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믿음은 부활이다. (롬 8:11-14) 2015년 7월 12일
원수를 사랑하라
어떤 분이 쓴 글을 보았습니다. 75년생인 사람이 신앙 문제로 혼자 고민하다 식견이 있는 사람의 고견을 구한다는 취지로 쓴 글입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요즘 제가 묵상하고 있는 주제는 "원수를 사랑하라" 입니다. 왜 이런 진부하고, 교세확대에 도움 안되는 주제를 묵상하냐구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원수란 이미 사랑할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든 상태를 말합니다. 단순히 그냥 미운게 아니라 적대감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제가 박정희나 그 딸아이를 보고 있을때 드는 감정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상태가 원수됨이다' 란 것에 동의하신다면... 우린 아직 한번도 원수를 용서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원수 수준에 도달하지 않은 소수의 불편한 사람은 용서했던거죠... 그러면서 마치 원수를 용서한 것으로 착각했던 겁니다.
어느 누구도 원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원수란 말 자체가 사랑할 수 없는 단계에 있는 적대감을 표현하는 말이니까요. 말장난 같지만 이 내용은 계속 돌고돕니다.
그럼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 예수는 정말 원수를 사랑했을까요? 예수에게서 원수란 누구일까를 먼저 생각해 봅니다. 예수의 원수는 기득권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말도 안되는 법을 만들어 민초를 우려먹은자, 종교를 앞세워 신도를 어렵게 하는자였습니다. 예수가 이들을 사랑했을까요? 아니면 적대시하며 싸웠을까요? 성경에보면 온갖 저주를 하며 맞서 싸웠습니다.
예수가 그런 원수들을 사랑했을까요? 사랑했다구요? 어디서요? 십자가에서?
이 부분이 저에게 풀기 어려운 부분이었는데... 한참 고민하다가 나름대로의 자가당착적인 답을 얻었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에 슈퍼 바이러스가 돌고 있어 제 딸아이가 죽게 되었는데 누군가 죽어 제 딸이 살아난다면(더불어 이 병에 걸린 모든 이들이 살아나겠죠) 저는 자신있게 죽을 것입니다.
죽는 순간 제 마음에는 제가 사랑했던 딸에 대한 기억만 있지 나의 죽음으로 병에서 회복될 그네공주(슈퍼 바이러스에 걸렸다고 가정하면)에 대한 감상적 측은지심은 하나도 없습니다. 즉, 내가 딸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린거지 그네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린건 아니란거죠. 나의 죽음으로 그네가 병에서 회복될 수 있다 하여도...
저는 예수도 마찬가지였을꺼라 생각합니다. 예수의 죽음이 보수꼴통에서 말하는 천국 열쇠인지는 모르지만 예수가 죽으면서 뼈에 사무치게 그리워했을 사람과 전혀 기억하지 않을 사람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죽음의 결과가 만인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맞지만 예수가 친일파, 신이 된 귀족 목사 등을 사랑해서 대신 죽었다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사람이 기특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고민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복음에 대해 진지한 면이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사람의 생각의 흐름을 보면서 후기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고의 흐름 역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소신껏 생각하지만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의 사조가 이 사람의 사고에도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가망성이 있습니다. 힘들겠지만 이 사람은 자신의 사고를 열어놓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더 높은 식견을 가진 사람이 있고, 논리에 맞는다면 듣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배우려한다기보다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대견해하며 판단하고 있는 자신을 신뢰하고 있는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람은 스스로 질문하면서, 답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다시 말해 원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다보니 결과적으로 거기에 원수들이 포함되게 되었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자신이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또 다른 사람에게 당신도 그렇지 않느냐는 암묵의 동의를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복음을 살 수 없다는 그의 지적은 바른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그의 사고는 성경이 말하는 전형적인 반역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종교는 불교입니다. 불교는 실증적입니다. 그래서 도올과 같은 사람은 불교가 과학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종교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스스로를 어찌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라는 것이 기독교의 인간 이해입니다. 매우 비관적이지만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고 진리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복음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마침내 그분과 함께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 모든 과정의 결과이며 동시에 그 과정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불가능했던 원수 사랑이 인간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나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 집사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바로 내가 그렇게 변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며, 구원이며, 영생입니다. 그 중심에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누워있지 않고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후 그 뒤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이 살아 있다."라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두세 명이 길을 가는 가운데, 제자들이 밥을 먹거나 물고기를 잡는 가운데, 또 대로는 수백 명이 있는 자리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서 두려워하고 있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불어넣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너도나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부활은 하나의 현상이 되었고, 초대교회가 성립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서 16장에는 빈 무덤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마가복음서에는 그 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나타나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학자들은 여러 사본 증거들에 근거해서 마가복음이 원래는 빈 무덤 이야기에서 끝났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에는 빈 무덤을 발견하고 놀란 여자들이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했다는 이야기로 갑작스럽게 끝납니다.그러나 마가가 정말로 여자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의미로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종의 열린 결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생애는 편의상 마가라고 불리는 마가복음서 저자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틀이 잡혔습니다. 최초의 복음서 저자인 그는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농민과 함께한 예수님의 활동, 그로 인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복음서의 기본 틀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공적으로 세상에 등장한 이후, 예루살렘에 가기 전까지의 전반부(1-8),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과 예루살렘에서의 일화(9-13), 수난과 부활(14-16장)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가가 그린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은 수난과 부활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분량 면에서도 수난과 부활은 실제 공생애에서 차지하는 기간에 비해 꽤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마가복음서가 형성될 때 수난과 부활 이야기가 토대가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부활의 이야기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이 본문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유령이나 귀신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로 제자들과 함께 대화하고 식사를 하시고 못 박힌 자국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고기 잡는 일터에서, 밥을 먹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로 먼저 갔다고 합니다. 갈릴리는 살아 숨 쉬는 민중의 현장이었습니다. 농민들과 어민들의 눈물과 한숨, 하나님 나라를 위한 몸부림이 있는 곳입니다. 신양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처럼 실제적이고 민중적인 방식으로 명백히 나타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부활이 몇몇 제자나 일부 신자의 내면에서 일어난 주관적인 심리현상이 아니라. 수많은 민중의 삶 한 가운데서 변화를 가져왔던 현실적인 사건임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죽음을 넘어 예수를 살리는 참된 기적을 행했다는 믿음을 '몸의 부활'이라는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이 참된 기적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을 담대하고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삶과 역사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죽어도 살고,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허무와 무의미, 물질과 육체, 개체의 생사를 모두 넘어, 그리고 무엇보다 관념이나 추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생명 속에서 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개인과 역사의 근본적인 성격과 방향이 바뀌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선언합니다. 저주와 파멸, 죽음으로 가는 역사가 공생과 상생, 하나님 나라로 가는 역사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부활은 한 인간의 사체 소생이나 죽음 이후의 변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개체의 삶과 죽음을 넘어선 다른 생명의 차원인 영의 차원이 열렸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육신의 생사를 뛰어넘는 참된 기적입니다.
부활은 중심이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내 삶의 중심으로 삼아 내 속에서 예수님이 살아나시고, 내 삶에서 예수님을 살려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 예수가 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지난 주 본문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기독교는 그 믿음을 망각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기독교, 원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믿음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은 부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하였습니다. 또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을 존 하워드 요더는 이렇게 잘 표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동정녀 탄생, 혹은 산상수훈이 없었다면 신약성서 혹은 교회가 있을 수 있겠는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럴 경우 그것은 무척 빈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없었다면 어떤 기독교 교회도 없고, 어떤 신약성서도 없었을 것이다."
정말 기가 막히는 짧은 글입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이 이처럼 한심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도, 우리가 처음에 살펴본 한 그리스도인의 고민어린 질문도 바로 여기에 그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부활은 중심입니다. 만일 기독교 믿음에서 이 부활의 의미가 사라지거나 유명무실해진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일 수 없고,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부활은 다른 어떤 사실과 나란히 놓을 수 있는 성경의 역사적 사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복음의 중심이며 다른 모든 것을 달라지게 만드는 기준으로서 작용합니다.
첫 번째 사도들의 설교는 단순히 부활의 실재를 증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부활이 없었다면 어떤 교회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교회가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교회의 존재를 위한 어떤 특별한 배경도 없었고 교회의 기능을 위한 어떤 자원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믿게 된 것은 부활이었고, 조소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부활이었습니다.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부활은 가장 의미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기적들의 모든 가능성을 위한 선례가 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또 부활은 죽음 후에 삶이 있다는 일반적인 진리를 위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부활은 성경 메시지의 중심으로서 전체의 메시지는 부활로부터 중요성과 권위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우리 역사의 중심입니다. 신약성경의 중심으로서의 부활은 모든 나머지들 역시 우리를 위해 부활의 의미 안에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본문은 바로 그 변화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삶
본문은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자신의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삶이 자신의 삶이 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묶여 있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부활의 삶입니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 혹은 가장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낯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는 오늘 본문의 내용이 철저히 무시됩니다. 물론 이 사실이 전적으로 무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육과정에서만 배우는 교리적인 중요한 토대일 뿐 이것이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로마서 2:29가 말하는 의문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삶의 기초였습니다. 마음에 새긴 할례였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안에 거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몸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가지는 은혜이며 그것을 사도 바울은 여기서 빚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빚은 너무도 큰 것이고 너무도 절대적인 것이어서 우리는 그 빚을 갚을 수 없지만 그러나 그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갚을 수조차 없는 큰 사랑의 빚을 진 자로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리고 새롭게 주어진 영의 지도 원리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그것은 타고난 그대로의 자기의 본성을 따라 자신의 탐욕과 쾌락과 일신의 안위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존재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선한 일을 하는 사람, 더 분명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에 응답하는 그분의 아들과 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생명이며 그것이 구원입니다. 노파심에서 다시 강조하거니와 구원은 결코 죽은 후의 사체의 소생이 아니고, 죽은 후의 변신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며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목적에 참여하는 선한 일을 하는 새 사람이 되어 성령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그것을 잘 이해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의 가장 오래된 문서 가운데 '슐라다임 고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세례 받을 후보자들을 "부활 안에서 걷는 법을 배운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 참으로 소름이 끼칠 만큼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충격적인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제자는, 부활 안에서 걷는 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들의 삶은 그래서 부활의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걷는 법을 배웠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하지만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침내 걷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그리스도와 합한 삶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그런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하기 위해, 주님이 그들의 삶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을 드리기 위해, 그리고 주 안에서 형제와 자매들이 된 그리스도인 동료들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 세례를 받고, 자신의 옛 자아가 죽고 이제 새롭게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천명으로 진지하게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해 이제 죄는 어떤 주장도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자신의 경험이 그것에 의해 시험되어야 하는 실재입니다. 근본적으로 실질적인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을 움켜쥐고 있던, 노예상태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죄의 지배를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가 우리에게 더한 사슬의 죽음을 의미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순종의 삶을 위한 새로운 종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 무언가 실재적인 것이 발생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고 장사된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는 덧붙여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1-4)
그리스도의 부활은 도덕적인 삶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재임을 보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 질문을 제기했던 사람에게 분명하게 답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원수 사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말씀에 담겨 있는 사도 바울의 감격을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단지 이 말씀을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에는 설렘과 기대가 섞여 있습니다. 그는 순종과 즐거운 승리의 삶을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에 이 말씀을 부담이 아니라 소망으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속에서 그것을 함께 감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중심입니다. 그것이 실재임을 믿는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게 됩니다. 다릅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고 외쳤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이 사라졌습니다. 부활의 삶이 실종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말하여도 아무도 믿지 않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며 부활은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위엣 것을 찾지 않는다면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입니다. 과연 우리는 위엣 것을 찾고 있을까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의 입에서 나왔던 찬양이 우리의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우리도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원수사랑은 그 모든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부활의 삶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