새는 다시 하나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 왜 날개를 달아 주셨습니까? 짐만 될 뿐입니다. 너무 무거워서 예전처럼 빨리 달릴 수도 없어요”하나님께서는 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야 내가 그것을 왜 짐처럼 달아주었겠느냐, 너는 스스로 그것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새는 하나님께서 부쳐주신 날개가 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날개는 새에게 짐이 아니라 하늘을 날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새에게만 준 능력이었습니다. 우리도 새처럼 생각하며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짐이 하나님께서 주신 힘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부모라는 짐, 자식이라는 짐, 직분이라는 짐, 일이라는 짐, 공부라는 짐 그 외 우리가 져야 할 짐은 우리가 살아갈 이유가 됩니다. 힘이 됩니다. 특히 십자가는 우리의 짐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십자가가 힘임을 바울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바울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이지만 구원받은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당장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믿겠다고 놀렸습니다. 남은 구원하였지만 자기는 구원할 수 없는 자라고 희롱하였습니다. 예수님 옆에서 달린 한 강도마저도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이들이 보기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였겠습니까? 얼마나 미련하게 보였겠습니까?
지금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바라봅니다. 십자가를 무거운 짐으로 여깁니다. 십자가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리석게 바라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들의 눈에는 정말 그렇게 보일 것 같습니다. 자기들은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간다고 놀러가지도 않습니다. 교회도 그냥 갑니까? 헌금도 가지고 갑니다. 헌금만 드립니까? 봉사까지 합니다. 헌신합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한마디로 손해 보는 장사입니다.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미련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코로나 19로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볼 때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미련한자도 어리석은 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가 우리의 짐이 아니라 힘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의 키케로라고 하는 학자는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하고 소름 끼치게 하는 사형방법이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시면 팬티를 걸친 것처럼 되어있지만 실제로 주님은 발가벗긴 채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형은 사형수를 발가벗겨 십자가에 매달음으로써 인간적인 수치심과 조소의 대상이 되게 했습니다. 또한 육체적인 고통을 가장 오랫동안 느끼면서 죽어가게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는 몸이 처지면서 근육경련과 호흡곤란으로 질식사를 하게 됩니다. 신명기21:23절에서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십자가는 힘이 아니라 짐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의 힘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십자가에 주님이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우리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았기에 우리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눈물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데 주님께서 우리와 자리바꿈을 하셔서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힘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대속(代贖)이란, 주님께서 나의 죄 값과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곧 내가 지은 죄의 대가로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하는데 주님께서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죄값을 담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약1: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욕심 때문이고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죄를 지은 사람은 죽게 되고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용서함을 받고 천국백성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우리의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힘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먼저,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관계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 부모와의 관계를 시작으로 죽을 때까지 관계를 맺습니다. 관계 맺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신뢰가 깨어지면 관계도 깨어집니다. 사람들이 상거래를 할 때 서로 간의 신뢰를 위해서 꼭 받는 것이 있습니다. 영수증입니다. 영수증은 믿음입니다. 영수증은 확증입니다. 누군가가 물건을 사고 돈을 지불하였느냐고 물을 때 어떤 말이 필요 없이 영수증만 보여주면 됩니다. 영수증은 얇은 종이 하나에 불과하지만 필요할 때는 엄청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우길 때가 있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으름장을 놓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1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수증이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영수증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있을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는지를 바울을 네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롬5:6전반부) 우리가 연약해서 내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둘째, 우리가 경건하지 않은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롬5:6후반부) 거룩하지도 못하고 경건하지 않는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셋째,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롬5:8)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을 위하여 용감하게 죽는 사람이 혹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넷째, 우리가 원수가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롬5:10)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등을 돌리고 있을 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연약한 사람, 경건하지 않은 사람, 죄를 지은 죄인과 나와 원수 된 사람을 위해서 죽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감히 이해되지 않는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찌 하나님께서 행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보면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가끔씩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오해 할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확실한 사랑의 영수증을 받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의심이 들 때 마다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면서 까지 사랑해야 했던 대상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이 다시 한 번 내 마음가운데 새겨질 때는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벚꽃이 만발했다가 이제는 지고 있습니다. 혹시 벚꽃의 꽃말을 아십니까? 벚꽃의 꽃말 가운데는 절세미인이 있습니다. 벚꽃는 정말 절세미인처럼 자신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자랑하는지 모릅니다. 지난 금요일날 차를 타고 팔공산을 한바퀴 돌고 왔는데요. 벚꽃의 아름다운에 흠뻑 취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요. 벚꽃이 아무리 절세미인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아름다움도 다 떨어지고 맙니다.
약4:1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허탄한 자랑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것이 이 세상의 것들이면 그것은 허탄한 자랑입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97:7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시인은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미혹해서 허탄하고 허무한 것을 자랑하게 합니다. 심지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자랑하게 만듭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것이 악한 것인지도 모르고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자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허탄하고 허무한 것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랑할 거리가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에게 수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완전히 변화 되어 주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도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세 번이나 태장으로 맞습니다. 세 번이나 파선하고 일주일 동안 깊은 바다위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지낸 적도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위험을 당하고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도 못하고 주리며 목말랐습니다.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학문과 지식은 충분히 바울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위해 당한 모든 고난은 얼마든지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랑거리가 너무나 많았지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바울은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십자가만 자랑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며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만 자랑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입으로만 자랑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을 나를 통해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냥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빈 몸이 아니라 우리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를 지고 주님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잘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그 십자가가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가 외면해야 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짐인 것 같지만 우리는 그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그것이 우리의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예전 같으면 우리가 고난 주간때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서 함께 예배하고 기도했을 텐데 코로나 19로 인해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각자의 처소에서 이 고난주간을 잘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짐이 아니라 힘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늘 감사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지고 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가 짐이 아니라 힘임을 알고 최후승리 얻을 때까지 십자가 붙들고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