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신앙글)

자아를 철저하게 날마다 죽이라!

J_카타리나 2020. 3. 1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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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오래전부터 자아의 처리에 관한 서적들을 좋아했다. 그것은 자아처리에 신앙의 핵심이 있다고 믿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 중요한 자아처리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안타까워하고 후회한 적도 많이 있다.

 

정말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면서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 자아처리문제라고 생각한다. 자아만 처리된다면 신앙생활은 순탄하지 않을까? 그렇다. 문제는 자아다. 아는 분들은, 경험하신 분들은 다 이구동성으로 공감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통해서 동일하게 반복하시는 내용이 자아부인이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수를 헤아릴 수없이 많이 들어온 말씀 아닌가? 그러나 이 말씀이 자신의 삶과 신앙과 얼마나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다지 상관관계 없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의 솔직한 현실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과연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를 죽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의문이다.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아죽음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은 그런 것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아가 죽어야 한다. 자아죽음이 복음이다. 십자가가 복음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별 관심도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에 복음이 희석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성경을 더 깊이 바로 이해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믿음에 대해서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고 있고, 세상풍조에 편승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에 다니고 교회에 등록하고 신앙고백만 하면 누구나 천국은 기본적으로 가게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이처럼 자아를 죽이는 고통스러운 일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아를 죽여도 그만 안 죽여도 그만인데 누가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정말 자아죽음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몸부림치면서 자아죽음의 진리를 성취하기위해서 심혈을 기울여야한다고 본다. 자아를 죽이지 않기 때문에, 죽으려고 하지도 않고, 그것에 관심도 없기 때문에 교회는 교회다운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금 간에 일어나고 있는 교회들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결국은 이 말씀이 그대로 삶 가운데 적용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적용되다가 말다가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돈 문제, 명예문제, 자리문제, 성적인 문제 모두가 결국은 자아가 살아있고 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자아만 처리되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성도들이 지리멸렬하고 무너져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자아가 그렇게 쉽게 죽어지지 않는 것이 탄식꺼리이다.

 

캐더린 쿨만 목사님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중의 하나가 자아를 죽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죽어보려고 해본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고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고 포기해야하는가? 아니다.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왜, 이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기도를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능력을 많이 받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세미나를 많이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상담을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결론은 십자가이다. 결론은 내가 죽어야 되는 것이기에 말이다. 내가 없어지고 죽어지는 만큼만 신앙생활은 되고, 내가 죽어지고 없어지는 것만큼 사역은 기름 부으심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31절에서 이렇게 고백한 것이리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죽는 것이 얼마나 좋았으면, 죽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했겠는가? 사도바울만큼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 수많은 자신만의 자랑거리를, 남들이 부러워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리고 자신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겠다고 했다.

 

자아죽음을 자랑하겠다는 말이다. 그렇다 경험한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자아죽음은 자랑할 만한 것이다. 죽는 것이 정말 좋다. 죽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 죽음의 맛을 본 사람은 그래서 더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 고기의 맛을 본 사람이 고기를 더 찾듯이 말이다. 그래서 나도 날마다 죽기를 원하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설교하면서 살아오고 있다. 죽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죽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내 자신이 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죽어야 한다. 예수님을 느끼려면 죽어야한다. 예수님을 보려면 죽어야 한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신랑을 향한 신부의 사랑을 느끼고 싶은가? 그렇다면 길은 단 하나이다. 자아의 죽음이다. 내가 죽으면 죽을수록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내가 없어지고 죽어지면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지고 자연스럽게 부흥하게 되는 것이다.

 

“그분은 흥하여야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그러나 결코 죽는 것이 쉽다는 말이 아니다. 사도바울도 날마다 죽어야 한다고 했는데, 죽는다는 것이 한번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날마다 주님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날마다 포기하지 않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내가 죽지 않고는 신앙생활은 한계가 있다. 아니 어느 면에서 보면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누구든지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례를 받는다. 세례가 무엇인가? 왜, 세례를 받는가? 세례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원래의 그 깊은 의미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무슨 말인가? 죽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나는 죽었다는 말아닌가? 그렇다 죽었다. 이제는 자신이 사는 것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러나 죽지 않고, 죽으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은 형식이 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는 것이 아닌가? 세상과 교회가 별 차이가 없이 비슷해져가는 것 아닌가?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했지 않은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내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가운데 사는 것이라”(갈 2:20)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귀한 말씀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또 묵상해도 좋은 귀한 말씀이다. 이 말씀대로만 산다면 기적은 쉽게 일어날 것이다. 아니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행복하기 때문이다. 만족하고 평안이 넘치고 사는 것 같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런 주님이 주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맛보고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고, 믿는 것이 믿는 것 같지 않고, 도리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더 좋아 보이고 부러워 보이고 한 적은 없었는가? 원인은 단 하나이다. 죽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서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인데, 십자가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이다. 십자가가 없다면 어느 하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없는 것이다. 십자가 안에 참된 쉼이 있다. 십자가 안에 참된 기쁨, 평안, 삶의 만족감이 있다. 십자가 그늘아래 참된 안식이 있다. 그것을 원하지 않은가?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쬐이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십자가 안에는 참된 안식과 평안이 있다. 당신이 그토록 갈구하던 평안과 안식이 십자가 안에 있다. 다른 것에서 찾으려고 기웃거리지 말고 시간 낭비하지 말라. 지극히 작은 수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린다고 오래전 빌브라이트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이 기억이 난다. 예수님을 믿는 증표가 평안과 은혜 아닌가? 그런데 왜 그토록 간구하는 평안과 은혜가 없는가? 죽지않아서이다. 십자가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엡 1:2)

 

나를 죽여 달라고 기도하라. 나는 죽었다고 날마다 선포하라.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서 나는 죽었다고 고백하라. 이것이 좁은 길,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이다. 왜, 여기에 모든 신앙생활의 의미가 가득 담겨있기 때문이다. 죽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포기하면 안 된다. 나 역시도 그동안 너무 많이 포기했다. 포기하면 안 된다. 죽기를 포기하면 안 된다. 그것은 곧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역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죽어지지 않는 자신 때문에 우리에게 탄식이 있지 않은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2-23)

 

탄식이 있는 것이 정상이다. 탄식마저 없다면 회개해야한다. 그토록 주님이 명하신 죽음에 대해서, 자아부인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는 자신에 삶에 대해서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죽기를 좋아하는 심령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신앙생활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요, 신앙의 진수를 맛보는 신앙생활이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너무 단순해진 것 같다. 오직 죽기만을 날마다 기도하기 때문이다. 이 기도에 모든 것이 담겨있음을 본다. 죽기를 원하는 마음에 사역의 진보가 있고 죽기를 원하는 기도 안에 참된 영적 만족이 있기에 말이다. 그동안 나는 치유의 기름 부으심, 사역의 기름 부으심, 교회의 수적, 영적 부흥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왔다. 이런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먼저 자아가 죽어지면 이런 부흥, 기름 부으심, 사역의 진보, 모든 것이 줄줄이 따라오는 것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주님이 임재 하는 곳에 부흥은 간단히 일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주님에게 부흥이 어려운 일이겠는가? 주님에게 부흥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므로 부흥을 쫒지 말고, 자아죽음을 쫓으라. 능력을 쫒지 말고, 자아죽음을 사모하라. 개인 신앙의 부흥, 교회의 부흥, 가정의 부흥, 모든 관계의 부흥은 죽음에 있다.

 

나는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 부흥보다, 사역에 기름 부으심보다 죽어지기를 더 간절히 갈망하고 있다. 예수님! 목마릅니다. 예수님! 간절히 갈망합니다. 주님! 나를 좀 더 죽여주세요! 다시는 다시 살아나지 않도록 확 죽여주세요! 예수님보다 몇 배나 부활을 잘하는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정말 더 이상 내 자아는 부활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정말 죽어서 일어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한다. 이 심정을 이해하시겠는가? 정말 좋기 때문이다. 정말 죽었을 때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나의 걱정은 죽은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 죽은 믿음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 가짜 믿음이기 때문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이해 안 되는 이상한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충 덜어내고 자신이 편한 대로만 받아드리려는 성향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을 성경그대로 받아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보혈공로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에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함이 있는 것이 참된 믿음이고, 그 믿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강조하거나, 설교하지 않는다. 축복은 많이 강조하지만…

 

존 웨슬리는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켜,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가치고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행위가 믿음을 온전케 하고 증명한다고 믿었다. 옳은 말이다. 그는 믿음과 행함은 대립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고 말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자아가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자아가 죽으면 죽을수록 그 빈자리에 예수님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능력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님 자신이 능력이시고, 예수님 자신이 부흥과 기적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부흥과 여러 가지 은사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 때문에 은혜 받고, 축복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를 살게 하신 것처럼, 자아가 죽는 사람으로 인해 그 가족이, 그 주변이, 자아가 죽는 목회자로 인해서 그 교회의 신자들이 먹을 것이 있게 되고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죽은 만큼 성도들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한다. 내가 죽은 만큼 교회 안에, 성도들의 심령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죽음을 더 사모하고 더 사모하고 놓칠까봐서 노심초사한다.

 

나는 예전에 찬양사역을 할 때에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그 시절은 기도와 회개 그리고 나의 자아를 깨트리려고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언젠가 찬양을 인도하는데, 집회장소가 구름이 낀 것처럼 무언가로 인해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이 장소 안에 무언가가 운행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라고 생각한다.

 

이 임재를 단 한번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 사역 안에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름지고 좋겠는가? 이런 임재 안에 있을 때 사람들은 변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냥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임재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임재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기적은 평범한 것이다. 이유 없는, 왠지 모르는 기쁨과 눈물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냥 마냥 좋아지는 것이 이안에 있는 것이다.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대하 5:14)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예배,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사역의 출발은 자아의 죽음이다. 지속적인 자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죽음이 이렇게 좋은 것인데, 그런데 이 죽음이 고통을 동반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솔직히 싫어한다.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 사모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에 실패하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많이 실패하고는 안 된다고 말하고 포기해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안 되지 않는다. 된다.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자아죽음에 대한 실제의 예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다. 몇 년 전 나는 몇몇 목회자들과 함께 해외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도착지까지 가는 동안 장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십자가와 자아죽음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면서 갔다. 현지에 도착해서 주님은 나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말씀을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나는 호텔방에서 잠을 설쳐가면서 말씀을 준비했다.

 

마침 그날 증거 해야 할 말씀도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었다. 아주 열심히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증거 했다. 많은 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인사를 했다. 어떤 분은 오늘 목사님이 주신 말씀이 전부 저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전부 다 받아먹기로 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나에게 개인적으로 특별헌금까지 했다. 그렇게 은혜롭게 말씀을 전한 내가 그날 오후 동료목회자에게 사소한 일로 화를 냈다는 것 아닌가?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것이 나였다.

 

나에게 상처를 받은 그 목회자는 저녁시간에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는 나에게 모욕적인 말로 나에게 보복을 가했다. 나는 상처를 입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똑같이 복수하고 싶었지만, 함께한 목회자들과 함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순간의 분위기상 되받아칠 수가 없었다. 나는 밤새도록 괴로웠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계속해서 괴로웠다. 다만, 괜찮은 것처럼 내색을 안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을 뿐이었다.

 

자아죽음에 대해서 설교한 내가,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끼쳤던 내가 자아죽음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다시 자아죽음의 기회가 온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그 분한 마음과 괴로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쫓아가서 복수할 수도 없는 것이고, 나는 온갖 자아죽음에 관한 책들을 보면서 자아를 죽이려고 몸부림쳤다. 쉽지 않았다. 내가 설교했었고, 그렇게 살라고 말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내가 내 삶에 적용하는 것은 잘 안 되었다. 우리의 본성이 이렇게 끈질기고 죽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것이다. 복수를 하던지,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 하는데 둘 다 잘 안되어서 너무 괴로웠다.

 

갈보리 언덕의 저자 로이헷숀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좁은 문을 지나갈 때 단 한 번만 나를 부인하고 부서지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서뜨린 후에도 계속해서 변함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멸시하고 상처를 주면 우리는 즉시 그 멸시가 우리를 보다 더 낮고 겸손하게 하기 위한 은혜의 방편으로써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이에 반항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모든 마음의 동요를 뻣뻣한 목으로 받아들이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십자가를 묵상하고, 관련서적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해소는 되는 듯 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되었다. 결국은 어느 날 만남의 기회가 왔는데, 나는 자연스러운 것처럼 하면서 그에게 나의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 당신 안에는 독이 있소! 그 독소를 뽑아내지 않고는 당신이 아무리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다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아시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고 평정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뒤틀린 심사는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것이 인간의 죄 된 본성의 모습이 아닌가? 나는 하나님이 주신 자아죽음의 은혜의 찬스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다가, 성경적으로 해결하려고도 하는 이중해결책을 사용했었다. 그냥 성경적인 해결책으로 죽어야 했었다. 그냥 그 굴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죽음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죽지 않고 빠져나오려고 했기 때문에 자아죽음의 그 좋은 실제 상황에서 얻은 것은 없었다. 영적축복의 찬스를 놓쳐버린 것이다. 육에 속한 현저한 자아를 죽였어야 했다. 인정사정없이 무차별하게 십자가에 못 박았어야 했다.

 

복수하고 싶은 생각, 미워하는 생각, 높아지고자 하는 생각, 두고 보자는 생각, 내가 참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 한마디 꼭 해주자는 생각, 내 주장을 고집스럽게 관철시키려고 했던 생각들을 죽였어야 했다. 육에 속한 이런 생각과 감정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어야 했다. 지금 나에게 그런 아쉬움이 있다. 내가 주님 안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찬스였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기회는 또 있으므로 지금도 때는 늦지 않았다. 죽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그 자체가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아쉬움이 남는 지나간 일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일본에 처음 왔을 때 나와 함께 사역하던 사역자가 나보다 나이가 10년이나 어렸다. 그러나 그는 나의 상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의 언행에 대해서, 조금은 불만스럽지만 잘 참고 인내하면서 견디었다. 그러나 그 강도가 점점 높아지자,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괴로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죽어야할 내 자아가 꿈틀거렸다는 말이다. 내안에 살아있는 독사가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렇다. 내안에는 독사가 있다. 건드리면 확 일어나는 독사가 있다. 그동안 많이 죽였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독사가 휴화산같이 아직도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 당시에는 더 많이 살아있었다. 독사는 우리의 자아를 묘사하는 상징이다. 건드리면 확 쏘는 것이 독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 22:6)

 

벌레의 특징은 무엇인가? 밟아도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깨어진 자아를 의미하는 말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벌레가 되셨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사는 우리도 벌레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벌레가 아니었다. 벌레인 척한 독사였다. 늘 자아죽음을 말하고 설교했지만 나는 독사였다. 어느 날 젊은 그 사역자가 나에게 명령하는 조로 내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손님을 맞으러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건방지게 어디 누구에게 그따위로 하느냐하는 기분이었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밖으로 나온 나는 휴대폰을 걸어서 끓는 심정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그가 모욕감을 느낄만한 말을 했다. 속이 좀 시원해지고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내 마음은 더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믿음 안에서 살아가면서 화를 내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하리라고 생각한다. 무척 괴로웠다. 그리고 모든 영적능력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아니, 실제적으로 영적 능력이 다 사라졌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사과를 했다. 그러나 이미 엎어진 물을 주어 담을 수 있는가? 그 앙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은 나는 그와 더 이상 함께 사역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그와 어딘가 모르는 벽이 있는 것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하지만, 그 벽은 지워지지 않았다. 이것이 사람과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한번 닫힌 마음은 회복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 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잠 18:19)

 

나는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가끔 아쉬워한다. 그때 조금만 나를 죽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야말로 내가 주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성을 거부하고 자아를 죽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고통을 감당해야한다. 이 고통을 사모해야한다. 그러면 은혜는 강물과 같이 당신을 덮을 것이다. 온 세상을 덮을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세상이 주님의 은혜로 덮힐 것이다. 당신의 가정을 덮고, 당신의 교회를 덮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실질적인 굴욕이나 무시당함, 괴롭힘을 당함이 자아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첩경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위적으로 굴욕과 무시당함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삶속에 자연스럽게 이런 기회가 올 때 그렇게 하라는 말이다. 놀라운 사실은 자아의 죽음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 기도의 응답이 상당히 빠르다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내가 그걸 경험한다. 그만큼 주님께서 우리의 자아의 죽음을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질적인 굴욕의 기회는 자아가 죽을 수 있는 기회이다. 실질적인 굴욕의 시간을 잠잠히 주를 바라보면서 죽어지기를 소망할 때 죽음이 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임한다. 우리의 자아는 그냥 편안하고 좋을 때는 죽어지지 않는다. 죽을 이유도 없다. 그러나 수치를 당한다거나 괴롭힘을 당할 때 자아는 죽음 앞에 놓여있게 된다. 죽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굴욕을 당하는 찬스가 있으면 당하라, 무시를 당하는 찬스를 놓치지 말라.

 

누군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면 그 상처야 말로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잊지말아야한다. 계속적으로 잊지말아야한다. 한번 죽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을수록 죽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 화나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사람 앞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당신의 마음을 부숴버리라. 그러면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이나 행동보다 당신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보시고 역사하시는 분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죽어졌을 때, 크고 작은 상처로 인해서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어김없이 나에게 찾아온 것은 주님의 은혜와 기름 부으심이었다. 매번 그랬다. 그러나 그 은혜를 지속하지 못했고, 그 은혜가 있을 때 섣불리 만족해 버렸던 것이 그 은혜를 더 누리지 못하게 했었다.

 

은혜를 받을 때, 능력이 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계속해서 동일하게 겸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혜가 임해도 계속해서 자아 죽이는 일을 중지해서는 안 된다. 은혜가 임할 때 능력이 나타날 때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포하라.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선포하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사도바울과 같이 선포하라.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선포하라.

 

최근에 나는 한 동료 목사님으로부터 인격적으로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게 된 경위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말을 듣는 순간은 굴욕감으로 인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 날부터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엄청 교만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 목사님 앞에서 목사님 덕분에 내안에 있는 교만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그 목사님의 비인격적인 말이 옳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내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그 굴욕적인 말을 사용하신 것이라는 말이다.

 

정말 교만은 무서운 힘으로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하는 세력이다. 깨어있지 않으면 주님 편에 서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에 사로잡히게 된다. 교만은 자아가 펄펄 살아있는 것이고 겸손은 자아의 죽음이다. 교만은 사탄이고, 겸손은 예수님이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교만은 살금살금 알지 못하게 눈치 채지 못하게 들어오는 영의 암적인 존재이다. 나는 굴욕감을 느끼는 순간,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위험한 지경에 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나는 굴욕감을 느끼게 한 그 목사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물론, 감정적으로 깨끗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목사님의 행동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으로는 그런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영적으로 그런 깨달음이 온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굴욕당한 감정은 있지만, 그 감정 안에 이상한 은혜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꺾으면서 흐르는 은혜의 강물이라고나 할까? 그렇다. 은혜의 강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누리는 은혜의 강물이었다. 이 은혜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계속적으로 원하는 기도가 나를 더 죽여주시옵소서! 이다. 나는 예전에 온누리교회의 하용조목사님이 설교 중에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무시당하면 더 좋죠, 모욕당하면 더 좋죠, 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래서 그런 설교를 하셨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이제는 정말로 그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지. 그런 기회가 인생에 많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놓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기도 했다.

 

독일 다름슈타트의 마리아 수녀회(성공회)의 바실리어 슐링크 여사는 그의 저서 고난속의 보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굴욕은 교만을 부수는 쇠망치이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절절하게 피부로 느끼고 공감하는 말이다. 우리를 무서운 힘으로 다스리고 있는 교만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그 교만을 부수는 비결이 굴욕이라는 것이다. 어느 누가 굴욕 당하는 것을 원하는가? 그러나 원치 않은 굴욕, 무시, 자존심 상함을 놓치지 말라. 고통스럽다고 인간적으로 해결하지 말라. 그 자아를 무지하게 죽여라. 나를 부수고 주님으로 채우는 절호의 찬스이기 때문이다.

 

성 보타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굴욕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의지적으로 겸손히 낮추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4년 걸리는 겸손의 과정을 4개월 만에 도달할 수 있다, 라고 말했다. 생활 속에서 창피를 당하고 굴욕을 당하는 일이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 그것은 당신이 그토록 사모하던 은혜와 축복,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와 축복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기에 말이다

 

사실, 삶 가운데 창피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굴욕을 당하는 일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쉽게 넘겨버릴 수 있는 일도,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고 굴욕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좀 예민한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죄 성은, 인간의 자아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자아의 그 죄 성이 많이 들어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좀 덜 민감하게 보이고, 어떤 사람은 자아의 죄 성이 더 많이 들어나서 더 민감하게 보일뿐이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인 인간의 내면은 당연히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죄 성이 많이 들어난 민감한 사람은 어떤 면에서 보면 들어난 자아를 부인하고, 죽일 수 있는 더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아의 죽음을 위해서 부단히 기도하고, 자아를 완전히 죽여 달라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속히 응답해 주셔서, 요즘은 지난날의 상처라든가, 기분이 나쁘게 생각했던, 그러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내면의 상처들을 드러나게 해주신다. 정말 감사할 일이다. 나의 기도의 응답이다.

 

자아의 죽음을 좋아하시는 주님은 자아죽음의 대한 기도는 굉장히 빠르게 응답해 주신다. 한번 경험해 보시기 바란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요즘, 굴욕이나 무시를 사모한다. 그 굴욕이 자아를 부수는 엄청난 파워가 있음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자아죽음을 자랑하지 않았던가? 사도 바울만큼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신이 가진 장점과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자아의 죽음을 자랑했다. 자아죽음이 엄청난 보배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 자아의 죽음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인간적으로 당하는 굴욕이나 무시를 생각하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정말 자아의 죽음을 사모하기 때문에, 자아의 죽음을 돕는 굴욕감이나 무시당함을 사모하고 있다. 그런 중에 깨달은 사실이, 굳이 실제적인 굴욕이나 무시가 없더라도,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상처가 하나둘씩 들어나는 것도 자아죽음의 좋은 역할을 한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잠재되어있는 과거의 숨은 상처를 자아죽음의 기회로 선용하는 것이다. 나의 기도의 응답으로, 아주 오래전에 나의 내면 깊은 곳에 묻혀 있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들어나고 있다. 전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떠오르면, 애써서 다른 생각을 하던지, 아니면 기도하면서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곤 했다. 이것이 잘못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불쾌한 생각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떠오를 때, 그때의 장면이나 그 사람의 손짓, 표정, 말을 생각할 때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지고, 아픈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당시의 괴로움, 무시당함, 굴욕감을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주님 앞에서 부숴버리고 있다. 상처 입은 자아를 달래주지 말고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는 것이다. 그 효과가 아주 좋다. 실질적인 굴욕감이나 무시당함 이상으로 아주 효과가 크다. 모든 분들에게도 자신 있게 권면하고 싶다. 숨어있는 상처, 굴욕감, 괴로움을 들어내라. 그리고 하나님의 수술대로 올라가라. 올라가서 내려오지 말고 수술하고 잘라내 버리라. 그 자아를 꺾어버리라. 놀라운 영적 유익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믿는 사람은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상처가 되고,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누가 받는 것인가? 바로 죽임의 대상이 되는 자아 아닌가? 자아가 죽은 사람은 상처받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진정으로 자아가 죽은 사람은 절대로,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상처받지 않는다고 말이다.

 

상처가 되고, 상처를 받는 만큼, 그 사람의 자아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오늘부터 이 말을 잊지 말고 자신의 자아에 적용해 보라. 누군가의 말에 의해서, 누군가의 행동의 의해서 상처가 된다면, 그것은 죽어야할 자아라는 것을 말이다. 자아는 죽어야 한다. 그래야 보배로운 것을 얻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자기목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 자아를 말하는 것이다. 자기자아가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자아가 죽으면 모든 것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영적인 모든 좋은 것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영적축복을 더 깊이 누리기위해서 자아가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그리고 날마다 순간순간 나는 죽었다고 선포하라. 선언하라. 여기라.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순간순간 죽은 것으로 여기고, 선포하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적인 죽음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죽는 것이다. 그 사람을 통해서 주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다. 주님은 자아가 죽은 사람을 들어서 일본선교의 도구로 분명히 사용하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야마토 은혜교회 천창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