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믿음은 도덕적 선택이다. (눅 22:39-46) 2015년 7월 19일
경박해진 기독교
오래 전 시골에 사는 동생네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근처에 깨끗하게 지은 커다란 교회가 있었습니다. 동생은 그 교회 목사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천 명이 넘게 모이는데 목사님이 손 한 번 들면 사람들이 다 뒤로 자빠진다고 믿음과 능력이 대단한 목사님이라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대단한 믿음일까요? 사람들을 손바닥 하나로 뒤로 자빠지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성령의 능력이라고 철떡 같이 믿는 사람들의 믿음은 도대체 어떤 믿음일까요? 하지만 이제는 감소하고 있지만 적어도 수백 만명 되는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런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를 회상해보아도 유독 소나무 뿌리를 뽑겠다고 밤새 소리치며 기도하던 학생들이 막상 시험 시간이 되면 부정행위를 하고 그런 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랑하던 모습들이 생각납니다.
한 번은 기독교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 나이 드신 멋쟁이 할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 시종 웃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도 걸고 무척 활동성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저에게도 말을 걸기에 무슨 책을 고르시냐고 물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환자가 있어서 방문하여 선물할 책을 고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책을 하나 소개해드렸습니다. 필립 얀시가 지은 <<고통이라는 선물>>이었습니다. 그분은 그 책을 들고 제목을 살피더니 내용은 살펴보지도 않은 채, "에이 이건 너무하다."라고 하며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 기도팀이 있는데 무슨 병이든 기도해서 낫지 않는 병이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기도하면 모든 병이 다 낫는 기도팀이 있을 수 있을 수 있을까요? 설사 그런 기도팀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주님과 상관이 있을까요?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분들이 이곳에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만일 그런 기도팀이 있다고 해도 그런 기도를 하는 곳은 결코 주님과 상관이 없는 곳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사고 그런 방식은 결코 그리스도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얼핏 대단해 보여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 중심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기독교를 생각하는 분들의 인격과 삶은 언제나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다는 것이 제가 60평생 기독교에 몸담고 있으면서 보아온 현실이기도 합니다.
만일 그런 능력, 그런 힘을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또 다시 원시인들처럼 태양과 달과 태풍과 지진과 힘센 짐승들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아마도 핵폭탄도 거기에 포함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곳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언제나 힘이 세진 사람, 다시 말해 성공하고, 돈이 많거나 내세울 것이 있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런 곳에는 두 렙돈을 헌금하는 과부가 설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곳에 예수님이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셨던 병든 자들, 저는 자들, 눈 먼 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받는 자들이 설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산상수훈을 자기 삶 속에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실현해나가도록 부름을 받음 사람이다."
본 훼퍼 목사님의 말입니다. 사실 그동안 저에게 깊은 감동을 준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대목에서 달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 가운데 산상수훈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은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을 행하는 이들 가운데서는 교만하지 않은 사람을 본 적도 없습니다. 자신들의 믿음이 대단한 믿음이라는 자의식에 빠져 도덕적 타락조차도 자신들의 큰 믿음으로 합리화하고 무시하는 오히려 사단을 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힘과 영향력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본 훼퍼 목사님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개없는 용서, 삶을 바꾸지 않고 용서만 가르치는 것, 참된 신앙의 고백이 없이 의식만 참여하려는 것, 축복 받기를 원하지만 희생을거부하고 있는 성도들 이것이 바로 값싼 은혜이다."
하지만 만일 본 훼퍼 목사님이 오늘 한국에 살아 계시다면 그는 이런 종류의 말들을 쏟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 쓸모도 없이 혼란만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지한 그리스도인에게 남은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말없이 진리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살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삶과 길에 담겨 있는 하늘의 풍성한 보화들을 발견하여 누리면서 그 길을 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형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요셉과 같이 오늘 우리도 이 거대한 맘몬의 낮게 드리운 두꺼운 구름을 뚫고 그 구름 위에 하나님의 빛이 빛나고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잔뜩 경박해진 기독교를 다시 진리의 종교로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 도덕적 선택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선택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삶은 강력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그분이 펼치신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한 번도 흔들리거나 타협한 적이 없었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세상과의 충돌은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이 제시하는 방법과 삶이 근본적으로 세상의 토대를 흔들고 허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당시의 정치적 힘을 가진 로마뿐만 아니라 종교체제를 구축했던 성전을 주도했던 사두개인들, 그리고 그들과 다른 길을 가면서 민중들의 지지를 얻었던 일종의 개혁파인 바리새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올무에 걸기 위해 가장 노력한 세력은 바리새파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우리의 상황과 관련하여 잠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똑같이 예수의 길을 제대로 걷고자 하는 사람과 가장 충돌하는 것이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개혁이란 자신이 옳다는 자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옳고 그름을 날카롭게 따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그것을 한계라고 표현한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은 진리 자체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사람이 없다는 말에 담아 표현하셨습니다. 그런데 개혁을 하려는 사람들이 그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각이 시공에 매인 한정된 사고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과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과는 필연적으로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기존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존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진 모든 이들과 충돌하였습니다. 그분은 심지어 가족들까지 갈라놓으셨고, 세상에서 통용되던 모든 방식들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핵심임은 물론이요 율법의 완성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이 당신 자신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에 기름을 붙는 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말을 신성모독으로 알아들었고 결과적으로 그분과는 더 이상 같은 하늘에 존재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제 죽음의 길임을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 역시 다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이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하자 도마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로 가자고 말할 정도로 그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고 이제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현실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야음을 틈타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런 위기의 순간에 평소에 하시던 대로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겟세마네의 기도라고 알고 있는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언가 분위가 좀 달랐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제자들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은 조금 다른 이유였습니다. 예수님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하기에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런 위기의 순간에 기도 부탁을 받은 제자들이 모두 잠들었다는 것입니다.
방금 살펴본 것처럼 제자들은 이번 예루살렘 입성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그들이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난감합니다. 가장 손쉬운 대답은 사단이 방해했다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 대답은 근본적으로 세상의 방식이 사단의 방식이라는 의미에서만 맞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정확한 대답은 아닙니다. 정확한 대답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만찬의 자리까지 누가 높으냐를 놓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세상의 방식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류하려고 했습니다. 마지막 체포의 현장에서 베드로가 칼을 뽑았던 일 역시 그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없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세상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분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야말로 우리 믿음의 가장 중요한 선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들은 모두 제자들처럼 십자가 앞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 모습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당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쉽게 말해 그분은 죽고 싶지 않았고, 그 일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기도하셨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지만 땀이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때까지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나라를 고수하고 끝까지 그 방식을 선택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본보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방식대로 사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피땀을 흘릴 만큼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딜레마였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뜻을 선택한다면 살 수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난감한 딜레마에서 예수님은 도덕적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것을 도덕적 선택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일단 자신이 먼저 살아야겠다는 이기적인 선택을 포기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은 우리에게 딜레마로 다가오고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기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가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딜레마는 없다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을 도덕적 선택으로 이끕니다. 지난 주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부활의 능력 안에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선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사고, 그리고 개신교 사고 안에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도덕적 선택과 관련하여, 주어진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두 가지 선택만을 할 수 있다는 사고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십자가에 달리거나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두 가지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두 가지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분은 그 순간 도덕적인 선택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길이 열렸습니다. 부활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딜레마가 없다는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의 가족들을 위협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필요한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의 생명을 취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악한 일들을 그가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국제적인 상황에서도 똑같은 문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이 필요한 핵무기 사용과 그들이 우리나라를 정복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한 가지 딜레마를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사회 안에 있는 기독교 교회에 관해 말할 때, 사람들은 종종 그 교회가 사회 안에 포함되어야 하고 따라서 모든 종류의 타협과 불성실에 참여하는 것과 바리새적 관점을 가지고 그 자신의 순수함을 위해 사회로부터 물러나는 것 가운데 어느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논쟁을 벌입니다. 더 많이 예를 들 수도 있지만 이것들만으로도 그런 딜레마들의 충분한 예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개신교 신자들과 윤리학 이론가들에 의해 도덕적 문제들이 묘사되는 방식입니다.
이 같은 사고방식은 우리 시대의 널리 퍼진 지적인 것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견해를 유심히 바라본다면, 수많은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단순한 논리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세상의 어떤 상황이 모두 단지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요? 최소한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세 번째를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의 상상력을 충분히 사용할 수는 없을까요?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게 내벼려 두는 것과 우리나라가 북한의 희생양이 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우리가 선택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과연 타당할까요? 사실, 국가들의 경험상, 그 두 가지 가운데 어떤 것도 그 둘 사이의 선택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논리와는 별도로, 이런 종류의 추론을 의심하게 하는 더 깊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도덕적 수준에 관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사고들이 다음 단계로 움직이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어떤 실제적인 딜레마도 없다는 것을 관찰하게 됩니다. 같은 이유로 그들은 두 가지 잘못된 가능성 사이의 선택을 정말로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방식은 단지 우리가 더욱 이기적인 방안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결론으로 이끄는 논쟁 안에 있는 근거제시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했습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나의 가족들을 위협하는 범죄자를 사랑해야만 하고 나의 가족 역시 사랑해야 하는 그 딜레마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그 둘 모두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딜레마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 논쟁을 이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내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것이 딜레마를 다루는 우리의 생각 안에서 진행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그 문제들은 우리에게 딜레마가 아닙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먼저 스스로를 돌보라는 결론으로 이끄는 추론의 과정일 뿐입니다.
세 번째로 딜레마에 관한 이 주장에는 훨씬 더 깊은 약점이 있습니다. 이 주장은 우주가 닫혀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것은, 정의에 의해, 예기치 않은 결과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개입의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개인적 신체적 위협의 경우를 회상해보면,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과 완전한 의는 죄 없는 사람의 희생이 의미 있고 구속적인 희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배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 그와 같은 악한 공격자들을 이긴 승리는 순교자 혹은 증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어떤 사상가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0:13에서 말하는 것과 반대로 "피할 길"이 제공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배제합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전쟁 기간에 영국 선교사 글래디스 에일워드가 그 지역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이 봉사로 이웃들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공동 감옥의 열린 마당에서 죄수들 가운데 하나가 예기치 않게 광포해져서, 도끼를 휘두르며, 놀란 사람으로 가득한 마당 주위로 돌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이 단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베어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에일워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선교사라고 부르는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나 보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녀는 안으로 걸어 들어와 도끼를 치웠습니다. 싱거운 결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녀가 그곳에 오직 두 가지 가능성, 즉 그 죄수를 죽이거나 혹은 다른 수감자들을 죽이도록 놔두는 일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 일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언제나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상할 수 없는 일을 하였습니다.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적이라 불릴 수 있는 하나님의 개입을 목격하였습니다. 부활은 바로 그런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부할 때문에 항상 이런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도덕적 선택이다
어떤 사람들은 악마가 모든 문을 닫을 때, 하나님이 창문을 여신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의미입니다. 상황이 난감하고 인간의 관점으로는 나갈 길이 없을 때, 하나님은 나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행동하십니다. 그것이 첫 번째 부활, 즉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실제에서의 부활, 제자들의 역사적 경험은 하나님의 이유가 완전히 패배한 것으로 보일 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우주는 닫혀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딜레마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분명히 어려운 도덕적 문제들은 있습니다. 한 길을 지나가는 것이 다른 길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다른 어떤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선교사 글래디스가 한 일은 다른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죄수를 죽이거나 다른 수감자들을 죽이도록 놔두었다고 비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누구도 결코 그와 같이 비난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이 누구신지의 계시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단지 한 번의 예수의 부활이 있었지만 언제나 한 개인들은 기독교 믿음에 이릅니다. 사도들이 우리에게 말했던 것처럼 또 다른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부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매일 부활로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도덕적 선택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그리 마옵소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두 가지 길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거나 도망가거나. 그리고 당연히 그들은 예수님을 만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일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제3의 길을 여셨습니다. 역사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일과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활은 오고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 선택을 위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도적적 선택이라는 새로운 명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히 주어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결정하기 힘든, 그래서 딜레마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선택 앞에서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세상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무연고 사망자들을 장사지내 주던 일, 페스트가 창궐하던 중세에 그리스도인들이 환자들을 돌보고 죽은 사람들을 묻어주는 일을 하다 더 많이 죽었던 일, 콜카타 거리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죽음의 집을 세운 마더 테레사, 남부 수단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볼보다 죽어간 이태섭 신부님, 이런 일들이 바로 믿음은 도덕적 선택이라는 명제에 충실했던 본보기들이 아닐까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Whether we live or die, it must be for God, rather than for ourselves.
Whether we live or die, it must be for the Lord. Alive or dead, we still belong to the Lord." (롬14:7-8)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확하게 증거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부활의 삶을 살았으며 도덕적 선택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일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열 명만 있어도 이 세상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 18:32) 주님은 바로 그 열 명 가운데 하나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부활은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하였습니다. 세상의 방식에 길들어 있던 제자들도, 그들의 뒤를 따라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사람들도,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던 모든 사회를 변화시켰고, 그것은 기독교 역사를 이끌고 유지시켜온 보이지 않는 힘이었습니다. 부활의 삶으로 믿음이 도덕적 선택임을 자신의 삶으로 입증한 사람들에 의해 경박해진 기독교는 다시 생명의 종교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일에 말없이 동참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