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아브라함 I.
그러나
믿음의 선진 중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거부였습니다.
욥이 고난을 지난 다음에
전보다 7배의 복을 받습니다.
나는 이런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어지니 당신처럼
주님의 교회를 까고
신문사에서 주는 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가난이 주제인 제 글을 읽고 '머저리'라는 아이디로 제 글에 달아놓은 댓글입니다.(글을 쓴 제가 머저리라는 것이겠지요.) 가난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입니다. 이젠 그다지 아프지도 않고, 다만 이런 댓글을 다는 분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제가 가난에 관해 쓰는 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남은 자들을 위해 씁니다. 그분들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그리고 가난이라는 어려움 속에서 힘겹게 현실과 싸우고 있는 분들에게 성서가 말하는 진정한 복인 하나님 나라를 보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이 댓글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제가 가난을 역설할 때마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들고 나오는 성서의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부자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칼빈은 아브라함의 인생을 깊이 들여다 본 후에 아브라함처럼 인생의 모진 고통을 겪은 사람을 부자였다고 호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을 돌아보며, 아브라함이 받은 부가 과연 축복이었는지, 또 그가 받았던 복인,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믿음을 경주하는 삶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
문화
믿음의 여정은 마라톤보다 더 인내가 요구되는 길게 이어지는 여정입니다. 믿음을 여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리고 바른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우리는 이 여정에서 끊임없이 정착에의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변모하신 예수를 보았던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던 모습이 바로 인간의 정착에의 유혹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 중에서도 매우 강력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본능을 이기고 바로 그 믿음의 여정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여정을 처음 시작한 것은 사실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였습니다. 데라는 아브라함과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가 떠난 이유를 성서가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승에 따르며 그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나안이 아니라 하란에 머물다 죽었습니다.
우르와 하란은 쌍둥이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동일했기 때문입니다. 하란은 우르를 똑 닮았다는 의미에서 태양의 도시인 우르와 짝을 이루어 달의 도시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일단 출발은 했지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문화적으로 동일한 분위기를 지닌 하란에 정착하고 만 것입니다. 데라는 우르라는 장소를 떠남으로써 기득권을 포기했지만 결국 문화라는 장벽을 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곧 그가 자신의 세계관을 버리거나 변화시키지 못하고 고수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데라의 실패는 아들 아브라함에게 귀중한 교훈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를 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실패란 성공보다 값질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데라의 실패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나칩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데라와 같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세계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나가긴 하지만 삶의 방식은 그대로 세상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데라가 기껏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특별히 '사후 천국'이라는 구원논리에 빠져,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 있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는 대목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여정
이제 바톤은 아브라함(아브람)에게로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데라 때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전해졌지만 목적지는 가나안이 아니라 하나님이 앞으로 지시할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주어진 과제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믿음의 여정이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여정이 된 것입니다. 목적지가 없이 떠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이렇게 기꺼이 어리석어지는 것에서 비로소 시작하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이처럼 맹목적인 것입니다.(그러나 맹종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결단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는 데에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여정을 떠나면서도 오히려 모든 것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본토 친척 아비집'이란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 그것 없이 살기란 불가능하다고 여길 정도로 절대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여정은 이처럼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버리고서도, 아무런 보장이 없어 보이는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여정인 것입니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추호도 츨림없이 믿음의 여정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 중 대부분은 아직 믿음의 여정에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한계를 정해 놓고, 자신이 허락한 만큼만 행동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분들은 아직 믿음의 여정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여정은 본토 친척 아비집으로 대변되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고 어디로 이끄시든 그곳으로 가겠다는 결단이 없었다면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믿음은 가장 먼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보화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야 합니다. 그것도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마음으로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이 믿음의 여정에 들어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여정은 아무나 들어서는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날날로 말하면 난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발적인 난민이 되는 것입니다.
난민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보트 피플'을 생각하십시오. 월남 패망 이후의 '보트 피플', 그리고 오늘날 북부 아프리카에서 유럽을 향해 떠난 '보트 피플'의 처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더 이상 살 방법이 없어 보트에 몸을 실은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여정에 들어서는 사람은 얼마든지 살 수 있는 터전인, '본토 친척 아비집'을 믿음 때문에 버리고 스스로 난민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처럼 비장한 것입니다.
기근
하란을 떠난 아브라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나안 근처에 이르렀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지시할 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브라함은 데라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가라고 하신 목적지가 가나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거의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라는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마음 한편으로 안도의 감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근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난민과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었던 그들이 기근이 든 땅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근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는 자구책으로 애굽을 향해 갑니다.
현실 앞에서 하나님은 잊혀졌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등장조차 해보지 못하셨습니다. 성서 어디에도 그가 기근 때문에 기도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해야 했습니다. 따져 물어야 했습니다. 목적지가 가나안 땅이 아니었냐고 물어야 했습니다. 더 가야하는 것이냐고,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어야 했습니다. 최소한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했다는 기록조차 없습니다.
그에게 현실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는 빛을 향해 돌진하는 부나비처럼 기근을 피해 애굽을 향했습니다. 인간에게 풍요란 모든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믿음의 여정의 시작점에서 기근이라는 시험을 통해 풍요로 향하는 존재라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알게 됩니다. 해바라기가 해바라기인 것처럼, 꿀단지에 빠져 죽는 파리처럼 속절없이 현실에 매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현실의 필요란 인간에게 그만큼 강하고 절대적입니다. 그 필요가 꼭 필요한 것인지, 그 필요가 미치게 될 영향이 무엇인지, 인간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인간이 세상에 매여 있는 존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기껏 문화라는 세상의 압력에서 벗어났지만 또 다시 필요라는 올무에 걸려 세상에 갇히고 마는 것입니다.
갑자기 옛 경험 하나가 떠오릅니다. 신대원 졸업을 앞두고 동료 전도사 둘과 함께 기도원엘 갔습니다. 5일간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첫날을 지내기도 힘들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머릿속은 온통 먹을 것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먹거리 이야기가 화재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전도사 하나가 "형님 제발 먹을 것 이야기 좀 하지 마십시오."라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먹거리 이야기 하지 말라던 전도사가 먹거리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결국 웃고 말았지만 먹거리 이야기는 나오는 날까지 즈금 잦아든 날도 있었지만 끊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떠나는 날 아침에도 기도를 마무리하기는 커녕 나가서 무얼 먹을 것인지에 대한 격론이 일었습니다. 이처럼 필요는 강하고 인간은 약한 것입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필요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필요 앞에서 먼저 하나님을 떠올리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이 요구되는 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믿음의 길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자만심입니다. 내가 할수 있다는 생각은 곧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세상의 사고입니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인간을 개인들로 조각내기를 원하는 사단의 기본전략입니다.
사람이 현실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필요에 부응하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에게 현실적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필요에 부응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믿음의 여정에서 가장 먼저 인간이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았던 시험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사십 일 금식으로 기근에 처했습니다. 그런 그분에게 사단은 돌들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현실적이 되라는 요구였습니다. 필요를 해결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증명하라는 피할 수 없는 올무까지 더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다가온 그 유혹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그분은 현실적이 되라는 요구와 필요를 해결하라는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믿음의 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가장 먼저 현실적이 되라는 요구와 필요를 해결하라는 요구 앞에서 하나님을 떠올리고 그분께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자신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얼마나 성급하고 무모한가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믿음의 여정을 끝까지 걸어 약속한 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여정에 들어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복을 당연시 하기 전에 믿음의 여정을 끝까지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어느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믿음의 여정에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우리의 일입니다. 그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에 대한 첫 번째 탐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겸손한 마음을 주십시오.
그리고 용기를 주셔서 믿음의 여정을 떠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떤 현실적인 요구와 필요에도 먼저 주님을 떠올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